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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답게 날씨는 새로 피어난 신록과 함께 푸르렀다. 잔인한 4월, 나는 잠시 분노와 먹먹한 가슴을 뒤로 하고 연휴 기간 동안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나는 경기도 이천(利川) 설봉산성(雪峰山城)으로 차를 몰았다. 모처럼 맞는 평일 휴일에 이천의 설봉산성(雪峰山城)에 오르기로 하였다. 설봉산성은 수년 전 설봉산성 바로 아래에서 열렸던 이천 도자기축제를 즐기면서도 오르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아있던 곳이다.

설봉9경의 하나로서, 봄햇살을 받아 호수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 설봉호 설봉9경의 하나로서, 봄햇살을 받아 호수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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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안내소 앞에는 사진과 함께 이천 9경의 절경들이 자랑스럽게 전시 중이다. 나는 이천 9경 중의 하나인 설봉호(雪峰湖)를 먼저 둘러보았다. 설봉호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설봉호의 안쪽에서 열리는 도자기 축제는 세월호 사고로 인하여 가을로 연기되었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설봉호는 아름다우나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설봉공원은 차분하고 사람들도 많지 않다. 호수 안에는 이천의 상징 도자기들이 떠 있고 그 너머로 이천 시내의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호수 주변의 철쭉은 붉게,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잔인한 세월 속에 꽃들은 왜 이리 아름답게 피는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축제가 가을로 연기되었다.
▲ 이천 도자기축제 세월호 참사로 인해 축제가 가을로 연기되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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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산 등산안내도를 보며 오늘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지점인 설봉산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지도에서 보니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설봉산성은 설봉산(雪峰山) 정상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70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설봉산성에 직진하기 위하여 호암약수터까지 대장골을 따라 설봉산을 오르기로 했다.

이 작은 계곡이 대장골로 불리는 이유는 설봉산성을 만들 당시에 대장장이들이 공구를 만들던 대장간이 이 계곡에 있었기 때문이다. 설봉산이 이천 시내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이 계곡은 한국전쟁 당시에 이천 주민들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걸음을 조금 옮기다 보니 이천시의 산불진화용 헬기가 대기 중이다. 저 헬기가 자주 동원되는 위기상황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헬기 옆을 지나간다.

얼마 걷지 않아 갈색 목재를 세워서 만든 설봉산 산림욕장 입구가 나왔다. 산은 높지 않으나 산림욕장 안으로 들어선 이후 숲 속에서 숲의 향기가 코 끝에 전해져 왔다. 숲의 향기는 산을 오르는 동안 내내 나를 따라오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산능선에는 새빨간 철쭉과 분홍색 철쭉이 번갈아가며 화려하게 숲 속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성백제가 세운 산성의 동문으로서 복원된 모습이다.
▲ 설봉산성 동문 한성백제가 세운 산성의 동문으로서 복원된 모습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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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虎岩) 약수터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샘물이 바위 위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계속 오르는 산길은 완만한 흙길이어서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는 제격이다. 얼마 걷지 않아 설봉산성의 동문(東門) 터가 나왔다. 성문은 없고 과거 성문 터는 산 위로 올라서는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면을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화강암을 정확히 열을 맞춰 새롭게 쌓은 성벽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설봉산성이 처음 축조된 백제 당시와 같이 설봉산성을 쌓았던 석재로 성을 쌓았는데, 이 석재는 설봉산 곳곳에 있는 화강암이다.

남쪽 성벽은 성벽 남단에 원래 있던 큰 화강암 암반(巖盤)을 그대로 이용하여 기반석으로 삼고, 그 위에 다듬은 화강암으로 성벽을 쌓았다. 자세히 보니 기반이 되는 화강암 암반에는 홈이 파여 있거나 위에 성벽을 쌓기 좋도록 잘 다듬어 놓았다. 거의 모두가 사라지고 없는 백제의 유물, 그러나 백제인이 다듬은 이 화강암 암반이 명확하게 내 눈 앞에서 백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설봉산성 동문 안으로 들어서서 산 아래를 조망해 보았다. 예부터 이천은 한강 이남의 경기도 내륙에서 농사를 지을 땅이 넓고 경기미로 유명한 쌀이 생산되던 곳이다. 산성의 북쪽과 동쪽, 남쪽을 보면 이천의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의 서남쪽은 설봉산 정상의 능선이 가로막고 있다. 산성의 북동쪽 아래를 내려다보니 교통의 요지답게 지금도 서울과 충주를 연결하는 3번 국도가 연결되고 있다. 설봉산성의 서쪽으로는 이천과 용인 사이를 구분 짓는 산맥이 이어지고, 국토의 동맥인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설봉산성은 이천의 평야지대를 내려다보면서 바로 이 도로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축조되었을 것이다.

북벽 아랫길은 작은 산사태로 함몰되어 있다.
▲ 함몰된 북벽 아랫길 북벽 아랫길은 작은 산사태로 함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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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산성의 북벽 아래는 작은 산사태가 나서 위험하게 함몰되어 있다. 나는 동문 안으로 들어섰다가 북벽을 둘러보기 위해 산사태 위를 덮은 푸른 비닐을 피해가며 조심스레 성벽을 돌았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산 아래로 굴러버리고 구조대를 불러야 할 판국이다. 북벽을 돌아서 다시 산성 안으로 들어오니 산성 내에 꽤 넓고 평탄한 평지가 있고 그 위는 온통 꽃 천지다.

