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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존재 이유

'대비, 왕 위의 여자' 표지
 '대비, 왕 위의 여자' 표지
ⓒ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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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임에 갔더니 그 모임의 총무가 마이크를 잡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내 또래의 60대 후반이었다.

요즘 가장인 자기는 집에서 다섯째라고 했다. 그 첫째가 마나님이요, 둘째가 딸이요, 셋째가 며느리요, 그 넷째가 아들이요, 자기는 그 다음이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이가 마이크를 뺏고, 자기는 여섯째로 집안에서 키우는 강아지 다음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는 마이크를 잡더니 이즈음 '남존여비'의 풀이는 "남자의 존재 이유는 여성의 비위를 맞추는데 있다'고 자학적인 말을 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었지만 그들 얘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종로3가 공원은 별 볼일 없는 늙은 남성들의 휴식처가 된지는 이미 오래고, 시청 앞 지하도나 서울 역 대합실이나 지하도가 홈리스(노숙자)들의 보금자리가 된 지도 오래다.

하지만 조선 5백 년 동안은 유교가 지배하던 사회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둥 여성의 사회참여는커녕 가정에서도 온갖 천대를 받았던 암흑시대였다. 그런 사회였지만 구중심처 대궐에서 '대비(大妃)'만은 결코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당당히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조선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자에게 물어보았다.

광릉에 있는 세조비, 정희 왕후 윤씨의 능
 광릉에 있는 세조비, 정희 왕후 윤씨의 능
ⓒ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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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권력자

- 이 작품에 나오는 대비는 몇 분이며 그분들의 생애를 말씀해 주십시오.
"네 분의 대비를 썼습니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 한씨, 영조의 계비이며 정조의 새할머니 정순왕후 김씨,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를 썼습니다.

첫 번째는 세조비였던 정희왕후 윤씨입니다. 윤씨는 세조가 죽자 조선 최초의 대비가 됩니다. 그리고 아들 예종의 개혁 시도를 막으며 구세력(훈구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예종이 19살 젊은 나이에 급서하자 당일에 곧바로 성종을 지명하고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습니다. 예종이 오랫동안 '봉와직염'으로 보이는 족질(足疾, 발에 생긴 질병)을 앓고 있었는 데도 모른척했던 '비정한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는 인수대비 한씨입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의 수신교양서 <내훈>의 저자인 그분은 세조의 맏며느리로 입궁했다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궐 밖으로 내쳐지고, 무려 12년의 세월을 와신상담한 끝에 결국 아들(성종)을 즉위시켜 대비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스물에  홀어미가 되어 아이 셋을 홀로 키운 매우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치판세를 잘 읽고 아들을 즉위시킨 뒤 시어머니인 정희왕후 윤씨를 수렴청정의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아들(성종)이 친정을 선포하는 데에 음으로 양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수대비 한씨는 국내 인사로 아들 성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명나라를 등에 업음으로써 세력을 확대하는 등 대단한 정치력을 발휘합니다.

세 번째는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익히 접했듯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하고, 친정 가문의 집권 유지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개혁군주 정조를 무력화시키는 데에 전력투구했고, 그 저지에 성공한 집념의 여인입니다.

네 번째는 60년 안동김씨 독재의 서막을 연 순원왕후 김씨입니다. 그분은 왕실의 재산인 궁방전을 김씨 가문의 재산으로 둔갑시키는 등 조선 왕실을 무력화하고 안동김씨 가문의 이익 추구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그분은 헌종이 죽자 철종을 지명하여 수렴청정 기간을 연장시킨, 결과적으로 2명의 왕을 좌우하며 군림한 막강한 권력자였습니다."

