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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생활 44년을 넘기는 동안 우리는 이런 문제로 어떤 갈등이나 부조화도 있어본 적 없다.
 결혼생활 44년을 넘기는 동안 우리는 이런 문제로 어떤 갈등이나 부조화도 있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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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에는 무슨 특별한 계시라도 받는 걸까. 아버님께선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고향 다녀오시는 빈도가 부쩍 잦으셨다. 조상님들의 묘지를 돌아보시는 일에 분주했다. 고조부모님 대까지 모든 분들의 묘비를 빠짐없이 세우고 상석을 새로 놓는 등 정성을 쏟으셨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했음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이제 내가 선산에 관심을 가지는 나이가 되었다. 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일일이 찾아뵙고 경배 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파묘 화장하여 한 봉분 안에 함께 모시는 납골묘를 만들기로 했다. 5대 조부모님까지 서열에 따라 안치하다 보니 내 부모님 계시는 위치가 인사하기 좁고 그늘진 쪽이 되는 등 마음에 걸렸다. 특히 1년에 한번 정도라 하지만 장차 후손들이 이렇게 먼 데까지 와 봉분과 경내의 벌초를 제대로 할지 걱정되었다.

여러 궁리 끝에, 묘지 전체의 바닥을 대리석 돌판으로 깔고 국군묘지처럼 봉분 없이 평장을 하여 풀을 깎지 않아도 되고 친근감을 가지고 찾아오고 싶도록 공원처럼 만들기로 했다. 과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 며느리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아내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힘이 되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 사전답사 차 고향에 내려갔다가 여동생이 살고 있는 해남 땅 끝의 사구미라는 작은 마을에 잠간 들렀다. 달마산 산자락에 아늑히 자리 잡은 전형적인 포구로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숨만 쉬고 있어도 금방 생기가 돋아날 것 같은 맑은 공기, 바위 속에서 솟아나는 맛좋은 우물물, 시간이 느리게만 흐를 것 같은 고요한 정취의 편안함에 아내가 흠뻑 젖어 "우리 여기셔 삽시다" 했다. 이렇게 해서 별 복잡한 생각 없이, 우리는 내 고향 완도가 바다 건너 바라다 보이는 곳에 조그마한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마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둘만의 아담한 집

아내는 건강상태가 매우 안 좋다.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최후에 그러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무공해 채소와 좋은 공기와 물이 있는 시골로 떠나자고 말해왔지만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지난 세월 셀 수도 없이 많이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다녔지만 어느 한 곳도 '내 집'이라 생각하고 정붙여 살아본 곳이 없다. 그래서인지 더러 꿈 속에 나타나는 집은 아파트가 아니다. 언제나 할아버지가 계신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이었다.

예봉산과 검단산 그리고 한강이 어울려 한눈에 보이는 경치가 뛰어나게 좋은 덕소의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에는 시원스레 툭 터진 전망과 계절 따라 변하는 앞동산의 꽃향기 그리고 눈꽃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이제 여기가 마지막 우리 집이다"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역시나 남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냥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흙'을 생명의 근원으로 하는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 때문일까? 그러나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아들은 우리와 다르다. 강원도 현리 산골에서 근무할 당시 방학 때면 산과 시냇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느끼게 하기위해 애써 설명하며 데리고 다녔지만 소용없었다. 서울로 빨리 가겠노라 졸라댔다. '나의 살던 고향', '가고파'와 같은 정서가 희박한 것 같다. 시골에 아주 작은 집을 짓겠다고 했더니 "불편해서 사실 수 있겠습니까?"라며 근심의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해서, 아파트로만 전전하며 살아온, 긴 떠돌이 신세를 절반 정도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멀긴 하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둘만의 아담한 집을 갖게 되었다. 완전히 이사 가는 것 아니고 아내의 건강을 보아 잠깐씩 요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거기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군대개혁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우리 인생 정리해요"

 아내는 건강상태가 매우 안 좋다.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최후적으로 그러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무공해 채소와 좋은 공기와 물이 있는 시골로 떠나자고 말해왔지만 이렇게 쉽게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다.
 아내는 건강상태가 매우 안 좋다.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최후적으로 그러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무공해 채소와 좋은 공기와 물이 있는 시골로 떠나자고 말해왔지만 이렇게 쉽게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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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순전히 아내의 뜻에 따라 결행한 일이다. 기왕이면 거리도 가깝고 자신이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땅 경북 김천시 근처의 어느 곳에 터를 잡자고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엔 경상도니 전라도니 하는 지역적인 편견이 없다.

결혼생활 44년을 넘기는 동안 우리는 이런 문제로 어떤 갈등이나 부조화도 있어본 적 없다. 대통령 선거시, 아내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가신 장인어른께서 "김대중 금마 빨갱이 데이"라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시고 처가 주의 사람들 모두가 거품품고 비난할 때에도 아내는 항상 내 편이거나 중립이었다. 프로 야구 게임을 두고도 아내는 늘 열렬한 해태팬이었다.

5·18광주학살에 대해 누구보다 분개했던 그다. 정이 넘쳐흐르는 전라도의 인심을 그는 너무나 좋아한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그래라우! 잉! 원매! 겁나게 좋당 깨라우! 싸게 싸게 묵으시요 잉!--" 등 사투리를 부러 사용 천진난만하게 웃을 때가 많았다.

절망과 분노의 순간에도 언제나 나에게 차분하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준 제일의 후원자인 아내가 "나도 어찌될 줄 모르고 당신 나이도 이제 70이 훨씬 넘었으니 '군대개혁' 등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우리의 인생도 정리해야하지 않겠어요!"라고 했을 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평생 도전해온 나의 꿈이요 비전이며 존재이유이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표명렬 기자는 평화재향군인회 명예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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