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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표지
 <행복의 건축> 표지
ⓒ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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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두 남자가 세계여행을 다니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두 남자는 당시 프랑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곳은 말 그대로 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풍스러움이 도시 곳곳에서 묻어났다. 하나하나의 건축물마다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나 다니는 길거리에 널려있었다.

내가 이렇게 유럽의 건축물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건축물을 싫어해서다. 물론 지금의 건축물에 한해서다. 우리나라의 거리를 걷다보면 콘크리트로 된 창살이 달린 감옥을 빙빙 도는 기분이다. 콘크리트로 떡칠을 해놓은 상자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다. 그곳은 단지 길일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과거를 얻을 수 있는 흔적은 이미 소멸해버리고 없었다.

건축물에는 누군가의 역사가 스며있다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을 때였나. 가족끼리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옛 기억을 잘 잊어버리는 나인데도 그 기억은 또렷하다. 지금은 KTX를 타고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더군다나 표가 없어 입석으로 열차를 탔던 터라 꽤나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자 꽤 놀랐던 느낌이 있다. 어린 나에게 서울은 얼마나 큰 곳이었을까. 그때의 서울역은 어린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최근 서울에 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어렸을 때의 그런 감흥은 없었다. 옛 서울역보다 커졌고 편리해진 지금의 서울역은 단지 기차역일 뿐 '나의 서울역'은 아니었다. 군인이었을 때 수없이 서울역을 드나들었어도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역을 많이 오고갔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옛 서울역에 간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순간 어릴적 기억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옛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옛 서울역은 이제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은 잃었지만, 하나의 박물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쳐 옛 서울역의 모습이 다 보이는 곳에 멈췄다. 순간 어릴 적 서울역에 왔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어떤 귀중한 것을 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깨닫는 순간 마치 우리의 기억들을 눌러놓는 서진(書鎭)처럼 어떤 구조물을 세우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고 적었다. 옛 서울역은 내가 세운 것은 아니지만,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옛 서울역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외에도 이 건축물은 수많은 사람의 기억들을 들춰낼 것이다. 어떤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접속하는지에 따라 다른 역사를 보여줄 것이다. 옛 서울역이 1925년에 지어졌으니 지금 88년 동안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주변의 건축물은 무엇을 저장하고 있을까. 2003년에 신축된 서울역은 고작 10년의 역사를 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면 아마 재건축할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나라 건축물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그 건축물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무시하는 것 말이다.

내가 유럽의 건축물을 좋아하는 것은 미적 취향이라기보다는 그 건축물에 담긴 역사성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글을 쓰듯이 집을 짓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물은 그것이 가진 기능을 다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 프랑스인들은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프랑스의 역사를 생각할 것이다.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며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릴 것이고, 에투알 개선문을 보며 나폴레옹 시대의 옛 영광을 느낄 것이다. 또한 주변의 옛 건축물을 보며 과거의 인물들을 생각할 것이다. 빛바랜 외벽과 문에 난 생채기, 옛 사람들의 낙서 등은 건축물의 흠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며 그들이 남긴 메시지다. 건축물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새 것만을 찾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는 낡은 것이라면 부수고 새로 짓기를 원한다. 그것은 건축물을 단지 기능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담은 건축물은 높은 빌딩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거닐며 건축물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아쉽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수십 일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는 건축물에서 뭘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에 둔감한 것은 아마 이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폭발물을 설치해 무너뜨리거나 중장비를 동원해 건축물을 깨뜨리기 시작할 때 과거의 것들은 소멸한다. 그 건축물이 무너지는 광경은 오래전에 떠난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느낄지도 모르는, 기억 한 뭉텅이를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다. 옛 기억을 증언해줄 수 있는 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그때를 떠올리게 해줄 장소가 없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이제 내가 옛 서울역에서 멈춰 묻어둔 기억을 꺼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의 저장소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를, 그것을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 http://picturewriter.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2011)


태그:#알랭드보통, #역사의식, #행복의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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