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마도와 부산은 가깝다. 부산의 야경이 수평선 위로 찬란하게 보인다. 사진은 임진왜란 때 왜의 수군이 정박해 있었던 오오우라(大浦)의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 야경으로, 실제로는 낮에 방문했기 때문에 직접 찍지는 못하고 전망대 건물 내부에 걸려있는 것을 재촬영했다.
▲ 대마도에서 보는 부산 야경 대마도와 부산은 가깝다. 부산의 야경이 수평선 위로 찬란하게 보인다. 사진은 임진왜란 때 왜의 수군이 정박해 있었던 오오우라(大浦)의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 야경으로, 실제로는 낮에 방문했기 때문에 직접 찍지는 못하고 전망대 건물 내부에 걸려있는 것을 재촬영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7.4km. 독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땅은 오키섬인데, 그 곳과 독도 사이는 157.5km.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약 2배 거리. 그렇다면 옛날에, 대한민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풍랑을 넘어 그곳까지 오갔을까? 누가 독도를 차지했을까?

대마도도 마찬가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불과 49.5km. 배를 타면 1-2시간 만에 닿는다. 그래서 부산의 일부 호사가들은 대마도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다고 한다. 그만큼 가깝다는 이야기.

그러나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까지는 147.5km.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견주면 3배나 멀다. 당연히,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었다.

그 사실을 증언해주는 사례는 근래에도 있었다. 대마도에 비행장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다. 일본 본토에 유학가 있던 대마도 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로 부산에 와서 다시 배를 이용해 집에 갔다. 그것이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대마도 비행장은 1975년부터 본격 가동된 반면, 김해 비행장은 1963년부터 명실상부한 '국제' 비행장 역할을 했다).

대마도 히타카츠 항의 부두에서 본 '쓰시마 투어버스 노선 안내'도. 한글이 더 크다.
 대마도 히타카츠 항의 부두에서 본 '쓰시마 투어버스 노선 안내'도. 한글이 더 크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형산강이라는 이름은 형산(兄山)에서 왔다. 형산 아래로는 형산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면 다시 산이 솟아 있다. 그 산은 제산(弟山)이다. 그래서 두 산을 합해 형제산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에는 형산을 북형산(北兄山)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지금도 산 정상부에 750m 둘레로 남아 있는, 왜구를 지키기 위해 신라가 쌓았던 토석성의 이름은 북형산성이었다. 해발 높이는 불과 265.5m. 하지만 걸어서 오르면 한 시간도 더 걸린다. 산 아래가 바로 수평선 높이인 까닭에 실제 체감 고도는 1000m도 더 되기 때문이다.

형산 정상부 턱밑에 있는 왕룡사, 이 곳은 과연 포항일까 경주일까. 절 뒤편 산령각의 바위 위에 올라 내려다보면 포항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니, 산 바로 아래부터가 바로 포항이다. 형산강이 시가지 중심을 흘러 동해로 뛰어들고 있다.

왕룡사 산령각 뒤 바위에 올라 바라본 포항 쪽 전망. 형산강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광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왕룡사 산령각 뒤 바위에 올라 바라본 포항 쪽 전망. 형산강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광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경주는 방향도 알 수가 없다. 지리책에서 습득한 지식이 있어 머리로는 왕룡사 무량수전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경주 방면이구나 짐작할 수 있지만, 눈으로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니 '독도는 우리땅'이고,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이니 '대마도는 우리땅'인데, 왕룡사에서 경주는 머리카락도 안 보이고 포항은 턱밑이니 그렇다면 왕룡사는 포항 땅?

그 탓에, 왕룡사는 경주 여행길에서 빠지기 쉽다. 포항 들어가는 '대문 앞'에 있으니 경주 답사자가 거기까지 갈 마음을 먹을 리가 없다. 하지만 행정구역상 경주의 것인 왕룡사를 '경주 여행' 연재를 하면서 빼놓을 수는 없다.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번지.

게다가 왕룡사는 위치만 경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도 '신라'를 담고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려에 항복한 뒤 개성에서 살다가 죽어 무덤을 경기도 연천에 남긴 경순왕 때문에 '천년 왕도' 경주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점이 아쉬웠는데, 어찌 왕룡사를 가보지 않을 것인가.

맨 왼쪽 건물이 경순왕과 태자를 모시고 있는 '왕장군 용왕전', 가운데 큰 건물이 본전인 무량수전, 오른쪽 2층집이 종무소. 포항과 형산강 그리고 동해를 보여주는 신령각은 (사진에서는) 무량수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왕룡사 전경 맨 왼쪽 건물이 경순왕과 태자를 모시고 있는 '왕장군 용왕전', 가운데 큰 건물이 본전인 무량수전, 오른쪽 2층집이 종무소. 포항과 형산강 그리고 동해를 보여주는 신령각은 (사진에서는) 무량수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전설에 따르면 본래 형산과 제산은 붙어 있었다. 형제가 나란히 손 잡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서 비만 오면 이곳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안강평야까지 물에 푹 잠겼다.

