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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말

히말라야에서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해가 아직 뜨겁지 않아 걷기에 좋고, 밤새 구름이 걷혀 경치도 더 좋기 때문.
 히말라야에서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해가 아직 뜨겁지 않아 걷기에 좋고, 밤새 구름이 걷혀 경치도 더 좋기 때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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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강바람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목에서 느껴지는 칼칼한 기운. 밤새 통나무 틈새로 불어온 바람에 감기에 든 모양이다. 코를 훌쩍이며 세수를 하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후 짐을 챙겼다.

트레커들이 길을 떠나는 시각은 오전 6시에서 8시. 히말라야에서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해가 아직 뜨겁지 않아 걷기에 좋고, 밤새 구름이 걷혀 경치도 더 좋기 때문. 그리고 무엇보다, 오후 4시 이전에는 그날 밤 머물 마을에 도착해야 밤길에 산을 타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게으른 나도 불평하지 않고, 다른 트레커들과 함께 히말라야의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어제 저녁 시간을 함께 했던 브렛, 엘리와 함께다.

더스틴은 걷는 속도가 비슷한 브렛과 함께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짐이 너무 많아 걸음이 늦춰지는 엘리와, 짐은 깃털같이 가벼우나 그저 태생이 느릴 뿐인 내가 함께 걸었다. 이스라엘에서 온 엘리는 1년 전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했던 부모님 때문에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토록 멋지다는 히말라야인 만큼, 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있다 가고 싶은 마음에 필요할 것 같은 짐은 모두 가지고 왔단다. 포카라 숙소에 거의 모든 걸 덜고 온 내 배낭의 4배는 되어 보인다. 그 큰 배낭에도 차마 들어가지 못한 침낭과 주전자가, 엘리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대며 우리의 발걸음에 장단을 맞췄다.

더스틴은 걷는 속도가 비슷한 브렛과 함께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더스틴은 걷는 속도가 비슷한 브렛과 함께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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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너무 많아 걸음이 늦춰지는 엘리와, 짐은 깃털같이 가벼우나 그저 태생이 느릴 뿐인 내가 함께 걸었다.
 짐이 너무 많아 걸음이 늦춰지는 엘리와, 짐은 깃털같이 가벼우나 그저 태생이 느릴 뿐인 내가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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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끈적하게 바라보는 연인... '얘네 뭐야'

중간에 마주한 식당에 들러 잠시 쉬고 가기로 했다. 밀크티 한 잔을 시켜, 평소엔 잘 넣지 않는 각설탕 두 개를 퐁당 빠뜨렸다. 더워 죽겠는데 뜨거운 차가 웬 말이냐 만은, 뜨끈한 차에서 나오는 김이 얼굴에 확 끼칠 때, 뜨거운 차의 기운이 온몸에 퍼질 때의 느낌은 사우나를 할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차의 기운이 발끝에 도달할 무렵, 한숨을 한 번 푹 쉬어 줬다. 온몸에 수분이 기분 좋게 스며든다.

우리 테이블 옆에는 독일에서 온 커플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헨드릭과 로레나. 짧은 금발 머리를 한 헨드릭이,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로레나의 어두운 밤색 머리를 어루만졌다. 베를린에서 미술을 하는 헨드릭. 교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로레나가 잠시 쉬는 틈을 타 히말라야로 오는 티켓을 샀다고 한다.

"인도에는 3년 전에도 갔었어요. 로레나가 아닌 다른 여자친구랑. 그때의 인도는 끔찍했어요. 아마 같이 간 사람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로레나가 옆에 있어서 좋아요."


뭐니 얘넨. 두 사람은 이 넓은 히말라야 산맥 아래 단둘만 존재하는 양, 서로를 끈적하게 바라보며 손을 어루만졌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는 중간중간 쉴 수 있는 마을이 있어서 좋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는 중간중간 쉴 수 있는 마을이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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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묵 마을로 가는 길
 게르묵 마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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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안나푸르나에는 일 주일 전에 왔어야 하는데. 카트만두에 있을 때 물건을 도둑맞았어요. 길을 물어보는 사이 배낭 안에 든 여권이랑 돈뭉치를 털어 갔더라고요. 미리 받아놓은 안나푸르나 등산 허가증도 도둑맞고. 허가증을 받으려면 여권이 필요한데 여권도 도둑맞고…. 돈은 600달러 정도."
"600달러!"


