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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기 전에 독자들께 미리 밝혀둘 게 있다. 기자는 <식탐>(시사IN북)의 저자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과 <오마이뉴스>에 함께 근무했던, 언론계 선·후배 사이다. 제주올레 길을 함께 걸었던 적도 있고, 두 차례 일본 규슈올레 행사에 동행하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일부 에피소드는 직접 경험했던 일이다. 서 이사장이 두 권의 제주올레 책을 펴낸 뒤, 다음 책의 주제를 음식 이야기로 정한 것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기자 주>


2011년 봄 일본 규슈관광추진기구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규슈올레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자 사전답사에 나섰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1년 후 올해 봄 제주올레와 업무 협약을 맺은 규슈올레가 정식 개장했다.
 2011년 봄 일본 규슈관광추진기구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규슈올레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자 사전답사에 나섰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1년 후 올해 봄 제주올레와 업무 협약을 맺은 규슈올레가 정식 개장했다.
ⓒ 이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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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가 없다. 맛집 정보도 없다. 식당 지도나 전화번호도 없다. 수많은 음식이 등장한다. 화려한 음식이나 분위기 있는 식당이 배경은 아니다. 대개 소박한 음식이다. 때로는 음식 재료가 주인공일 때도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맛난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 중년 여자의 먹을거리에 대한 추억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부터 <맛객>이 아닌 <식탐>이지 않은가.

글, 길, 맛. 서명숙의 인생 화두다. 23년 동안 서명숙 기자로, 이후에는 제주올레 이사장으로 지내고 있다. 글과 길은 그의 인생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맛은 전체 인생을 관통한다. 글과 길이 의지였다면, 맛은 본능과 욕구에 기반한다. 그런 점에서 <식탐>은 제주올레에 관한 책보다 더욱 사적이고 주관적이며, 서명숙의 속살을 한층 더 드러내고 있다.

<식탐>을 읽고나서 든 두 가지 궁금증

'길 내는 여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펴낸 책 <식탐>.
 '길 내는 여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펴낸 책 <식탐>.
ⓒ 시사IN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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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은 음식 이야기를 풀어쓴 책이지만, 음식 책은 아니다. 서명숙의 삶의 궤적과 사람 관계, 고향에 대한 향수와 여행의 설렘이 씨줄 날줄로 직조돼 있다. 예전 책도 그러했듯이, 서명숙 책의 장점은 스토리가 탄탄하면서도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멋을 부리지 않아 읽고난 뒤에도 담백한 맛의 여운이 오래간다. 글쟁이의 직접 경험담이 갖는 미덕이다.

저자와 친분이 있는 탓에, <식탐>을 읽으며 두 가지 개인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첫 번째는, 초보 엄마 시절, 계란 후라이조차 잘 못 만들었다(이 이야기는 책에 없다)는 그가 어떻게 음식을 잘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나중에 저자와의 대화 같은 시간이 있다면, 참석하는 사람이 한 번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건망증'으로 유명한 그가 어떻게 음식에 얽힌 이야기는 이리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음식점 남원에서 민어 요리 3종 세트를 먹었던 에피소드는 기자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세세한 디테일 묘사에 깜짝 놀랐다. 일기를 써놓았던 게 아니라면 그냥 머릿속에만 남겨진 기록이었을 텐데. 책에 실린 다른 사례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서명숙의 건망증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그가 광화문 시절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일 때다. 하루는 후배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폰으로 긴 통화를 하고 있었다. 후배들은 언제 통화가 끝나나 기다렸다. 몇 분 후 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사무실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몇 분 후에 상기된 표정으로 나오더니 하는 말. "내 휴대폰이 없어졌어. 책상에도 없는데..." 손에 휴대폰을 쥔 채로,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행 가기 전에 여권을 분실하는 건 징크스에 가깝다. 그런 그가 <식탐>에서는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기억해내다니, 놀라운 일이다. 

서명숙, 고향의 음식에서 역사와 문화를 읽는다

서명숙의 식탐은 일상에서 드러난다. 지난 2009년 그와 함께 제주올레 4코스를 걸었다. 남원포구에서 출발해 표선으로 가는 역방향 '클린 올레' 행사였다. 표선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안가 길을 걷다가 미역귀를 채취해가는 오토바이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초면인 그 아저씨에게 미역귀를 얻어냈고, 일행은 간식삼아 짭조름한 미역귀를 먹으며 길을 걸었다. 그는 맛있게 미역귀를 먹으며 일행에게 제주와 미역귀에 관한 추억을 풀어냈다.

2009년 제주올레 4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으며, 표선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미역귀'를 채취한 오토바이 아저씨를 만났다. 인심 좋은 아저씨 덕에 서명숙 이사장과 일행들이 미역귀를 얻어 맛을 보고 있다.
 2009년 제주올레 4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으며, 표선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미역귀'를 채취한 오토바이 아저씨를 만났다. 인심 좋은 아저씨 덕에 서명숙 이사장과 일행들이 미역귀를 얻어 맛을 보고 있다.
ⓒ 이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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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소개된 식당, 서귀포 부두 근처의 '할망 뚝배기'도 그의 추천으로 찾아갔었다. 그 집에서 먹은 오분자기 뚝배기와 갈칫국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후로도 제주올레 7코스를 가거나 서귀포 근처에 가면 찾는 음식점 1순위가 할망 뚝배기다. 그 집은 전세버스 관광객들이 찾는 맛집이 아니다. 제주 사람들에게 먼저 인정받은 집이다. 서명숙의 맛집 기준은 이렇듯 허명보다 실속, 신선한 재료의 맛을 잘 살리는 걸 우선 순위로 꼽는다.

문화재나 그림도 기본 지식을 갖고 보면 다르듯이, 음식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 소개된 '쉰다리'라는 음식은 특이한 이름만큼 생소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쉰 보리밥을 버리기가 아까워 누룩을 넣고 발효시킨 음료가 쉰다리다. 먹어본 적이 없지만, 술과 알코올의 경계에 있는 쉰다리는 요구르트와 막걸리의 짬뽕같은 맛이란다. 쉰 보리밥을 재활용한 게 유산균 덩어리의 건강 음료로 변신해, 물질하는 해녀들의 피로회복제 역할도 한다니 놀랍다. 이처럼, 서명숙은 고향의 음식에서 살아있는 역사와 문화를 읽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말이 달라서 손짓 발짓하며 의사 소통하는 바디 랭귀지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음식을 통해 교유하는 푸드 랭귀지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어느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떠올리며 그는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들과 일을 벌였다. 시장에서 밀가루, 호박 등을 사가지고 와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부침개를 만들었다. 알베르게에 있던 초면의 이방인들에게 한국의 부침개 세례를 베풀며, 음식으로 소통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 일을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교할 때는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식탐> 원고를 쓰면서 음식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니, 남자들은 대개 음식 품평에 가까운 에세이, 여자들은 레시피를 담은 요리 책이 대부분이었단다. "다른 여자들보다는 남이 해주는 음식을 더 많이 먹어봤고, 남자들보다는 더 많이 음식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낸 책이 <식탐>이다. 서명숙이 차린 밥상 <식탐>에 둘러앉아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 어느 해 가을 제주 바닷가 해녀의 집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그와 문어 숙회에 소주 한 잔 주고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음식은 사람이다.


식탐 - 길 내는 여자 서명숙 먹으멍 세상을 떠돌다

서명숙 지음, 시사IN북(2012)


태그:#식탐, #시사IN북, #제주올레, #서명숙,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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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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