경순왕 시절은 선왕 경애왕이 견훤에게 죽는 등 나라가 망국의 와중에 빠져 있었다. 경순왕은 어찌하면 좋을까 싶어 점을 쳤다. 형산과 제산 사이를 끊으면 장차 국운이 흥성해진다는 점괘가 나왔다. 동쪽에서 일어날 반란이 사전에 제압되고, 치수가 되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진다고 했다.

경순왕과 태자는 백일 후 형제산의 맥을 끊어 안강 호수의 물이 동해로 바로 들어가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은 임무를 나누었다. 왕은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와 천지신명에게 빌고, 태자는 용으로 변하여 산맥을 끊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만약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에게 목숨을 내놓기로 하늘에 맹세도 했다.

경순왕과 태자의 목각 인형이 모셔져 있는 법당 '왕장군 용왕전'
 경순왕과 태자의 목각 인형이 모셔져 있는 법당 '왕장군 용왕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자는 큰 뱀으로 변신하였다. 사람이 처음부터 용이 될 수는 없는 법, 누군가가 뱀을 보고 용이라고 불러주어야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였기 때문. 태자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누워서 용 소리를 듣게 되는 천운의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겁을 내고 피하기만 할 뿐 아무도 용이라 불러주지 않았다. 그 사이 시간은 어느새 99일이 흘렀다.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태자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순간, 지나치던 어떤 할머니가 '무슨 뱀이 저리 크노?'하고 중얼거릴 때 등에 업혀있던 아기가 '할머니, 뱀이 아니고 용이야!' 하고 외쳤다.  

그 순간, 태자는 용이 되었다. 태자는 즉각 하늘로 올라 비를 부르고 바람을 일으켰다. 형산과 제산의 사이도 갈랐다. 안강 일대를 잠그고 있던 큰 물은 저절로 빠져 동해로 흘러들어갔다. 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의 점괘를 해결하였다.

경순왕과 태자를 모시고 있는 법당 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도
 경순왕과 태자를 모시고 있는 법당 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경순왕은 하늘에 오르는 일이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았다. 결국 태자가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늘에 한 약속이니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형산과 제산을 갈라놓은 업적이 도루묵이 될 게 뻔했다.

하지만 태자는 차마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칼을 뽑아 경순왕의 얼굴에 작은 상처를 하나 남김으로써 하늘에 용서를 빌었다. 왕룡사의 '왕장군 용왕전'에 지금도 모셔져 있는 경순왕 목각인형의 얼굴에 작은 칼 상처가 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왕장군 용왕전'에 모셔져 있는 경순왕과 태자. 목각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른쪽 경순왕의 얼굴에는 작은 칼자국이 보인다. 전설 그대로다.
 '왕장군 용왕전'에 모셔져 있는 경순왕과 태자. 목각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른쪽 경순왕의 얼굴에는 작은 칼자국이 보인다. 전설 그대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안강호수가 있던 자리에 물이 빠지자 논이 생겼다. 현재도 그 들에는 '유금'이라는 땅이름이 붙어 있다. 뱀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애간장을 태우고 있던 태자를 용으로 불러준 아이의 이름이 유금이었는데, 태자가 그 땅을 유금에게 하사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시간과 장소가 분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목각인형과 땅이름 유금이라는 증거도 남아 있다. 시간, 장소가 분명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는 설화를 전설이라 한다. 경순왕의 전설이 남아 있는 왕룡사, 아무래도 경주의 것이다. 아무리 이웃사촌이라 해도 혈연 관계일 수는 없지 않겠나. 

왕룡사는 특히 경치가 뛰어나다. 해발은 얼마 되지 않지만 사방을 굽어보는 전망만은 특이하게 높은 절묘한 위치 덕분이다. 혹 아직 못 가보셨다면 한번 답사해 보시라.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한 현장을 목격하는 보람도 맛볼 수 있는 왕룡사로!

덧붙이는 글 | 본래 왕룡사는 '포항 여행'을 쓰게 되면 그때 다루려고 '경주 여행'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주의 한 독자가 '넣어 달라'고 요청을 하여 새로 집필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경주 여행 21'과 '경주 여행 22'에서 다룬 '포항에서 경주로'의 여정에도 왕룡사를 포함시켜야겠습니다. 물론 가장 앞에 왕룡사를 넣어야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왕룡사- 양동마을- 굴불사터 사면석불- 백률사- 탈해왕릉- 경주이씨 탄강지- 헌덕왕릉'이 되겠습니다.



태그:#경순왕, #왕룡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