나는 600달러라는 말에 깜짝 놀라 마시고 있던 차를 다 뱉어낼 뻔했다. 600달러면 네팔을 한 달 여행하고도 남는 돈인데. 돈도 돈이지만, 장기 여행자로서 여권을 잃어 버린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다.

"도둑맞은 그 날은 정말 망연자실했는데…. 점차 괜찮아졌어요. 카트만두에 더 오래 머무는 바람에 좋은 친구들이 생겼거든요. 사람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아, 특히 존! 카트만두에 가면 존이라는 친구를 꼭 찾으세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카트만두같이 복잡한 데서 존을 어떻게 찾니. 이렇게 심하게 긍정적인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은 억지로라도, 이런 긍정적인 태도를 갖춰야 할 때가 있다. 이미 찾기에 불가능한 돈과 여권. 물건을 도난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수많은 경우의 수. 그런 것들을 곱씹으며 시간과 정신을 갉아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여권 분실로 힘들게 시간 내서 온 한 달여 간의 여행 계획이 크게 틀어지게 되었는데도, 이렇게 담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헨드릭과 로레나가 존경스럽다. 포카라 식당에서 고작 만 원을 손해 보고, 사흘이 지난 지금에도 그 일을 곱씹어보고 있는 내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야지.

하루종일 따로 걷다가, 막판에 친한척 찰칵.
 하루종일 따로 걷다가, 막판에 친한척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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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묵 가는길의 풍경. 베시사하르에서 이어지는 강줄기가 걷는 내내 보인다.
 게르묵 가는길의 풍경. 베시사하르에서 이어지는 강줄기가 걷는 내내 보인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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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이 보일 때마다 차를 한 잔씩 마시며 쉬엄쉬엄 오다 보니, 오후 4시나 돼서야 목적지인 게르묵에 도착했다. 게르묵 숙소에는 이미 도착한 트레커 몇 명이 웃통을 벗고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세상에 모든 땀은 다 흘린 것처럼 덥다. 여자인 나를 배려해 준 덕에 일등으로 샤워를 했다. 단 5분 찬물에 몸을 적셨을 뿐인데. 석양 사이로 불어오는 산바람이 산들산들 부드럽고 기분 좋다.

테이블이 많지 않은 탓에 다른 여행자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가슴에 털이 많은 프랑스 남자가 앞에 앉은 더스틴과 브렛에게 한창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 그래서, 여행한 지는 얼마나 된 거야?"


심상치 않은 프랑스 남자의 여행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 내가 물었다.

"음…. 다 합치면 5년?"


5년! 5년 동안 여행을 했다고! 6개월 동안 여행을 간다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왔는데, 5년!

게르묵 마을의 숙소
 게르묵 마을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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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묵 가는 길의 풍경. 여기 모인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 다양한 만큼, 여행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게르묵 가는 길의 풍경. 여기 모인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 다양한 만큼, 여행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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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에서 와인을 서빙했어. 와인 서빙하는 일에 프랑스 남자라고 하면 면접도 안 보고 그냥 뽑거든. 크루즈에 있다, 캐나다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다른 데 여행하기도 하고. 그러고 산 지 5년 정도 지났네."

