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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표지
 슬라보예 지젝의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표지
ⓒ 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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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보이는 폭력과 웬만해선 눈으로 감지하기 어려운 폭력이 있다. 젊은 여교사를 희롱하는 남학생과, 학생을 성적으로 옭아매고 차별하는 학교를 그려보라.

물리력으로 행사되는 폭력과 말로 수행되는 폭력이 있다. 용산 남일당의 농성자들을 진압하던 경찰 특공대와 농성자들을 '테러리스트'로 부르던 언론의 붓끝을 생각해 하라.

일시적이고 단일하게 이루어지는 폭력과 장기적이고 구조적으로 행사되는 폭력이 있다. 한밤중 주사꾼들의 화끈한 쌈박질과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나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짐짓 점잖은 경제 전쟁을 떠올려보라.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은 나쁜 것인가. 폭력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과연 정당한가.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폭력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이다. 이 문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에서 다루는 폭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폭력의 민낯과는 많이 다르다. 상식 속의 폭력을 벗어난 '불온한 폭력론'쯤이나 될까. 지젝은 말한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에 파묻혀 있을 때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 무엇이 이 폭력을 초래하는지, 우리는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젊은 여교사를 성희롱하는 남학생과 학생을 성적으로 통제하려는 학교를 보자. 먼저 눈앞에 보이는 폭력인 남학생의 여교사 성희롱. 이런 사건은 성희롱 자체의 선정성에 여교사 대 남학생이라는 구도가 주는 흥미가 더해져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사건은 선정적인 성폭력 프레임에서 벗어나 교권(!)-학생권 충돌 프레임으로 전환한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 구도가 학교(교사)와 학생의 대결 구도로 그 범주가 바뀌는 것이다. 그때 이 여교사는 성폭력의 희생자로서뿐만이 아니라 무너진 교권(!결코 '교사권'이 아니다)을 대변하는 순교자가 된다.

다음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인 학교의 학생 통제와 차별. 이때의 수단은 당연히 성적이다. 학생들의 성적은 어느 한두 가지 요인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교육 내적으로 학습자 자신, 학습 방법, 학습 태도, 활용하는 교재, 학교, 교사 등이 관여하고, 교육 외적으로 부모의 학력이나 경제적 수준, 지역의 사회 ․ 문화적 특성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교육 외적 요인, 특히 부모의 학력이나 가정의 경제적 배경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일단 학교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한다. 학교가 보는 것은 그 배경이나 요인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성적일 뿐이다. 그래서 일정한 테두리 안에 드는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그 경계 안에 들지 못한 학생들은 대놓고 무시한다. 아이들은 달걀이 무정란과 유정란으로 나뉘는 것처럼 선별된다. 그리하여 각각 '무정란'과 '유정란'에 속하는 아이들은 많은 교육 활동에서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수준별'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 채 말이다.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 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점이다. 다른 형식의 폭력적 학대에 대해서는 그토록 예민한 서양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무감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시에 동원해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 (284쪽)

우리는 이 나라의 보수가 학생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쯤으로 바라보는 것을 잘 안다. 이 나라의 많은 보수 언론이, 젊은 여교사 대 남학생의 구도를 성폭력 프레임에서 교권-학생권 충돌 프레임으로 즐겨 전환하는 이유다. 전자에서는 남성이 가해자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학생이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학교의 학생 통제라는 '사디즘적' 취향을 즐기는 그들에게는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학생의 교사 폭력을 최대한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다.

대신 그들은 위의 인용문이 말하고 있는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 이를테면 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고 차별하는 배제의 폭력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가령 그것은 이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효율적인 학생 통제 전략에 100%, 아니 200%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우열반'인 것을 '수준별'로 바꾸어 부르는 저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수준별'의 '수준'이 주는 미묘한 아우라에 휩쓸린 채 '우열반'에 깔렸던 배제와 편견과 차별의 폭력에 갈수록 무감각해진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젝은 (눈에 보이는) 주체적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교훈을 준다고 말한다. 그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 있다.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다. (293쪽)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사의 폭력을 떠올려 본다. 체벌하는 교사? 이는 지나치게 진부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잘못하면 강압적인 학생 통제를 자신의 교육 철학으로 신봉하는 보수주의자에게 찍힐 수도 있을 테니까.

침묵하는 교사는 어떤가. 분명 특정한 어떤 상황에서의 침묵은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시, 방기(放棄) 등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이 교사 앞에서 교장의 비합리성을 말할 때, 교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런 경우는 의외로 아주 많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내뱉는 '멋진' 장광설은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것이 교사 자신의 확고한 교육적 신념으로 무장된 것이라면, 학생들에게 폭력으로 다가갈 소지가 크다. 대화와 소통이 없는 상황에서의 일방적인 장광설은 의미 없는 말의 배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학생들에게 정서적 ․ 정신적 폭력의 상처를 주기가 쉽다.

자, 여기까지는 위 인용문의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다"라는 구절에 대한 1차적인 독해다. 내 주관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전혀 예상치 못한 2차적인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지젝은 '공손한 미소'의 힘, 곧 폭력이 아니면서 폭력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어떤 알 수 없는 힘을 이야기한다. 가령 국민들이 투표 자체를 전면적으로 완벽하게 포기함으로써(기권함으로써) 정부를 해산해버리려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거칠게 비유하자면, 사회적 '무'(아무런 변화 없이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 체계의 항상성)는 '어떤 것'(변화)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든다. 즉 체계의 항상성을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체계 내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첫 번째 제스처는 활동을 철회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유권자들의 기권은 정치 안에서의 거부, 곧 불신임 투표보다 한걸음 더 나간다. 그것은 결정의 프레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96쪽)

물론 이를 실제 현실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라. 만약 앞으로 5년 동안 반 박근혜, 반 새누리당 정서를 가진 모든 진보적 언론이 공식적으로 그들에 대해 그 어떤 비판이나 조소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어떻게 될까. 철저한 '개무시' 작전과 같이 정말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응원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더 좋다.

5년 후? 그 5년 후를 곰곰이 상상하던 나는 '공손한 미소'의 위력적인 힘이 서늘하게 등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젝이 이 책에서 제안한 '폭력론'이 불온한 까닭이다. 그 위력적인 힘으로 체제 전환은 물론이고 혁명적인 체제 전복조차도 더이상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건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어떤 폭력적인 결과(기존 체제나 조직을 변화시키거나 파괴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는 일과 같은 것)를 얻고 싶다면, 지젝이 이 책에서 제안한 '불온한 폭력론'을 반드시 만나 보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곱씹으면서. 다만 이 '불온한 폭력론'은 당신 개인에게는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 그 철저한 파괴의 밑바닥에서 전혀 새로운 자신을 끌어올릴 용기가 있다면 몰라도.

덧붙이는 글 |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은이) | 이현우 | 정일권 | 김희진 (옮긴이) | 난장이 | 2011-01-10 | 원제 Violence: Six Sideways Reflections (2008년)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2011)


태그:#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 #'불온한 폭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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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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