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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대피소
 장터목대피소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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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었다. 지금 그 자리에서 더 걷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이 지치면 더불어 몸도 지쳐 걸음도 더뎌지는 법. 사위는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빗줄기는 굵어졌고, 바람 역시 세차게 불었다.

이따금 길 위에서 쉬었다. 쉬는 간격이 짧아진다. 쉴 때마다 한형이 오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숲 어디선가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두어 명의 남자가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아니 어쩌면 서너 명이 넘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 밤을 세석에서 묵을 작정인가 보다.

산길 3.4km는 길고 멀었다. 걷고 또 걸어도 걸어야 할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제자리 뜀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빗줄기는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길은 결코 걷기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비를 흠뻑 맞으면서 걷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말을 이런 때 하는 건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던 길이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조금씩 줄었다. 장터목대피소가 400미터 남았을 때, 길 반대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브, 올리브."

남편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닉네임인 올리브로 불렀다.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 때문에 화개재에서 만난 한형이 "두 사람은 대체 어떤 관계지?" 하는 생각을 했더란다. 아내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남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나는 남편을 닉네임으로 부르지 않는다.

일찌감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한 남편은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면서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단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만났던 다섯 남자들 역시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해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도 장터목대피소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했다.

그들은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인 뒤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남편에게 자꾸 물었더란다. 왜 안 먹느냐고. 술을 권해도 거절하면서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나. 나중에 그들이 해준 얘기다. 나 역시 장터목대피소에 일찍 도착한 남편이 저녁식사 준비를 다하고 나를 기다릴 것으로 예상했다. 어쩌면 마중을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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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대피소 취사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스무 명 남짓 되려나. 취사장 안에서 비옷을 벗고, 저녁식사를 할 준비를 했다. 한형을 기다려야 하나? 그가 어쩌면 세석대피소에 눌러 앉았을지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걸음이 늦으니, 시간이 더 걸릴 것이고 게다가 그에게는 꼭 장터목대피소까지 와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일행 없이 홀로 왔으니.

연하천에서 만난 다섯 남자 가운데 가장 젊은 친구가 훈제오리고기를 나눠준다. 부추까지 잔뜩. 코펠에 오리고기를 넣고 데운 다음에 부추를 넣어서 같이 볶아서 먹으면 맛있단다. 남편은 내가 오기 전에 다른 이들이 돼지불고기를 줬다면서 보여준다. 난생 처음 보는 이들이 단지 지리산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를 잊게 해줬다. 그렇더라도 푹 젖은 몸을 말려주지는 못했다. 비옷을 벗고 나니 한기가 온몸에 달려든다. 춥다. 얼른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싶지만, 밥을 먹고 난 뒤에 숙소로 가서 갈아입고 자는 게 낫다.

남편과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한형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어서. 부추와 함께 볶은 오리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1/3쯤은 남겼다. 한형이 오면 주려고. 밥을 두어 숟갈쯤 먹었으려나. 취사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때 남편과 내가 거의 동시에 한형을 쳐다보았다나. 나중에 한형이 해준 얘기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기쁨과 안도가 동시에 서린 표정으로 한형이 취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두 손에 스틱을 잡은 채였고, 머리와 얼굴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작 어제 만났을 뿐인데, 무사히 도착한 그가 어찌나 반갑던지. 세석에서 주저앉지 않고 끝내 왔구나, 대단하다. 이런 생각도 더불어 했다.

"두 분 아니었으면 세석에서 주저앉았을 겁니다."

그는 나중에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산에서 처음 만났을 뿐이데, 산은 낯선 이를 아주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다.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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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어울려 식사를 하고, 나는 숙소로 들어갔다. 아래층은 남자, 위층은 여자들에게 배정이 되어 있었다. 이날 장터목대피소에서 잔 여자는 나 말고 딱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아마도 이날 이곳에서 잔 사람들은 아무리 많아도 서른 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이날도 나는 남편과 나란히 누워서 '남녀혼숙'을 했다. 2층에서 같이 숙박한 여자분이 괜찮다고 양해를 해줬기 때문이다.

젖은 비옷과 옷은 옷걸이에 걸어 말렸다. 여행을 할 때 세탁소에서 주는 철사 옷걸이를 가져가면 유용하다. 이번 지리산 종주에 5개를 챙겨갔는데 더 챙길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세탁소 철사옷걸이는 무게가 나가지 않아 여행용으로 휴대하기 아주 좋다.

연하천대피소는 밤이 이슥해지자 추워져 덜덜 떨면서 잤지만, 장터목대피소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실내가 더웠다. 그래서인가 누군가 방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남편은 자는 동안 내내 "덥다, 더워" 하는 말을 반복했다.

