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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카페에 올린 요리사진을 보고서 우리 집으로 밥 먹으러 오겠다는 이웃동네 홍씨 아저씨. (관련 기사 : 설날 아침, 외딴 시골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아마 심혈을 기울여 새로 설치한 송이표고 시설을 돌보느라 이번 설에 가족이 있는 집에도 못 가셨던가 모양입니다. 해 뜨기 전,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버섯 시설을 한 바퀴 둘러보고 귀농카페에 들러 '출첵(출석체크)'은 물론, 새로 올라온 게시물에 일일이 댓글다는 일까지 마친 아저씨가 제 휴대폰으로 '아침 먹으러 몇 시에 가느냐'고 문자를 보내온 시각은 일곱시가 막 지난 때였습니다.

'식사하러 오시라고만 했지, 아침을 드시러 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메시지를 보내시다니.'

막상 아저씨가 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아침을 드시러 진짜로 오시겠다는 메시지를 받고보니 슬쩍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명절이라고 특별한 음식 하나 마련해 놓지 않은 게 더 걸렸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떡국 재료라도 장만해 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마저 들었습니다. 신 김치와 장아찌, 된장국… 집에는 늘상 먹던 평범한 반찬들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짧은 궁리 끝에 지난 11월 집들이 할 때 협의회 회장 성근씨가 갖다줘서 조금씩 아껴 먹던 유기농 감자로 전이라도 얼른 조금 부쳐 고소한 기름 냄새라도 풍기고, 어제 저녁 카페에 올렸던 문제(?)의 그 묵은지찜과 곁들여 상을 봐야겠다, 생각하고는 딴에는 준비할 시간을 벌어보겠다고 넉넉잡아 '아홉시 쯤 오시라'고 답을 해 드렸지요.

그랬더니 아저씨로부터 바로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습니다.

"좀 땡기믄 안 되남?"

그도 그럴 것이 새벽 서너시부터 일어나서 하우스시설도 돌아보고 농장 여기저기도 살피고 난 농사꾼 아저씨에게 9시 아침식사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전이라도 부쳐 볼 생각일랑 아예 접고 아저씨의 뜻을 받아들여 여덟시까지 오시라 하고는 고백하듯 '진짜루 묵은지 밖에 없어요'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다시 '괜찮여' 하고 짧은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새해 첫날 우리 집을 찾아준 홍씨 아저씨

개문만복래. 새해 복을 전해주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는 첫 방문객을 맞기 위해 겨우내 닫아 놓았던 대문도 활짝 열어놓고, 방안이 따뜻하라고 잘 안 쓰는 히터도 틀어놓았다.
 개문만복래. 새해 복을 전해주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는 첫 방문객을 맞기 위해 겨우내 닫아 놓았던 대문도 활짝 열어놓고, 방안이 따뜻하라고 잘 안 쓰는 히터도 틀어놓았다.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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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같으면 아침을 대신해 보이차를 달여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전 11시나 돼서 점심 겸 간단하게 한 술 뜨곤 하는 게 일상이라서 8시에 아침상을, 그것도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상을 차릴려니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차린 건 없지만 새해 첫날 우리 집에 찾아주시는 귀한 손님을 잘 맞이해야 겠다는 생각에 얼른 신을 신고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 대문부터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겨우 내 닫혀있던 대문입니다. '개문만복래'라는 말의 뜻이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활짝 열린 이 대문 안으로 홍씨 아저씨가 큰 복을 안고 올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습니다.

'산장의 여인' 가사처럼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외딴 시골에서 조금은 궁상맞을지도 모를 뻔한 설날 아침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홍씨 아저씨가 산 넘고 고개 넘어 트럭타고 달려오신다는데, 그게 바로 복이고 말고요.

난방을 안 한 부엌방이 추울까봐 전기요금 걱정에 평소엔 잘 안 쓰는 전기히터도 틀어놓고는 부지런히 상을 차렸습니다. 요리를 할 때나, 상을 차릴 때마다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샘솟곤 합니다. 콧노래를 불러가며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밥상을 차리긴 했지만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엊그제 마지막 남은 달걀을 먹어치운 게 후회스럽기 조차 했지요.

'이럴 때 유정란이라도 몇 알 있었으면 액젓 넣고 계란찜이라도 한 뚝배기 하는 건데…'

약속한 시간보다 딱 6분 늦게 오신 홍씨 아저씨. 버섯 하우스 배지에 처음으로 달린 송이표고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내곤 '안주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자랑하며 그 버섯을 설 선물로 따서 갖다줄 테니 동상 '안주'나 하라던 아저씨는 빈손으로 오셨어요. 급하게 농장 둘러보고 시간 맞춰 오느라 버섯 따오는 걸 깜빡 하셨다나요?

