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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계획, 회담록 공개

2012년 10월부터 2013년까지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이 끊임없이 재탕해 정권 보위의 수단으로 삼은 소재가 있었다. 바로 2차 남북정상회담록과 엔엘엘이었다.

새누리당 정문헌·이철우 의원의 인터뷰 내용과 이른바 권영세 녹취록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2차 남북정상회담록 공개는 이미 이명박 정권이 준비한 바 있던 정권 내부의 '오래된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이후 수차례 발췌본, 전문 등 다양한 형태로 회담록을 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0.4선언 1주년인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자 이 대통령이 국정원에 회담록을 가져올 것을 지시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원세훈 국정원장 취임 한 달째이던 2009년 3월, 국정원은 그간 1급 비밀로 보관해오던 회담록을 2급 비밀로 격하 시켰다. 이는 회담록 '발췌본'을 작성키 위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 "끼워 맞춘"(권영세 녹취록 참조) 발췌본 내용 속에 이른바 엔엘엘 발언 등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이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직후 이 대통령은 재차 회담록 원본을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 무렵 이명박 정권이 회담록 공개를 계획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기 이명박 정권의 '노무현 죽이기'가 가열 차게 전개되던 정황을 고려하면, 그것은 노 전 대통령을 향한 정치적 공격의 '또 다른 소재'로 준비된 것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곧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2012년 10월 8일, 이명박 정권 시기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냈던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통일부 국정감사장에서 2차 남북정상회담(이하 2차 정상회담) 당시 노 전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단독회담을 통해 엔엘엘을 포기했으며, 그 발언의 내용을 담은 '비공개대화록(이른바 비밀대화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오래된 계획'의 망령은 되살아났다.

이날 정 의원은 자신이 청와대 통일비서관 재직 시절 대화록 원본을 MB에게 보고하기 위해 직접 본 적이 있으며, 당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엔엘엘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엔엘엘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엔엘엘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발언한 내용을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정 의원의 주장은 모두 허구였다. 뒷날 국정원에 의해 공개된 2차 정상회담 회담록에는 이와 같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없었으므로 우선 내용적인 측면에서 정 의원의 주장은 허구였다. 또한 비밀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정 의원의 주장 역시 전혀 근거 없는 허위주장이었다. 단적으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단독회담(혹은 비밀회담)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비밀대화록 또한 존재할 턱이 없었다. 실제 이틀 후인 10월 10일, 2차 남북정상회담에 동행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은 당시 별도의 단독회담이 없었으며 배석자가 작성한 대화록만 있다며 정 의원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러자 다음 날 정 의원은 이 전 장관이 말한 대화록이 바로 자신이 말한 대화록이라며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자신이 회담록(대화록) 원본을 직접 보았다는 정 의원 주장의 입지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 의원의 주장은 정략적인 허위주장이었거나 아니면 회담록과 관련해 국정원에서 이 대통령에게 "끼워 맞춰" 보고한 내용에 기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가지 가능성 중 권영세 녹취록의 내용을 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커 보인다. 권영세 녹취록에는 국정원에서 이 대통령에게 회담록 원본을 끼워 맞춰 보고한 내용이 정문헌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에게 보고하기 위해 회담록 원본을 보았다는 정 의원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 셈이다.

실제로도 일개 비서관 신분이 회담록 원문을 열람하려면 대통령기록물법상 대통령 재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이 대통령이 국정원을 통해 회담록 관련 보고를 받고, 그 이전 원세훈 원장이 회담록을 2급 비밀로 격하시킨 상황에서 굳이 당시 국정원을 제쳐두고 정 비서관에게 원본을 열람하라는 재가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설령 정 의원이 원본을 본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는 그것을 제쳐둔 채 이명박 정권 내부에서 회담록에 대해 '만들어낸 인식'을 의도적으로 퍼뜨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화록 전문도 아니고 자신의 구미에 맞게 편집해 이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발언이라고 MB에게 보고한 사람의 시각이 그대로 유출돼 집권당에 공유되면서 이 대화록이 공개되면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가 괴멸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보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명박 정권-박근혜 캠프의 회담록 유출 공조

그런데 정 의원이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박근혜 후보 캠프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시점이었다. 이 시기 박 후보 캠프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상징했던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사퇴 가능성을 내비쳤으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야권 단일후보가 박 후보를 앞서고 있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이에 박 후보 캠프 내에서는 종전의 '중도확장 전략'에서 '색깔론'으로 대선 전략을 수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박 캠프 내 김무성 본부장 중심의 새로운 체제 수립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정 의원의 최초 주장 이후 박근혜 후보 캠프는 10월 한 달 내내 문재인 후보를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펴며 비밀대화록 공개를 주장했다. 이 시기 이명박 대통령도 연평도를 방문하는 따위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처럼 엔엘엘 공세과정에서 박근혜-이명박 양측은 공조하고 있었다.