다음 날인 9일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에서 해가 뜨는 시간은 5시 20분이라고 했다. 비가 내리기 때문에 일출을 볼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것이 장터목대피소 직원의 말이었다. 비 때문에 길이 미끄럽고 위험하다는 말을 그는 덧붙였다.

에라이, 일출도 못 보고 비도 온다는데 천왕봉에는 가지 말자.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 무릎이 아팠다.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 무릎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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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천왕봉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지난 2008년, 천왕봉에서 일출을 봤다. 우리 집은 삼대가 덕을 쌓았나? 이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천왕봉 일출을 본 이들은 많다. 한형 역시 천왕봉에 3번 올랐는데 2번 일출을 봤단다. 그의 집안 역시 삼대가 덕을 쌓았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덕을 쌓으면서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 천왕봉에 가는 이들 대부분이 일출을 보는 게 아닐지.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9일 오전, 남편과 나는 연하천으로 돌아가는 대신 백무동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걷는 게 힘들고 지쳐서 무리하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백무동을 택한 건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보다 길이 덜 가파르고 힘이 덜 든다는 이유에서. 거리는 500미터쯤 백무동 길이 중산리 하산길보다 길다. 중산리로 두 번이나 내려가 봤으니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이고.

한형은 백무동으로 내려갈 예정이었기에 우리는 계속 같이 가기로 했다. 그리고 연하천에서 만난 다섯 남자들 역시 백무동으로 내려간단다. 노고단에서 장터목까지 하루에 다 달린 이들은 결국 탈이 나고야 말았다. 어제, 너무 빨리 걸은 탓에 두 사람이 급체를 해 고생을 했고, 다른 이들 역시 무릎에 무리가 갔더란다.

가장 젊은 신형만이 천왕봉까지 올라갔다 왔고, 나머지 4명은 죄다 "천왕봉은 패쑤~~"를 외쳤다나. 백무동으로 내려오면서 다들 다리가 아프다면서 힘들어 했다. 너무 무리를 하면 탈이 난다. 탈이 안 난 나도 내려가는 길은 힘이 들더라만.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길, 날씨가 개기 시작했다. 비는 출발하기 전에 그쳤다. 바야흐로 남부지방에 폭염이 시작될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산속은 시원했다.

걸으면서 흘리는 땀은 상쾌하다. 하지만 온몸은 땀으로 쩔어 있었다. 걸으면서 흠씬 비를 맞았고, 땀을 흠뻑 흘렸지만 샤워는커녕 마른 칫솔질만 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으니, 당연하다. 특히 장터목은 물을 뜨러 가는데도 무척이나 멀다. 나는 아예 가지 않았으니 세수조차 못한 상태였다. 에구, 더러워라.

일요일 밤과 월요일 밤, 종일 빡세게 걸은 탓에 자면서 "아이고 다리 아파"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잤으니, 취수장까지 걸어갈 기운이 남았겠는가 말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머리를 여행모드로 짧게 자른 것이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머리를 물에 적신 뒤 그냥 훌훌 털어낼 수 있었던 건 머리가 짧은 덕분이었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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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샘을 만났고, 거기서 얼굴을 씻고 머리를 헹궜다. 그러고 나니 사람 꼴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얼굴이 반짝거리면서 땟물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건 남편이나 한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산하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돌계단은 무릎관절을 압박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백무동까지 거리는 5.8km로 소요예상시간은 3시간. 하지만 4시간쯤 걸려서 내려온 것 같다. 바쁠 게 없으니 쉬엄쉬엄 내려왔다. 백무동에서는 동서울까지 직접 가는 고속버스가 있다. 서울로 가는 교통이 편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성삼재에 차를 두고 왔으니 다시 성삼재로 가야한다. 백무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연하천에서 만난 다섯 남자와 남편과 나 그리고 한형이 한 자리에 어우러져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유쾌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길 위에서 만나고 길 위에서 헤어진다. 아무리 아쉬워도 이별은 피할 수 없는 법. 만나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납시다.

백무동에서 성삼재까지는 택시로 4만 원. 한형은 우리와 함께 성삼재로 갔다가 구례로 갔다. 구례공용버스터미널에서 한형은 서울행 버스를 탔고, 우리는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구례둘레길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방장산자연휴양림으로 갔다.

남부지방은 폭염에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다는 일기예보가 쏟아지던 날, 우리는 방장산자연휴양림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다가 너무 추워서 문을 닫고 자야만 했다. 역시 산은, 숲은 시원하다.


태그:#지리산, #도보여행, #천왕봉, #장터목, #백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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