소박하기 그지 없는 시골밥상. 묵은지찜, 장아찌, 나박김치, 부침개, 깻잎김치 등 시골에서 평소 먹던 그대로 차린 아침밥상.
 소박하기 그지 없는 시골밥상. 묵은지찜, 장아찌, 나박김치, 부침개, 깻잎김치 등 시골에서 평소 먹던 그대로 차린 아침밥상.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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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먹던 상차림과 다를 것 없는 소박한 아침 상을 사이에 놓고 홍씨 아저씨와 마주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아저씨는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식사'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장난스런 말로 '폭풍흡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만, 아저씨가 딱 그랬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요즘 생활 이야기를 해가며 정신없이 밥을 드시는 모습이 영낙없이 그랬습니다.

밥 먹는 모양따라 복이 들어오고 나간다는 옛날 어른들 말씀이 틀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저렇게 맛있게, 복스럽게 밥을 드시는 걸로 나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세배를 대신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 복스럽게 드셨습니다.

"아이구우, 말 말어… 겨우내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 나와 밥도 못 해먹고 살았구먼. 마을에 강선암 아니었으믄 난 굶어 죽을 뻔했어. 강선암 보살님 작은 아들이 나하구 동갑이랴. 그래 보살님이 나보구 아들 같다구 막 밥도 주고 그리야. 인자 보살님 어디 가구 없으면 혼자서두 막 차려먹구 그랴."

"저런, 겨울에 많이 불편하셨겠네요. 이제 곧 봄이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나저나 아저씨 밥 드시는 거 보니까 복이 절로 따라와 붙겠어요. 어쩜 그렇게 복스럽게 잘 드세요? 아무튼 별 찬도 없는 밥을 맛있게 드셔주시니 저두 기분이 좋으네요." 

"이 상에 있는 그릇들 내 다 싹 비워놀뀨. 난 어디 가서 밥 먹으면 늘 그런다니께… 설거지 하기 쉬우라고 말여. 허허허…"

시장하기도 시장했을 아저씬 처음 떠 드린 밥 한 그릇을 다 드시고 밥통에 남은 밥을 마저 권해 드리자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에이, 그려 밥통도 싹 비우지 뭐' 하며 남은 밥과 반찬을 약속대로 깨끗히 비워내셨습니다. 덕분에 저도 덩달아 밥맛이 좋아져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게 되었습니다.

식사가 끝날 즈음 한 동네 사는 귀농선배 재동씨가 자기가 농사지은 유기농 검정콩으로 키운 거라며 콩나물을 한 봉지 담아 가지고 마실을 왔습니다. 설에 대구 집에 안 가고 그냥 산서 집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은 홍씨 아저씨가 오시기로 하자, 재동씨도 와서 함께 아침을 먹자고 권한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 이르기도 하고 아침은 좀 부담스럽다며 사양을 하더니, 홍씨 아저씨도 오신다 하니 그래도 조금은 궁금했는가 봅니다.

"이 상에 있는 그릇들 내 다 싹 비워놀뀨"

열변을 토하는 홍씨 아저씨. 식사를 마친 아저씨가 친환경농업과 미생물농법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열변을 토하는 홍씨 아저씨. 식사를 마친 아저씨가 친환경농업과 미생물농법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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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홍씨 아저씨와 재동씨는 서로의 입담을 겨루듯, 친환경 농사에 관한 자기들의소신과 농사 스타일에 대해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둘 다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농부이면서 같은 친환경영농조합의 조합원인데도 약간씩은 농사짓는 방식이 다른 듯했습니다. 강남스타일 강북스타일 다르다더니 번암스타일과 산서스타일의 차이라고 해야 하는지…

홍씨 아저씨는 귀농해 7년 동안이나 밭에 농사지을 때 멀칭(비닐덮음)도 안 하고 풀약(제초제)도 안 했다고 해요. 풀과 작물이 같이 자라도록 놔둔다는 거죠. 사실 이런 농법을 두고 자연농이니, 태평농이니, 부르기 좋고 하기 좋은 말로 하고는 있지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겁니다. 남다른 수고와 노력 끝에 아저씨네 농토는 완전히 유기농 농사가 가능한 토양으로 전환돼 아주 건강하고 맛있는 작물재배가 이루어진다고 하는군요.  

각종비료와 농약으로 말도 못하게 우리 땅이 망가지고 밭의 흙이 심각하게 산성화되어 병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제 별로 없을 거예요. 우리가 시장에서 쉽게 접하는 모양과 때깔이 좋은 농산물들은 거의 다 비료와 농약으로 빚어낸 산물이라 보면 틀리지 않지요. 대부분 별 생각없이 사서 먹곤 하겠지만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몸의 건강에 서서히 균열이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래도 홍씨 아저씨와 재동씨같이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이 존재하고 또 그 숫자가 조금씩이나마 점점 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지요. 특히 손재주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홍씨 아저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에 '태자삼 친환경 미생물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이고 농약과 비료를 대체할 수 있는 유용미생물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고 해요.

