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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 낙지의 섬 옥도라는 표지석이 있다.
▲ 옥도 마을 표지석 선착장에 낙지의 섬 옥도라는 표지석이 있다.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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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4.76㎢, 해안선 길이 16㎞, 산높이 107m의 옥도.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 섬의 산 능선의 모양새가 '옥玉'자처럼 생겨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원래 조선시대 '구슬도球瑟島'였던 명칭이 언젠가부터 '옥도'로 변했다.

옥도는 목포와의 항로 거리는 40km, 신안군 하의도 북동쪽 6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섬이다. 목포에서 하의도행 조양페리호가 오전 6시 50분, 오후 1시 반, 하루에 두 번 들르는 경유지인데, 2시간 정도 가면 자그마한 섬 옥도에 도착한다.

옥도는 인구가 63가구 166명 남짓인데, 구멍가게도 민박도 없는 섬이다. 1973년도까지 90가구, 470명이 거주하였고 분교생도 142명에 이르렀으나, 대폭 줄어든 것이다. 옥도는 행정구역으로는 하의면에 속하지만, 하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목포가 생활권이며 행정상 안좌면에 소속됐으면 좋을 뻔하였다. 공공기관으로는 내연발전소와 옥도파출소, 옥도보건진료소가 있다. 창원 황씨가 처음으로 섬에 들어왔다고 전하나 그 후손들은 없으며 현재 송씨가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해남 윤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동이 틀 무렵 마을 앞 선착장 물이 들면 완전히 잠긴다.
▲ 옥도 마을에 선착장 동이 틀 무렵 마을 앞 선착장 물이 들면 완전히 잠긴다.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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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통팔달의 요새

옥도는 매우 작은 섬이지만 위치상 신안군 중심에 있으며 해상교통의 물류 중심지이다. 자은도, 안좌도, 장산도, 신의도, 하의도, 도초도, 비금도 등 어느 방향으로도  진출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어 요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옥도는 목포가 개항된 1897년 이전 1894년 청일전쟁 시기부터 일본이 강제로 점령하여 이미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해군의 요충지로 활용된 곳이다. 때문에 당시 서남권의 중심도시였던 목포보다 먼저 일본 해군기지가 설치되었다. 국내 최초로 무선전신 시설이 생겼고, 근대적인 기상관측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1904년 3월,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이곳에 3명의 기상요원을 배치해 매일 오전과 오후로 나눠 3회씩 모두 6차례 풍향과 풍속, 기압 등을 측정했다. 이 옥도 관측소는 개설된 지 2년 만에 목포 대의동에 이어 유달산을 거쳐 지난 1997년에 현재 위치한 연산동으로 옮겨졌다. 옥도 관측소 자리에는 지금도 우물통과 콘크리트 바닥, 말뚝 등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옥도는 조선시대부터 목포진의 8군데 요망대(要望臺) 중의 하나였다. 언제부터 '팔구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기록상 구한말 혹은 일제강점기부터인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옥도에 정박한 함정이 한꺼번에 8개 방향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 하여 팔구포라고도 불렀는데, 지금도 당시 우물로 사용했던 팔구포 해군정이 남아 있다.

물이 빠지는 아침에 길게 뻩은 선착장에서 모습
▲ 선착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옥도 마을 물이 빠지는 아침에 길게 뻩은 선착장에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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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가 많은 섬

