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
우리의 역사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환희를
풀 속에서는 노란 꽃이 지고 바람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서걱거린다 ― 우리는 그것을 영원의
소리라고 부른다

해는 청교도가 대륙 동부에 상륙한 날보다 밝다
우리의 재[灰], 우리의 서걱거리는 말이여
인생과 말의 간결 ― 우리는 그것을 전투의
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은 인생을 거꾸로 걷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삼십대보다 약간 젊어졌다 육십이 넘으면 좀더
젊어질까 기관포나 뗏목처럼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 ― 우리는 그것을 빈궁(貧窮)의
소리라고 부른다

오오 환희여 미역국이며 미역국에 뜬 기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든 정다산이든 수염 난 영감이면
복덕방 사기꾼도 도적놈 지주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워라
자칭 예술파 시인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을 욕해도 ― 이것이
환희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 ― 우리는 그것을
결혼의 소리라고 부른다
(1965. 6. 2)

수영은 자주 흥분했다. 타락한 세상, 진정한 자유를 허용하지 사회는 늘 수영을 도발했다. 수영은 그런 세상과 사회를 가차없이 까주고 싶었다. 횡포를 일삼는 권력자들과, 돈에 눈이 먼 속물들에게 빈정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흥분을 할 때는 말이 잘 안 나왔다. 붓을 들고 앉아도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원인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다. 수영은 모든 문제가 집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는 집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안에서 모든 문제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영은 한 성인에 관한 짧은 우화를 떠올렸다. 성인은 자기 집 문앞에서 거지질을 했다. 집안 사람 누구도 모르게 한평생 동안 그랬다. 그러다가 죽었다. 수영은 생각했다. 그는 왜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는 혹시 집안의 자디잔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을까.

어느 겨울이었다. 수영은 식구들과 영화 <25시>를 보고 왔다.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철조망 앞에서 탄원서를 든 채 보초가 쏘는 총알에 쓰러지는 소설가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문득 수영은 작가의 사명을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에게서는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았다. 스스로 안락과 무사와 타협과 체념에 길들여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에 따라오는 아내와 아이가 싫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놈은 기분이 좋아서 이불을 깔아놓은 자리 위에서 후라이보이니 구봉서니 오현경이니 남진이니의 흉내를 내면서 우리들을 웃기려고 했지만 나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화를 내고 말았다. 그날 밤은 나는 완전히 내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자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지만,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의 난로 위의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역시 원수는 내 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다.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만 해도 너무나 힘에 겨웁다. 너무나도 나는 자디잔 일들에 시달려왔다. 자디잔 일들이 쌓아올린 무덤 속에 내 자신이 파묻혀 있는 것 같다. (<삼동(三冬) 유감>, ≪김수영 전집 2 산문≫, 131~132쪽)

<삼동 유감>은 1968년에 쓰인 글이다. 수영이 급작스러운 버스 교통사고로 작고한 해였다. 수영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나'에 매달렸다. 그런 집요함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수영이 사소한 일상의 문제에 그토록 집착한 까닭은 무엇일까. <미역국>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우리' 때문이다.

'나'가 없는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려면 '나'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세상에 당당한 '나'가 말이다. 그럴 때라야 '우리'는 살아 있는 복수의 '나들'이 된다. 그런 '나들'이 있을 때 '우리'는 살아남는다.

<미역국>에서 수영은 "우리의 역사"(1연 2행)를 이야기한다. 고작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1연 1행)이 알려 주는 것이다. 하찮은 과거이고 보잘 것 없는 역사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영원의 / 소리라고 부른다"(1연 4, 5행). 하찮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환희"(1연 2행)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와 그 '환희'는 결코 빛나지 않는다. "구슬픈 조상(祖上)"(4연 1행)과 "가뭄의 백성"(4연 2행)의 '역사'이고 '환희'이기 때문이다. "퇴계든 정다산이든"(4연 2행) 잘나고 똑똑한 위인들뿐만 아니라 "수염 난 영감"(4연 2행)의 지리멸렬한 '역사'이고 '환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컨대 "미역국에 뜬 기름"(4연 1행)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자디잔 존재들이다. 심지어는 "복덕방 사기꾼"(4연 3행)과 "도적놈 지주"(4연 3행)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구별도 없다. 편가르기나 선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 통째 움직"(3연 3, 4행)이는 것처럼 "우리의 역사"는 "통째 움직"이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나오는 '기관포'(3연 3행)와 한 덩어리로 통째로 움직이는 '뗏목'(3연 3행)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는 '빈궁'(3연 4행)하다. '빈궁'하면서도 '환희'로 가득 차 있다. '나'에서 '우리'로 확장하는 수영의 의식은 급기야 "우리의 역사", 그 초라하고 '빈궁'한 '환희'와 '결혼'(5연 2행)하는 지점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의 역사가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나'의 속물과 치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시인으로서 수영이 너무나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미역국>을 쓸 즈음 수영은 집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이 유난히 많았다. 신변잡사에서 나온 글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는 '우리'를 써 보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미역국>과 그 이후에 나온 두어 개의 시편들이었다.(<미역국> 이후 두어 달 만에 나온 <적 1>이 그 첫 작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수영은 <미역국>의 '우리'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진정한 '우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수영은 시인 엘리엇의 "'나'도 여러 가지 '나'가 있다"는 말을 언뜻 떠올렸다. 그런 말로 변명을 해보려 해도 호도지책조차 되지 못한다고 여겼다. 수영이 꿈꾼 진정한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미역국>에서는 수영의 역사의식이 잘 드러난다.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시각도 엿보인다. 그런 점에서 <미역국>은 <거대한 뿌리>나 <현대식 교량>과 맥을 같이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문화에 심취해 있는 역사의식과 민족주의는 위험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 드러나는 역사의식과 민족주의는 그렇지 않다. 막힌 데 없이 뻥 뚫려 있고, 닫힌 데 없이 누구에게로나 모두 열려 있다. 그것은 액면 그대로의 의미에서 근본적이다. 그 상징으로 고정적이지 않은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을 차용한 까닭도 이런 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미역국>, #김수영,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역사의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