아저씨 말에 의하면 바실러스균이나 효모균 등 자연 미생물을 배양해 천연비료나 자연농약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니, 그런 연구가 더 활성화 되고 많이 퍼져서 제발 덕분에 우리네 먹을거리와 밥상만이라도 부디 안전하게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행님, 아침은 여기서 해결하셨으니 점심은 우리 동네 교회가서 해결하입시더. 우리 교회에서 오늘 점심에 떡만두국 준다 했다 아인교."

아저씨와 입씨름을 벌이던 재동씨가 이내 시들해졌는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회유하듯 권했습니다.

"싫어어, 난 교회 안 가. 내 점심밥 걱정은 아우가 안 해도 디야. 불교계(강선암)에서 공양하면 되니깐 기독교(교회)에서는 걱정을 놓드라고."

"와, 맨날 강선암에만 신셀 집니꺼, 이참에 교회도 나가구로 오늘 점심은 우리 교회가서 떡만두국이나 먹자 하이께네."

"아, 난 교회 안 간다니께에."

친환경농사에 관한 방식의 차이로 인한 설전에 이어 이제는 종교 분쟁까지 일어날 판인가보다, 하는데 다행히 홍씨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작은 기계 부품을 하나 꺼내더니, 빨리 가서 하우스 안 설비 기계에 자동 작동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서셨습니다.

밥은 물론 대부분의 반찬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마치 '빈그릇운동'을 철저히 실천하는 환경운동가의 그것인 양...
▲ 다 먹고 난 밥상 밥은 물론 대부분의 반찬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마치 '빈그릇운동'을 철저히 실천하는 환경운동가의 그것인 양...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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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씨는 '커피 있느냐'고 묻길래 커핀 없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도 집에 가서 커피나 타 마셔야 겠다며 따라 일어섰습니다. 집에 간다고 신을 신고 마당에 나선 두 농부는 조금 전 방 안에서 설전을 벌일 때와는 달리 다정한 형제지간처럼 나란히 서서 담배를 한 대씩 사이좋게 나눠 피우더군요.

"동상 밥 잘 먹고 가네. 인자 담주 쯤에 농장에 안주(버섯)가 제법 나올 테니 그때 와서 막걸리 한잔 같이 햐."  

"고생해서 키운 자식 같은 농작물을 자꾸만 안주라고 하시면 어쩐대유? 버섯일랑 돈받고 팔 궁리나 하셔야죠."

가볍게 야단치듯 한 마디 해드리고는 두 사람을 배웅하려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자기 농장의 온갖 시설이며 기계설비를 혼자 다 하신다는 재주 좋은 홍씨 아저씨를 다시 불러 세웠습니다. 며칠 전부터 보일러 실에서 안 들리던 이상한 소리가 들려 봐달래기 위해서 였습니다. 보일러실 문을 열고 잠깐 살펴본 홍씨 아저씨가 '에아가 찼다'며 작은 밸브를 틀어놓으니 녹물 또는 흙탕물같은 뻘건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에어를 다 빼고 보일러 관리하는 법도 알려주시곤 서둘러 트럭을 타고 다시 농장을 향해 떠나셨습니다.

방안에 들어와 보니 그야말로 싹쓸이 하듯 비워놓은 밥상이 눈에 들어오며 웃음이 났습니다. 진짜로 설거지 하기 쉽겠더란 말씀이지요. 하지만 비운 밥 그릇마다 복이 가득가득 채워져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전남에 거주하는 남정네 입니다.^^ 제가 읽어왔던 수 많은 글 중에 가장 따뜻한 글을 읽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왠지 모를 희망이 샘 솟고 마음의 힐링을 받은 느낌이랍니다. 이런 좋은 글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

어제 <오마이뉴스>에 설날 아침 외딴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희한한 일을 써 올리고 난 뒤, 기사를 읽은 어느 모르는 분으로부터 받은 쪽지입니다. 이 짧은 메시지가 또한 저에게도 희망을 전파해 줍니다. 이분의 덕담처럼 올 한 해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이 생길 것만 같습니다. 따뜻한 밥 한그릇과 함께 진솔한 한 편의 글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소통으로 다리를 놓아주기도 하며, 그것이 또한 우리 사는 세상의 커다란 희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태그:#시골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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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서 우리 시대의 삶에 공감하며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문화, 예술 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고 미디어 컨텐츠의 창작에도 많은 관심 가지고 있다. 몇 군데 사회단체에서 우리 사는 세상이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되게 하는 일에 조금씩 힘을 보태며 어울리며 나누며 살려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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