한편, 10월 29일 국회 국정감사는 이 논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다. 이날 원세훈 국정원장은, 비밀대화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국정원에 2차 정상회담 회담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언론은 원 원장이 확인해준 핵심적인 사실은 전자임에도 후자의 내용만 집중보도 하였다. 현재도 포털 뉴스검색창에서 당시 날짜에 '원세훈'이라 검색하면 '원세훈 국정원장, 盧-金 대화록(=회담록) 존재 인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수십 건 뜬다. 당시 상황에서 이와 같은 보도는 정 의원이 주장한 비밀대화록이 곧 국정원에서 보관중인 회담록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실제 이러한 보도 양태는 정 의원의 주장이 허위로 판명됐음에도 이후 해당 논란이 '회담록' 내용 자체를 둘러싼 논란으로 전화(轉化)하는 토대가 된다. 정 의원 역시 이날 자신이 이 문제를 최초 제기할 때 "비밀"이라는 언급은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해 이러한 전화를 부추겼다. 아울러 이날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정원 보관 회담록 공개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원 원장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다.

또한 이 무렵을 전후해 박 후보 캠프 내에서는 뒷날 권영세(당시 박 캠프 종합상황실장) 녹취록을 통해 알려진 이른바 '비상계획(컨틴전시 플랜)'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권영세 녹취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영세 : "NLL 관련된 얘기를 해야 하는데 … 자료 구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거는 역 풍가능성 … 그냥 컨틴전시플랜이고 도 아니면 모고 할 때 아니면 못 까지 … 근데 지금 소스가 청와대 아니면 국정원이니까 대화록 작성하는데서 거기서 들 여다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까고…"
<신동아> H모기자 : "지난달에 월간조선 조갑제 대표가 그걸 본 사람들 얘기를 들어가지 고 … 읽어본 사람들이 땅을 쳤다 그래요."
권영세 : "상당히 가능성이 있죠.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국정원에서…"
권영세 : "전해들은 얘기라고 … (그것)가지고 쓸 수가 없겠지만 만약 이게 문서로 뒷받 침이 된다면 엄청난 얘기지."
H모기자 : "그렇겠네요. 이번에 되시면 바로 저희한테 주세요."
권영세 : "언론을 통해서는 안 할 거야. 아마 … 분명 … 정상회담록 공개하는 과정에서 7년(2007년)에 정상들이 도대체 가서 뭔 얘기를 하고 앉아 있는 거였는지 … 그때 가서 본다."
권영세 : "근데 국정원에서 그 때는 MB정부 … 그래서 … 원세훈으로 원장 바뀐 이후로 기억을 하는데 내용을 다시 끼워 맞췄거든요, 아마 그 내용을 가지고 청와대에 보고를 … 요약 보고를 한 거지, 요약보고를 한 건데, 그걸 이제, 아마 어떤 경 로로 정문헌한테로 갔는데…"

위에서 드러나듯 비상계획의 핵심은 박근혜 새누리당에 위기상황이 생길 경우 선거 국면에서 회담록을 "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 보면 새누리당은 '집권 이후' 회담록 공개 계획까지 이미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위의 대화 내용에선 기록물 관련법을 지 켜야 한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 이 시기 권영세 종합상황실장은 이미 회담록 원본 전체 혹은 그 일부를 열람했거나 입수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 녹취록을 공개한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녹취록의 공개하지 않은 내용 중 권 대사가 대화 상대방에게 구체적으로 세 단락에 걸쳐 남북정상회담 관련 이야기를 한 것으로 돼 있으며, 이번에(2013년 6월 국정원에 의해) 공개된 전문과 그것이 거의 일치한다고 지적하면서 "매우 긴 문장이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그냥 들어서 잠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대화 내용에서 극우언론과 새누리당의 결탁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점 역시 주목된다.

그런데 김무성 본부장은 취임 직후 엔엘엘 논란을 최초 쟁점화한 정문헌 의원을 만났고 정 의원은 자신이 아는 관련 내용을 김 본부장에게 '구두 보고'했다고 한다(이 점은 애초 두 사람 모두 인정한 사실이었으나 뒷날 회담록 유출과 관련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이를 부인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권 내부의 '오래된 계획'이 정 의원을 고리로 박 캠프로 옮겨졌다고 볼 수 있는 동시에 비상계획의 준비가 최소한 이때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어느 시점엔가 박 캠프는 국가기밀인 회담록 원본을 입수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절차상 당시 이명박 정부 청와대나 국정원의 협조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경향신문> 2013. 6. 26; <한겨레> 2013. 7. 24).

이점은 단적으로 김무성 의원의 '고백'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김 의원은 2013년 6월 당 최고중진연석회의 비공개회의에서 대선 당시 원세훈 원장이 협조해주지 않아 회담록을 공개하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이 부산유세 현장에서 그 내용을 읽었다고 고백했던 바, 그의 이 같은 언급은 회담록 입수 역시 이명박정부·국정원의 협조가 필수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함께 현재로선 확인키 어렵지만, 당시 박 캠프의 의사결정 구조상 박근혜 후보 역시 이 일련의 과정과 무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한겨레> 2013. 6. 26).

이 모든 행위는 불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연장 혹은 집권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발상의 결과였다. 남북관계, 더 나아가 국가 안전 및 외교정책과 관련된 문서를 정치적 제물로 삼겠다는 발상은 이미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다. 기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여론공작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의 산물에 다름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 인터뷰, <서울신문> 2013. 6. 28 ; <오마이뉴스> 2013. 7. 3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 인터뷰, JTBC 2012.10.16
박범계 민주당 의원 인터뷰, <오마이뉴스> 2013. 7. 16

<경향신문>, <한겨레>, <뉴스토마토>



태그:#회담록 무단 공개, #엔엘엘, #권영세 녹취록, #이명박 정권, #정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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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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