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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생이 됐을 때였다. 여기저기서 '인생 시계' 이야기를 꺼내며 '너의 인생은 아직 아침 7시도 되지 않았으니 걱정 말라'고 응원의 말을 건넸다. 수험생만 세 번을 겪은 나는 격언이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7시에 일어나면 학원도 늦을 시간인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참신하기는 했다. 그 때의 우리 시대 격언은 '1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바뀐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정도가 그나마 와 닿았기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유행처럼 흘러가고, 언제부턴가 멘토 회의론이 등장했다. 젊은이들이 믿고 따르던 그 유명한 책은 사실 경제 전문가인 한국 최고 대학 교수가 쓴 책이고, 마치 솔로몬처럼 관계에 대한 해법을 내려주던 스님 또한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 엘리트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이들의 출신이 지금껏 비밀리에 유지된 것은 아니다. 한 때 '싸구려 커피'만 마실 것처럼 노래를 불렀던 가수도 실은 삶의 별 애로사항없이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살아온 '엄친아'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멘토 회의론이 나온 것은 그들의 출신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20대 초반이었던 이들이 중반을 겪으면서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어른들이 사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해 꿈과 희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게 된 것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성숙해졌다. 청춘이 겪는 한 때의 혼란이라고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본인들, 즉 기성세대가 물려 준 결과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아진 것이다. 나는 그런 어른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제목을 20대에게 보내는 '멘토사용설명서'로 정했다.

2013년 10월 15일, 노회찬 전 국회의원

노회찬 씨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BUNKER1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노회찬 강연, THE삼성 노회찬 씨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BUNKER1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원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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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만난 어른은 노회찬 전 국회의원이었다. 전에도 정치인들의 강연을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든 생각은 '저들은 자기 이야기 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책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다.

그는 2005년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비리를 밝히려다가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검사들의 명단을 언론이 아닌 인터넷에 유포했다는 혐의다. 이상한 사실은 비리를 밝히고자 노력한 그와 이상호 기자를 제외한 뇌물 검사 7명은 검찰 조사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의'를 논하며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우리나라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그룹 삼성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우리나라의 법치주의도 바로 설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자리를 채우고 있던 우리에게 어떠한 미담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 시절,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 한 마디를 남겼다. 나는 그의 말이 아닌 행보에서 우리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줘야 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2013년 10월 29일,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홍세화 씨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BUNKER1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홍세화 강연, 삼성을 살다 홍세화 씨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BUNKER1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원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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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같은 장소에서 만난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나는 그를 학창시절 읽었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처음 만났다. 프랑스에 가졌던 막연한 환상을 구체화시켜 준 최초의 책이었다. 책에서 나와 실제로 본 그는 매우 곧았다. 예순을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굳은 심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어른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나의 생각이 어떻게 '내 생각'이 됐는지 고찰하는 것이다. 부모가 심어준 생각은 아닌지, 기득권 사회가 강요한 생각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가 가진 생각들의 익숙함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는 편하게 사는 것에 경각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는 것이 나와 사회를 함께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우리 세대가 이웃의 고통에 무감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낳은 욕망과 이에 따르는 불안이 파편화 돼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나의 생각으로 나만을 지키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집요하고 겸손하게, 또한 성실하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학자로서의 면모가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설파한 것은 기성세대가 원하는 길에 맞서 자신의 길을 올곧게 가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는 그 과정에서 토론과 협상을 통해 현실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20대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두려운 세대이다. 졸업을 하는 것도 겁이 나 일부러 졸업을 미루는 '졸업유예'가 유행이 되어버린 세대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생각이 어른들이 심어 놓은 '안정'이라는 가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60억 명이 사는 지구에서 나의 길을 가는 것이 나와 사회를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19일, 유시민 작가

유시민 씨가 서울시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유시민 강연, 진실은 힘이 세다 유시민 씨가 서울시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원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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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만남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난 그는 구불거리는 머리만큼이나 자유로워보였다. 정치인도, 정당인도 아닌 노무현을 사랑했던 시대의 작가로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정치계의 은퇴를 선언하고 처음으로 낸 책 <어떻게 살 것인가> 이후 NLL 대화록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이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시국강연회'라는 시기적절한 제목으로 대중들 앞에 섰다.

이 강연의 핵심은 '세상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으로 세상이 시끄럽고, 여기에 정문헌 의원과 김무성 의원이 가세해 NLL 대화록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태의 경과를 설명하며 강연은 시작됐다.

그는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이 어떻게 떠들어도 그에 휘둘리거나 속지 않고 '선동'을 당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는 소란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조용한 것만이 평화가 아니고, 합리적인 논쟁이 이루어질 때 바람직한 평화가 올 수 있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가 합리적 사실에 근거한 토론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교류할 때,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한다. 이는 곧 언론의 자유와도 이어지는 문제다. 각자의 생각을 사실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곧 언론의 자유이며, 이를 얻기 위해 투쟁한 어른들의 바람이다.

나는 그의 강연에서 그가 정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책이라는 촛불을 통해 현실 정치에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또한 그의 위치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불어 미래 세대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남겨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2013년 11월 28일, 문정희 시인

문정희 씨가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헤이리 커뮤니티 하우스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문정희 강연, 여성으로서 시를 쓴다는 것은 문정희 씨가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헤이리 커뮤니티 하우스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원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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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헤이리 문학 행사에서 만난 문정희 시인이다. 문정희 시인은 다소 거친 표현을 많이 쓰는 '친고모'의 느낌이었다.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헤어스타일도 가지고 있었다. 외모와 어울리게 그녀는 페미니즘에 대한 담론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여류 시인이다. 나는 그녀를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시를 통해 만났다. 입시 때 문학 문제집에서 읽었던 그녀의 시는 정치나 경제 등 사회 중심에 서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한 애환을 담은 노래였다. 대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들이 결혼 이후 집에서 살림만 한다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담긴 시다.

그녀는 글을 쓰겠다는 여성들에게 남의 평가에 기대지 말라고 충고한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것이 자신의 문학성을 의심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글을 쓰고 싶은 그 열망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시인이 됐다고 말한다. 시에는 점수가 없으니 자신이 좋아하는 시가 곧 최고의 시라는 것이다. 시는 유행이 아니며 각자의 마음을 열어주는 예술이다. 거침없이 문학에 대한 희망을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젊은 작가들은 희망을 얻는다.

그녀의 자유로운 모습에서 잠시 해방감을 느꼈다. 문학가들은 사회라는 모둠에서 다소 떨어져 걷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맺어 낸 문학적 열매들을 독자에게 기꺼이 내놓는다. 나는 이것이 문학이 가진, 문학가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남겨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한다.

"당신을 위로하려는 이 사람이 때때로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단순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삶에도 많은 고생과 슬픔이 있으며 당신의 삶보다도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도 자식을 키우면서 비로소 부모가 된다. 나는 세상 어른들이 겪었던 모든 풍파가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풍파보다 거세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힘들고 아프다. 다만 아직은 우리에게 더 좋은 세상을 남겨주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이 있기에 세상에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남긴 몇 마디 말보다 그들의 행동이, 사회적 실천이, 눈빛과 손짓이 우리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위로가 바로 나와 내 친구들에게 건네는 '멘토사용설명서'다.



태그:#노회찬, #홍세화, #유시민, #문정희,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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