별 인간이 다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자주 느끼는 거지만, 사는 방식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양하다. 대학가고 취직하고 시집가고 애 낳고. 한 길만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온 지난 스물 몇 해간의 나의 인생이 억울하고 비통하도다. 5년 동안 여행을 했다는 조세프와 그의 여행 파트너 포는 온라인을 통해 만났다고 한다. 당연히 연인 사이일 줄 알았는데. 여행 동행자를 구하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베트남에서 처음 만났단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 다양한 만큼, 여행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아직 저녁 8시다. 조세프와 포가 동행하는 가이드 람이, 적어도 밤 9시까지는 자지 않고 시간을 때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너무 일찍 자 버리면 새벽 3시쯤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 다음날 산행 컨디션에 무리가 오기 때문이라고. 담배를 뻐금대며 여러 가지 충고를 해 주는 믿음직스러운 람의 모습에 반했는지, 포가 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늘까지는 평탄한 길이었지만, 내일은 아주 힘들 거야. 적어도 아침 7시에는 출발해야 해."

남은 피로를 마저 풀려는지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를 더 태우는 람. 이때다 싶은 포도 밖으로 나가 람의 담배 상대가 되어준다. 테이블에 남은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프랑스, 미국, 네팔 등. 온갖 국적의 카드게임으로 밤 10시까지의 시간을 꼬박 채웠다.

게르묵 가는길의 풍경
 게르묵 가는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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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묵 가는길의 풍경. 더위를 식히려는 마을 사람들의 물놀이.
 게르묵 가는길의 풍경. 더위를 식히려는 마을 사람들의 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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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히말라야에 와서 '삶의 여유'를 찾았다

"흠. 7시? 7시 즈음 슬슬 일어나서 8시쯤 출발해도 괜찮을 거야."

내 입에서 나올 법한 말 같지만, 더스틴의 말이다. 나와는 다르게 지각이라는 건 해 본 적 없으며 비행기라도 탈 때면 출국 4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가야 하는 더스틴이 산에 오니 달라졌다. 즐기러 온 히말라야라며. 목적지까지 못 가면 중간에서 멈추면 된다고. 삶의 여유를 즐기라고 설법하는 스님이라도 되는 양 중얼댄다.

늦게 일어나는 거라면 자신 있는 나다. 7시에 일어나 밖으로 나와보니, 이미 갈 채비를 다 마친 트레커 무리가 문밖을 나서고 있다. 계획대로 8시에 나가면 되지 뭐.

"준비 다 됐어? 이제 슬슬 가보자."


널브러진 옷가지를 챙겨 배낭을 꾸린 더스틴. 나는 더스틴의 옆에 잠자코 앉았다.

"…. 지금 못 가."
"왜? 아무리 천천히 가도 지금은 가야 하는데? 숙소에 우리밖에 안 남았어."


게르묵까지는 강물이 계속 이어진다.
 게르묵까지는 강물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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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묘미란 이런 것이다. 모든 일은 최악의 상황에 벌어진다. 한 달 반 동안 소식이 없던 생리가 히말라야 중턱에서 불쑥 시작되었다. 그제 강 마을에서 창문을 열고 자는 바람에 감기도 걸렸겠다. 어디 이참에, 최악의 저혈압 컨디션으로 히말라야를 정복해 보자.

즐기러 온 산이니 천천히 가자던 더스틴도, 오전 9시가 지나자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숙소에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안 남았다. 숙소 일꾼들은 오늘 올 손님을 받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주인장도 우리가 얼른 떠나줬으면 하는 눈초리다.

침대에 들러붙은 몸이 떨어지질 않는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한탄과 짜증이 섞여 기분도 최악이다. 마음을 고쳐 먹자. 헨드릭의 긍정을 생각해 보자. 아직 히말라야에 온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았다. 고산에서 이런 몸을 이끌고 올라가는 것보다 몸이 산에 적응하고 있는 지금 조금 더 고생하는 게 낫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잘된 일이다. 이것은 행운이다. 넌 행운아라고, 이 자식아. 일어나라 일어나. 일어나! 축 늘어진 몸은 아무 반응이 없다. 이토록 약하고 게으르게. 200km 길이의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해낼 수 있을까.

텅 빈 산장의 벽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켰다.

이토록 느리고 약하고 게으르게. 200km 거리의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해낼 수 있을까.
 이토록 느리고 약하고 게으르게. 200km 거리의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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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나푸르나 ,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드, #안나푸르나 트레킹,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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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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