옥도는 근대역사의 한 장소이다. 이곳 섬주민들이 좋건 싫건 섬주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 해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생활에 여러 영향을 받았다. 갑진년 러일 전쟁 당시 옥도에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일본인과 접촉을 많이 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이곳 주민들은 일찍이 일본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비록 작은 섬이지만 해군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증기 여객선이 기착하였다고 한다. 제일교포 중에 12살에 한학을 하고 주역을 뗀 송귀옥 어른은 갑자년생으로 오사카로 건너가 무역을 하였고 이 분 덕분에 옥도 사람들이 일본에 많이들 건너가서 돈을 벌었다. 당시 500여 명의 주민 중에 200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들 중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가 재일교포로 남아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 고향인 옥도를 지원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옥도 사람들은 다른 섬들보다 잘 살았으며 이들이 보내준 기부금으로 1929년 신명학원을 세워 옥도뿐만 아니라 주위의 섬들의 아이들까지 와서 공부를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목포로 진학하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열어준 고마운 섬마을 학교였다. 이 학원은 1952년 옥도 초등학교가 세워질 때까지 섬지역의 교육기관 역할을 했다. 지금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 사라졌지만 옥도의 영화는 이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봄부터 바닷물을 끌여들여 미리 김포자를 붙게 하여 가을에 김발에 붙인다.
▲ 김을 굴껍질에 입식하는 모습 봄부터 바닷물을 끌여들여 미리 김포자를 붙게 하여 가을에 김발에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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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도는 섬 전체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다. 섬 중앙부에 깊은 만이 이루어져 있으며, 남·서쪽 해안은 간척을 위해 제방을 쌓아 경지를 늘렸고 염전이 조성되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해당하는 언덕에 예쁘게 지어진 보건진료소와 교회가 먼저 우리를 맞았다. 보건진료소와 교회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데, 두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하얀 집 진료소 주변에 만개한 꽃들로 가득 채워져 아름답고 평안한 느낌을 주었다. 보건진료소에 딸린 소공원을 기점으로 하면 길이 갈리는데, 동쪽으로 내려가면 마을이 나타나고 서쪽으로 가면 또 다른 작은 마을로 이어진다.

골목길 따라 이어진 마을이 '벌금마을'이다. 그런데 마을 첫 집부터 폐가다. 창문과 출입문 등이 다 떨어져나가 동네에 들어서기 전부터 을씨년스럽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가스통 여러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섬인 탓에 한꺼번에 사놓고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서쪽 방향에 집이 몇 채 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앞에도 온통 논이다. 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논인데, 집 앞으로 큰 도로가 나 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마을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갯벌과 또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이다.

동쪽으로 얼마를 가면 길은 다시 갈라진다. 방조제에 이르는데, 남쪽으로 이어진 길은 논으로 가는 길이고 북쪽으로 가는 길은 마을로 가는 길이다. 마을로 가는 길에 학교가 보인다. 그 중간해안에 작은 방파제가 있다. 선외기 승하선용이다. 학교는 '하의초등학교 옥도분교장'인데, 물론 지금은 폐교상태이다. 1952년에 문을 연 옥도분교는 1회부터 38회까지 총 477명을 배출하였다. 마지막 졸업식은 1998년 2월이며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옥도분교 폐교 당시 졸업생은 송상언 학생 하나였다. 운동장은 마을에서 사용하고 있어, 다듬어진 외양을 하고 있었다. 향나무에 둘러싸인 교사는 내부도 깨끗했다. 게시판과 칠판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칠판은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와서 글을 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교실바닥도 그렇고 창문 등도 깨끗하다.

여느 섬들처럼 어수선하게 각종 어구들로 늘어놓은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학교 앞에는 새로 마을이 들어서고 그 앞으로 길게 이어진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 좌우로는 갯벌이다. 갯벌과 방파제 높이는 한 자 정도 차이가 있다. 갯벌 사이에 물이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있고 그 물줄기 사이로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갯벌 위에 빠져 있는 조그마한 선외기들이 있다. 방파제 중간지점에 반원형의 공간을 만들어두었다. 차가 드나들 때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주위에 장대들이 꽂혀 있다. 전에는 광대한 갯벌에서 김 양식을 많이 했지만 워낙 교통이 불편하고 물사정이 나빠서, 무엇보다 김값의 하락으로 이제는 몇 집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물이 빠진 갯벌 바다 위로 해가 지고 있다.
▲ 선착장에서 노을이 지는 장관 물이 빠진 갯벌 바다 위로 해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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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마을에서 옥도마을로 들어가니 큰 도로가 나온다. 사방팔방이 길이다. 해안으로 가는 길과 선착장으로 가는 길 등이 갈린다. 그 중심에 노인정이 있다. 어딜 가나 노인정 또는 마을회관이 가장 번듯하고 깨끗해서 좋다. 붉은 벽돌로 지은 깨끗한 건물이 이곳 옥도 노인정이다. 노인정 앞으로는 오르막길이다. 이곳에는 경운기뿐만 아니라 1톤 트럭이 제법 많다. 집집마다 돌담으로 경계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기도 하다. 선착장 가는 길에 오른쪽에 아주 깨끗한 비가 두 기나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같은 송씨의 비로 불망비다. 온통 한문으로 된 비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2008년 3월 같은 날짜에 세워진 비석이다. 자수성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선착장 부근에 이르면 옆에 공원을 조성하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선착장에 마을 표지석이 있다. '맑은 샘물과 갯벌낙지의 섬 옥도'라고 표기되어 있고 표지석 아래 기단에는 옥도에 대한 지명유래가 적혀 있다. 

