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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찌는듯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길거리 나가면 뜨거운 바람이 얼굴로 스치고 그냥 조용히 걷는데도 등에서 땀이 줄줄 아래로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 보니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그날도 그렇게 뜨거운 날이었지요.

지금은 일용직이지만 고정적으로 학교에 일자리를 얻어 출근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7월 초 현대차 울산공장 하청업체에 들어가 일하다가 3년 전 공정합리화 공사 들어간다며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를 모두 정리해고했습니다. 저도 그 업체 그 공장에 소속되어서 다른 동료와 함께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처자식이 딸렸는데도 원청사인 현대차는 그런 사정에 아랑곳 않고 출입증을 달라며 사직서 쓰라고 강요했었습니다.

"내가 일자리 하나 소개해 줄 테니 다녀 볼래요?"

3년 전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저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이들고 손재주 없는 저에게 그리 쉽게 일자리가 생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안면 있던 지인으로부터 그런 제의를 받았습니다. 제가 일자리 때문에 걱정하니 자신이 아는 분에게 부탁을 해서 특별히 쓰게 된 경우 였습니다. 저는 물불 가릴때가 아니라고 판단되어 지인이 소개한 업체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 4시경 일어나 집을 나섰습니다. 지인이 소개한 곳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곳이고 건설업체였습니다. 저는 다른 공장에 다닐 때 구해놓은 안전화를 신고 갈아 입을 옷을 가방에 챙겨 넣어 버스를 탔습니다. 일터에 6시까지 가야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잽싸게 밥먹고 그곳을 찾아 간 것이었습니다.

일터 책임자로 보이는 분은 서글서글하게 맘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곳은 형제가 함께 운영하는 건설업체 였는데 공터에 건설에 쓰이는 자재가 엄청 쌓여 있었습니다. 누구 소개로 왔다고 하니까 잠시 기다리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당 6만 원이고 한 달에 한 번 월급으로 준다고 했습니다. 저야 뭐 건설현장엔 초보이니 주는대로 받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소장과 이야기 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분이 저를 대리러 왔습니다. 저는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은 한 아파트 공사현장 이었습니다.

"누가 저런 사람 데려왔어?"

저는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업체는 이곳저곳 건설현장에 자재를 빌려 주었다 다시 수거하는 그런 업체였던 것 같았습니다. 포크레인 같은 것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업체 사장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저에게 물었습니다. 뭘 할 줄 아느냐고요. 저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냥 일용잡부로 일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포크레인 운전을 하다말고 그렇게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야 그냥 말했을 테지만 듣고 있는 저는 주눅이 들어 버렸습니다. 사장으로 보이는 그분은 성미가 급한 거 같았습니다. 저에게 뭔가를 치우라 지시를 했는데 건설 용어가 일본말이 많아 저는 처음 들어본 단어라 무슨 일을 하라는 것인지 몰라서 어정쩡 서 있으니 일하는 사람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가 봅니다.

"오늘은 이와 나왔으니 저랑 같이 다니며 일합시다."

다른 일꾼이 그곳 일을 함께 거들어 주고는 다른 곳으로 트럭으로 이동했습니다. 다른 곳에는 2층과 3층으로 콘크리트 작업을 하고 받침대로 쓰던 쇠기둥을 빼서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아 보였습니다. 모르는 것을 잘 알려주고 더운데 천천히 하라고 했습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그날 콘크리트 건물안은 찜통 같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줄줄 흐르는데 무거운 쇠기둥과 나무 자재를 모으는 일을 하니 몸 전체가 뜨거워 지는 거 같았습니다.

"자, 간식 먹고 합시다."

건설 현장에 가서 일해보니 새벽같이 출근해서 그런가 오전 10시경과 오후 4시경에 참이란 이름의 간식을 먹었습니다. 물론 12시경 점심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6시까지 일을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건설현장 작업을 하니 또 무더운 날이다 보니 마칠 무렵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그 건설업체는 일당제가 아니라 월급제로 인부를 쓰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일당 그날 주려나 싶었는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가본 일터라 알아서 주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소개해준 지인에게 미안하고 그 건설업체 소장에게도 미안했습니다. 그런 곳엔 뭔가 일머리가 있고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가야 하는 곳이었나 봅니다. 건설현장에 대해 생판 모르는 저는 그날 하루 일하러 갔다가 핀잔만 들었습니다. 그렇게 핀잔을 듣고서 다음날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 건설현장이랑은 단 하루 일하고는 인연이 끝났습니다. 저는 전화 하기도 미안해서 그냥 문자로 제 계좌번호를 넣어 소장에게 보냈습니다.

"제 일당 6만 원을 아래 계좌로 넣어 주세요."

그러나 2년이 넘었지만 그 일당 6만원은 계좌로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일을 못해서 일당 주는 게 아까운가보다' 하고 마음 먹으며 6만원 일당 좀 아깝기는 하지만 그냥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후 저는 건설현장 취업하기가 겁이 났습니다.

어느날, 중학교 동기(여) 남편이 건설업을 하는데 나보고 배우면서 일하러 다녀보라 권했습니다. 제가 일자리 없이 놀고 있다니까 동기가 안스러웠던가 봅니다. 저는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건설업은 초보가 가서 일할 게 못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겐 그냥 단순노동이 제격인 거 같았습니다. 생각해서 소개했는데 거절하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 후 저는 건설현장 일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할 수 있어야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저는 손재주가 없는지 또 일머리가 없는지 눈썰미가 없는지 무슨 일 하나 터득하는데도 많은 시간과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그날 하루 건설현장에서의 경험은 제가 할수 있는 일에 대해 한가지 더 축소되는 경험만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기술을 익히십시오. 아니면 일머리 기술 또는 눈썰미 좋은 기술을 터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세상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저처럼 기술없이 눈썰미없이 일머리없이 손재주없이 살게 되면 가족 생계가 막막한 지경에 이를 것 입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덧붙이는 글 | '폭염이야기' 응모글



태그:#건설노동자, #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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