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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작은 그 북카페가 아니었다. 도쿄를 몇 번 방문하는 동안 이상하게 롯폰기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고, 혼자 여행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곳도 이상하게 롯폰기였다. 미술관에서 혼자 빈둥거리길 좋아하는 나였기에 당연히 롯폰기가 생각난 것인지도 몰랐다. 여긴 그 유명한 모리미술관과 국립신미술관이 있는 동네였다.

도쿄에서 만난 풍경-이지영
 도쿄에서 만난 풍경-이지영
ⓒ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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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과 가까운 모리 미술관부터 탐험을 시작했다. 현대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된 모리미술관은 꽤 흥미로웠다. 내 심장을 두드리는 작품도 분명 있었을 거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평소 기억력 하나는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자부해왔는데 어떤 작품들이 있었는지, 실내의 풍경은 어땠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모리미술관 밖 복도에서(복도가 통유리로 돼 있었다) 봤던 도쿄 시내의 풍경들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풍경들을 보면서 떠올렸던 얼굴, 감정, 생각들은 모리미술관을 떠올릴 때마다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오른다. 모리미술관은 내게 그런 장소다. 그림보다 더 멋진 풍경들이 그림이 된 곳.

그리고서 밥집을 찾아 헤매다 나는 북카페를 발견했다. 모리미술관은 롯폰기 힐즈의 랜드마크인 모리타워에 자리 잡고 있고, 모리타워 옆에는 극장과 쇼핑 센터가 같이 있었다. '스프스톡도쿄'라는 체인점에서 간단하게 스프와 밥이 세트로 나오는 메뉴로 요기를 하고 아까 돌아다니다 발견한 커피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들이 모여 있는 구석에 갑자기 '짠~'하고 나타났던 커피집. 한쪽에는 "나 북카페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고판 책들이 진열돼 있고, 와인색과 나무색으로 꾸며진 인테리어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여기에 앉아서 글을 쓰면 몇 달 동안 막혀있던 소설도 줄줄 써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여행하는 동안 매일 여기로 출근하자고. 그리고 오후에는 주변 동네를 어슬렁 걸어보자고. 처음 내가 계획했던 여행과는 좀 달랐지만...뭐 어떠랴. 이게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인걸. 누구 눈치 안보고 마음대로 일정을 수정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종업원도 역시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이상하게 여행을 많이 다녔어도 계산대 앞에만 서면 떨린다.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내가 원하는 물건을 제대로 줄까? 메뉴판의 적혀있는 가격과 다르진 않겠지? 쓸데없는 걱정들이 그 짧은 시간 스쳐지나 간다. 다행히 종업원이 내 영어를 알아듣고, 시원한 카페라떼를 내왔다.

역시 내 소설은 다음날부터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왕가위 감독은 시나리오를 미리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어떤 공간에 가면 그 공간에서 일어났을 법한 사건들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홍콩의 후미진 골목에서 '화양연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그것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이어붙여 나갔다고 한다. 어떤 아파트에서는 '중경삼림'의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아파트를 몰래 청소하는 장면을 떠올것이다. 나도 그 북카페에 앉아 막혀있던, 남녀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을 그려나갔다. 그동안 그렇게 쓰려고 해도 써지지 않던 문장들이 줄줄 써지던지... 새로운 경험이었다. 시원한 라떼와 함께 소설에 푹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 이젠 일어날 시간이었다.

도쿄에서 만난 풍경-이지영
 도쿄에서 만난 풍경-이지영
ⓒ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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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폰기 힐즈 주변에는 모리미술관 못지않게 유명한 미술관이 또 있다. 국립신미술관. 마침 여기선 '인상파 화가전'이 한창이다. 롯폰기에서 미술관까지 가는 길에는 골목골목 주택가가 모여있다. 조용한 골목길을 걷고 있자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우리 집은 항상 골목길 어딘가에 있었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하루라는 여행을 마치고, 내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간다는 안심과 안도. 그리운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곤 했다.

어디선가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나지막한 건물 1층에서 댄스 강습이 한창이다. 의상으로 보아하니 밸리 댄스 같은데, 열린 문틈으로 수강생들의 땀방울과 밝은 표정이 보인다. 몇분 동안 서서 구경하던 나는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웃어주는 그녀에게 나도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렇게 우리 동네인 것 마냥 걷다가 일본에 아주 많이 살고 있다는(일본에서는 길조로 여긴다는) 까마귀 한 마리와도 마주쳤다. 이렇게 가까이서 까마귀를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 아이의 '울트라 블랙' 의상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래서 까마귀군!' 까마귀와 이별할 무렵 미술관이 나타났다. 건축가가 한껏 멋을 부려 지은 건물, 주변에 조성해놓은 쌈지 공원들. 역시 미술관다웠다.

덧붙이는 글 | 이지영: 에세이 <당신이 나를 부족하게 한다>, E-BOOK <파리세레나데>를 출간. 블로그 http;//blog.naver.com/klimt1862 운영, 자신의 경험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한 줄의 글로 정제되길 바라며, 오늘도 새로운 여행지를 꿈꾸고 있다.



태그:#도쿄, #일본, #롯본기, #여행,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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