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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에게 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란 참 쉽지 않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책들을 읽든 읽지 않든, 책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기란 힘든 노릇이다. 글을 쓰고, 책으로 엮어내고, 그 책을 읽고, 생각하고, 나누고, 깨닫고,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므로.

게다가 책은 정신의 양식이며,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시피, 우리 인간의 삶 속에 책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다. 책 속에 열린 길을 따라 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장소와 시대를 만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앎과 깨달음으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지 모른다. 책을 가슴에 품는 일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일, 인간다움의 극치가 아닐는지.

그러나 책은 매일 홍수처럼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렇게 중요한 책읽기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힐 때가 많다. 독서의 정석을 따로 배운 바가 없고, 학교 교육도 학과 공부에 치우쳐 부실하다. 대개가 그냥 읽다보니 터득된, 개별적인 경험의 소산이기에 사람마다 다르다. 옛날에 비하면 읽을 수 있는 책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그에 비례하여 질적인 성장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도 의문이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옛사람들의 독서법이 고스란히 담긴 책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옛사람들의 독서법이 고스란히 담긴 책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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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전 문학의 지평을 활짝 열어젖힌 정민 교수가 펴낸 책,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보림 펴냄)은 독서에 대한 태도와 인식, 그리고 방법을 찾아가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성장한 딸, 벼리에게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책의 역사와 선인들의 독서법, 그리고 단단하고 맑은 겨울 물 같이 명징한 독서의 세계를 들려주고 있다.

<고전 독서법>은 주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다룬다. 독서에 관한 한 대단한 경지에 도달했던 선인들의 독서관이나 독서방법 등을 10개의 주제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그 첫째가 다독과 정독에 대한 견해다.

다독이냐 정독이냐, 꼼꼼히 읽어야 하나 많이 읽어야 하나, 이 논의는 해묵은 논쟁인 듯 보인다. 지은이는 어렵지 않게 그 방법을 제시하는데, 정독과 다독 중, 어느 것이 독서의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없고, 정독할 책은 정독하고, 다독할 책은 다독하면 된다는 것이다. 책의 성격에 따라, 필요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면 되며, 이런 판단조차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여 비교적 걸림 없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있다. 옛사람들이 말하는 다독은 여러 가지 책들을 폭넓게 읽는 다독이 아니라,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는 다독이다. 선인들은 <논어>나 <맹자>와 같은 기본 경전은 몇 백 번, 몇 천 번씩 숫자를 세면서 읽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다독을 통해 정독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를 100번 읽어라, <맹자>를 100번 읽어라"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은 '작문모범'이란 글에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장하고 있다.

<시경>과 <서경>은 본문을 100번씩 읽어라. <논어>는 풀이 부분과 함께 입에 익을 때까지 100번씩 읽어야 한다. <맹자>는 본문만 100번씩 읽어라. <중용>과 <대학>은 횟수를 따지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돌려가며 읽어라. <통감강목>과 <송감>은 선생님께 배운 뒤, 좋은 내용이 보이면 한두 권 정도 베껴 써서 수십 번 외울 때까지 읽어라.(55쪽)

기본 경전이 이미 제시되어 있는 옛날과 지금은 독서 환경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도대체 옛사람들의 독서력은 얼마나 단단한 것인가? 게다가 무작정 많이 읽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고, 꼼꼼히 집중해서 읽으면서 음미하고 되새겼다고 하니, 이와 같은 독서를 통해, 깨달음과 지혜가 속에서 자라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이러한 독서법은 현재 서구식 학교 교육의 측면에서도 살펴볼 가치가 있다. 입시 때문에 지식 교육이 왜곡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과연 넓게 가르쳐야 할까, 깊이 가르쳐야 할까? 지금은 거의 넓고 얕게 가르치는 것이 대세인데, 이로 인해 시험이 끝나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배운 내용이 도무지 몸과 마음에 남지 않는다. 아무리 공부해도 식어버린 지식일 뿐이지만, 하나를 익혀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밀릴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꾸준히 읽어야 힘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조선 후기 대단한 학자였던 대제학 홍석주는 일과를 정해서 책을 읽고, 여러 책을 동시에 읽었다고 한다. 따로 책 읽는 시간을 두지 않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꾸준하게 책을 읽었다.

홍석주는 그러면서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고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펼친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무리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고 후세 사람들에게 권면하였다.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옛사람들의 독서법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리듬이 생겨나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기분도 좋아지게 한다는 것이다. 독서라는 말 자체가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말이고, 눈으로만 읽는 요즘의 독서는 도리어 이상하게 여겨, 정작 눈으로만 읽는 것은 간서(看書)라고 했다 하니, 오늘날 책을 읽으매 소리가 사라진 것은 곧 흥겨움도 사라진 것이 아닐까?