서오릉에 있는  소혜왕후 한씨의 능
 서오릉에 있는 소혜왕후 한씨의 능
ⓒ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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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수집한 자료를 버릴 때 가장 힘들었음

- 위의 대비 가운데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을 느낀 인물은 누구입니까?
"사실 저는 네 분의 대비에게 좋은 느낌을 가지기는 힘들었습니다. 대비들의 적극적인 정치개입이 모두 자신의 친정가문을 포함한 특권층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결과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당시 유교가 강조하는 효(孝)를 가장 충실하게 실현하면서 살았던 여성들이었습니다. 자기 친정은 흥했으나 나라 전체는 탐관오리로 망국의 길로 이끈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을 집필과정의 어려움이나 뒷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처음에 어려웠던 점은 대비들이 직접 정치에 개입했던 증거들을 1차 사료에서 찾아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여기서 1차 사료란 조선왕조실록 같은 당대 기록 문서들입니다. 첫 인물 정희왕후 윤씨가 아들 예종에게 어떤 압력들을 가했는지 찾기 위해 예종실록 14개월 분량을 처음에는 모두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어떤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과 가정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증거들을 다시 수집했습니다. 근거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저는 형사나 탐정꾼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대비 4명에 관해 정치적 개입들을 했다는 증거들을 찾다보니 나중에는 그 자료들이 너무 많아 이것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치하느냐가 큰 고민거리가 됐습니다. 처음에 윤씨와 한씨 두 명을 썼을 때 원고지 분량이 한 사람당 500매가 넘었습니다. 전체 4명을 대략 1200매 분량으로 생각했는데 초반에 너무 많이 쓴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료 모은 것 가운데 어떤 것 들을 버려야 하는지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영조의 두번째 왕비, 정순왕후의 생가(충남 서산)
 영조의 두번째 왕비, 정순왕후의 생가(충남 서산)
ⓒ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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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들은 정치에서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공들여 쓴 대목은?
"정조 살해 의혹을 증명한 부분과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손자 헌종의 의문 급서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정조 사망은 그간 당시 정치적 환경과 관계없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일부에서 계속 주장해 왔는데, 저는 이 책에서 정조 사망은 타살이며, 그 근거를 현대 의학 근거를 인용해서 썼습니다. 이 부분만 쓰는데 한 달 이상 걸렸습니다."

-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픈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무엇일까요? 여성은 도처에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우리 사회의 기록물들을 보면 여성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비하면 요즘 현대는 비교할 수 없게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지만 제가 보기엔 아직도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엔 여성의 흔적들이 기록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는 기록물들이 있더라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남성이고 그분들이 전형적인 남성 중심 시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활약상등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책에서 조선시대 여성에게 금지되었던 정치에서 맹활약을 펼친 여성들에게 주목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당시 중요한 정치 쟁점에서 이 여성들은 어떤 결정적 역할들을 했는지 이 여성들을 중심에 놓고 당시 정치상황을 재구성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여성들이 변두리에서 사소하게 들러리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정치 중심에서 쟁점들을 선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했고, 그 증거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제 그 결과물을 독자 여러분에게 선보이려고 합니다."

서초구 헌인릉으로 순조와 순원욍후 김씨의 합장릉
 서초구 헌인릉으로 순조와 순원욍후 김씨의 합장릉
ⓒ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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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으로 정치 판세를 좌우하던 모습들을 부각시키다

- 이 시대 이 작품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조선의 여성 권력자들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조선시대 유교의 삼종지도를 따라야하는 운명을 타고난 여성에게 당당하게 정치 판세를 좌우하며 호령했던 모습들을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

- 기자가 미처 질문하지 않았지만 독자에게 꼭 하고픈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이 글을 구상하고 쓴 지난 2년 동안 사실 정말 즐거웠습니다. 누군가는 글 쓰는 작업이 고통이라고 하지만 저는 고통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자료를 찾고, 다듬고, 오로지 골똘하게 한 가지 생각만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추천의 글에서 조선시대 정치의 한복판에 여성이 당당히 서 있었음을 정통 사료를 통해 입증한 역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그동안 막연하게 알았던 조선시대 '왕 위의 여자, 대비'를 이 작품을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대비, 왕 위의 여자 / 도서출판 인문서원 / 김수지 지음 / 334쪽 / 16,000원



대비, 왕 위의 여자 - 왕권을 뒤흔든 조선 최고의 여성 권력자 4인을 말하다

김수지 지음, 권태균 사진, 인문서원(2014)


태그:#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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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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