옥도에서 가장 낙지를 잘 잡는 어르신 모습
▲ 낙지 도사 송영기 (73세) 모습 옥도에서 가장 낙지를 잘 잡는 어르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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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도 주변 갯벌에서는 낙지가 많이 생산되고, 또 그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옥도를 방문한 날 저녁에 낙지도사 송영기(73) 어른을 만났다. 낙지는 주로 1년 생인데 해남이나 완도 등지는 주로 여자들이 잡지만 여기는 남자들이 잡는다고 하였다. 올해는 낙지 흉년인데 그 원인을 오염으로 갯벌들이 죽어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한 달에 15일 정도 잡는데 조금때가 좋다고 한다. 오전 6시 경에 나가면 오후 4시 정도까지 10시간 정도 작업을 하였다.

겨울에는 추워서 낙지가 갯벌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1m 정도 판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멀리 바다 쪽에부터 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일하기가 좋은데  옥도 앞바다 갯벌은 반도처럼 생겨서 물이 사방에서 일시에 들어오는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아침 일찍이 이 분을 따라서 갯벌의 들어가 낙지 잡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나보고 낙지도사라고 하지요." 70대인데도 '낙지도사' '낙지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낙지를 잘 잡았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고 갯벌은 물 흐름이 약해져서 천천히 솟아 오르고 있다고 하였다. 

육지에서 삽을 들고 땅을 파는 것도 힘이 드는데 질퍽한 갯벌을 파서 낙지를 잡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낙지구멍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추운 겨울에 차가운 바람과 맞서야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을 앞 갯벌에의 여러개의 작은 강들이 많은데 그 강들에는 버려진 통발들이 여기저기 상당량 널려 있었다. 물어보니 통발을 처 놓고 나중에 방치하여 바다 오염의 주범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하의도 면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갯벌의 오염을 막고 보존을 위하여 통발치우기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그 뒤 소식이 궁금하다.

버려진 통발의 널려 있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는 송영기 어르신
▲ 낙지를 잡아 바구니에 넣고 있다. 버려진 통발의 널려 있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는 송영기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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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버려진 통발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 갯골의 통발 이런 버려진 통발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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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적 개요
옥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4.76㎢, 해안선 길이 16㎞이다. 인구는 2011년 63가구 160명이다. 목포와 40km, 하의도에서 6㎞떨어져 있다.

● 지명유래
섬과 능선이 '왕王'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근 갯벌 가운데 '꾸자리'란 조그마한 섬이 '옥玉'자의 점을 이룬다 해서 '옥도'라 칭하였다고 전해온다. 해변가에 옥돌이 많이 있어 '옥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다.

● 특산물
갯벌에서 나는 낙지와 재래식 김이다.  

● 옥도 가는 길
목포에서 하의도행 조양페리호가 오전 6시 50분, 오후 1시 30분 출발 / 2시간 소요 목포행 옥도 출발 9시50분, 3시50분  문의 : 조양운수(061-244-0038)

낙지가 어느 섬보다 많고 소득이 높다.
▲ 낙지를 잡는 또 다른 주민 낙지가 어느 섬보다 많고 소득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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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를 잡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 낙지잡이 주민 낙지를 잡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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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도, #낙지, #기상관측소, #팔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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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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