무서울 정도로 화려하게 철쭉이 피어 있다.
▲ 설봉산성 철쭉 무서울 정도로 화려하게 철쭉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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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따사로운 5월, 산성 안은 온통 붉은 빛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점령하고 있었다. 잔인한 4월을 어서 보내려는 듯 꽃은 너무나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철쭉꽃 사이로 검은 나비들이 춤을 추며 꿀을 따고 있었다. 나비들은 모두 검었다. 마치 화려하게 피다가 간 꽃들을 조문하려는 듯이 나비들은 모두 검었다.

화려한 철쭉밭에 검은 나비들만 모여들었다.
▲ 철쭉과 검은 나비 화려한 철쭉밭에 검은 나비들만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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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터 안의 넓은 평지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와편(瓦片)을 잔뜩 쌓아둔 곳이 있다. 누가 보아도 이 평지는 산성이 있었던 당시에 건물과 여러 시설을 지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 곳이다. 와편을 쌓아 놓은 곳 바로 앞에서는 작은 건물터 유구가 함께 발견되었다. 와편은 부서진 기와조각이므로 와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기에 기와건물이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와편은 조선시대의 기와조각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견된 유구의 크기로 보아 제사기물들을 보관하던 작은 건물이 이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이 제사유적을 산성 내에 복원시켜 놓으면 산성 내의 문화유산이 더 풍요로워질텐데 아쉽기만 하다.

이곳에서는 한성백제인들의 가장 큰 특징인 거대한 흙구덩이, 토광(土壙)이 발견되었다. 이 산성이 백제인들에 의하여 처음 지어졌다는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백제인들은 높은 산성 내 지하에 큰 흙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식량과 백제토기, 여러 기물 등을 보관하였을 것이다. 이 토광도 서울의 몽촌토성 토광과 같이 발견된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 설봉산성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 같다.

칼로 내려친 듯 바위가 날카롭게 잘려 있다.
▲ 칼바위 칼로 내려친 듯 바위가 날카롭게 잘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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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터에서 연륜 깊은 소나무 무리가 장관인 능선을 오르니 그 이름 유명한 칼바위가 나타났다. 설봉산성도 '칼바위'를 중심으로 산봉우리를 둘러싼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바위가 제법 웅장하고 위용을 갖추고 있는데, 바위의 생긴 모습을 보면 '칼바위'라는 이름이 바로 이해가 된다. 칼 모양의 날카로운 바위가 대칭적으로 거대하게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주변이 넓은 평지인데 갑자기 솟아오른 칼바위의 기가 아주 강력해 보인다. 풍광이 수려하고 전망 좋은 평지가 넓으니 이 칼바위 주변은 이천 시민들의 소풍 및 야유회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산성 내 남쪽의 평지는 제법 넓다. 산성 내에서 가장 높고 사방이 잘 조망되며 산성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평탄대지에 장수의 지휘소인 남장대지(南將臺址) 유적이 남아 있다. 다행히도 산성의 역사를 오롯이 담은 주춧돌 15개가  사라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춧돌은 규격이 일정하게 다듬지는 않고 위와 옆면을 조금 다듬었는데 서로 다른 주춧돌의 모양이 묘한 운치가 있다.

설봉산성의 장수가 이천 시내를 내려다보던 곳이다.
▲ 남장대지 설봉산성의 장수가 이천 시내를 내려다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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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대지는 온돌과 담장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사방이 시원스럽게 트인 누각형 장대였을 것이다. 함께 출토된 유물을 보면 이 남장대지는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설봉산성은 처음에 백제에서 지었으나 한강유역을 차지한 통일신라가 이 산성을 차지했음을 이 유적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이곳에 서서 보니 이곳이 산성의 중심으로서 전투 시에도 군사를 통솔하기에 쉬웠을 것 같다.

남장대지와 칼바위 사이 아래쪽에는 8각 제단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이 4세기 백제시대의 것이고, 제사단과 관련된 건물지의 와편이 조선시대 와편인 것으로 보아 설봉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긴 세월 동안 사용되었던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는 명산과 주요 군사시설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8각 제사단도 그러한 국가적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삼국시대의 제단은 조선시대에 사직단(社稷壇)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제단의 돌 위에 아주머니 몇 분이 자리를 깔고 한참 동안 이야기 중이다. 게다가 자기들이 듣고 싶은 음악을 조용한 산 중에 틀어놓고 있다. 역사유적을 아끼고 조용한 산행을 원하는 등산객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너무나 아쉽다.

백제의 성벽이 아름답게 굽이치고 있다.
▲ 설봉산성 남벽 백제의 성벽이 아름답게 굽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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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봉산성 보다 높은 설봉산(雪峰山) 정상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밑에는 내가 선 언덕을 돌아가는 산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언덕의 정상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동문 주변에만 복원해 놓은 줄 알았던 백제의 성벽이 거기에도 있었다.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성벽의 아래로 연결되는 갈림길을 찾았다. 8각 제단 아래에서 연결되는 길이 남쪽 성벽을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길이었다. 물론 복원된 성벽이지만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아름답게 굽이치고 있었다.

이곳에 서면 이천 시내가 일망무제로 보인다.
▲ 설봉산 정상 이곳에 서면 이천 시내가 일망무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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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발 394m인 설봉산성 정상을 향해 다시 걸었다. 설봉산 정상, 희망봉은 설봉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이 워낙 부드러워서 그리 힘들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산이었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시계가 약간 흐릿하기는 하지만 정상에서는 이천 시내가 일망무제로 들어왔다.

하산길,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빗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복을 입고 비를 맞을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나는 사진기 만을 옷 안으로 넣은 채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산을 내려왔다. 빗물이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젊은 넋들을 달래려는 것 같다. 나는 분노와 가슴 아픔을 접고 빗 속에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이천, #설봉산, #설봉산성, #한성백제, #칼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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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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