옛날 서당에서는 요즘으로 치면 여러 학년의 학생들이 한데 모여 공부했다. 많은 학생들이 저마다 배우는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굉장히 시끄럽고 소란스럽지 않을 수 없겠지. 그래서 어떤 시인은 서당에서 아이들이 책 읽는 소리가 연못가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는 멋진 비유를 한 적도 있다. 그 점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100만 권에 가까운 책이 있었다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언제나 여러 사람들의 책 읽는 소리가 하루 종일 높은 천장 위로 웅웅대며 떠다니는 소란스러운 공간이었을 게다.(77쪽)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서당과 도서관의 묘사가 참 정겹다. 이런 모습을 오늘날 학교 교실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면 어떨까? 교실 붕괴의 난장판이 아니라 책 읽는 소리가 웅웅대며 시끄러운 교실, 시끄러워도 진지한 배움이 일어나는 교실, 책 읽는 소리들의 음률과 리듬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교실,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만약 소리 내어 읽기에 효용이 별로 없었다면 옛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발전시키지도 않았을 터인데, 노래의 음률은 한 번 외우면 잘 잊어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문자는 반드시 음가(音價)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소리를 내어야만 문자의 값어치가 완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 소리 없이 문자로만 읽는 것은, 어찌 보면 문자 값의 반만 취하는 것과 같으니.

'백이열전'을 평생 1억 1만 3000번을 읽은 김득신

<고전 독서법>에는 무시무시한 독서광들을 많이 소개 하고 있다. 전국시대 정치가 소진, 당나라 사람 이밀, 원나라 이강, 전한 시대 학자 광형, 후한 때 고봉, 관녕, 송나라 장무구, 일본 에도 시대 학자 오규 소라이 등, 외국 독서가들을 소개하고 있고, 우리나라 독서가로 토정 이지함, 의병장 조헌, 조선 중기 학자 고응척, 그리고 양연의 고사도 있다.

그 중에 단연 으뜸은 역시 김득신이다. 사마천 <사기>에 실린 '백이열전'을 평생 1억 1만 3000번을 읽었다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평생 읽을 만한 책이 있다는 것도, 그 책을 무수히 읽고 욀 수 있다는 것도 참 행운이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그런 책이 없다.

그리고 <고전 독서법>에서는 '읽으면서 기록하기', '통째로 외우기', 메모하는 습관 가지기', '책 읽는 순서에 따라 읽기', '의심하고 의문 품기' 등의 독서법을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독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터. 조선을 문약(文弱)한 나라라고 하는 것도 책만 읽을 줄 알았지, 현실 감각이 없는 선비들을 꼬집는 말일 텐데, <고전 독서법>에는 독서를 통한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을 가지런하게 하고 틀을 만들어 앎의 상태로 나아감)와 책의 세계에만 빠지지 않고 세상을 모두 책으로 인식했던 옛사람들의 자세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다.

활자에 머리를 처박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다. 잠들었던 내 정신이 깨어나고, 답답하고 심심한 생활에 생기가 돋아날 수 있다면 책을 읽지 않아도 독서다. (……) 홍길주도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온갖 볼거리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독서다." 이것도 멋진 말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길 떠나는 날은 종일 공부하는 날이다." 책을 들고 있어야만 독서가 아니다. 정신을 깨어나게 하는 모든 활동이 독서다. 독서의 범위를 이렇게 확장하면 세상 모든 일이 독서 아닌 것이 없게 된다.(190-191쪽)

나는 <고전 독서법>을 통해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 비에 떠내려가도 책만 읽고 있었던 무능한 선비 이야기도 잘못 알려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후한 때의 고봉(高鳳)이란 사람의 이야기인데, 그도 대단한 독서광이어서, 비가 오면 마당에 널어둔 겉보리를 꼭 거둬 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들었지만, 책에 열중하다보니 보리가 소낙비에 다 떠내려가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독서에 몰두한 사람의 예화이지, 책만 좋아하고 곡식이 떠내려가도 내버려둔 무책임한 선비의 예화가 아닌 것이다.

독서는 한 계단 두 계단 밟아가며 걸어 올라가야 하는 아날로그 행위이므로, 디지털 문명과 필연적으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등장은 인간의 독서 행위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도덕경에 '되돌아오는 것, 그것이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이라 하였으니, 독서의 소중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욱 피어날 것이다. 책은 오래 되었지만, 그 속에 멋진 미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지은이의 말이 힘차다.

덧붙이는 글 |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정민 씀, 보림 펴냄, 2012.09.15, 1만3000원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정민 지음, 보림(2012)


태그:#고전 독서법, #독서광, #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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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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