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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고, 재난에 대처하는 컨트롤타워의 실상을 파헤친다
▲ <관저의 100시간> 표지 후쿠시마 원전사고, 재난에 대처하는 컨트롤타워의 실상을 파헤친다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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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과 추측은 배제했다. 나는 오로지 팩트로 말하겠다." (13쪽)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조명하는 가장 '핫'한 책이 나왔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 기무라 히데아키의 <관저의 100시간>.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믿기 힘든' 사실들이 그 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혼란과 공포 속에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고 가려내어 퍼즐을 맞추어보는 것만으로도 실체적인 진실에 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때로는 그 어떤 논평보다 팩트의 힘이 더 강력한 법이다. 마치 세월호 사고 당시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팩트 하나가 이 사건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관저의 100시간>은 그런 '팩트'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이 '핫'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팩트' 위력 보여준 책... '핫'할 수밖에

이 책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에서 거대 지진이 발생한 시간부터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사고대책통합본부가 생긴 직후인 15일 저녁까지의 '100시간'을 다룬다. 이를 위해 기무라 기자는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사고 대책 수습의 총 책임자 간 나오토 전 총리부터 정치인, 학자, 관료, 도쿄전력까지 수많은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는 "1백 시간 동안 일련의 작위와 부작위가 이어지면서 사상 초유의 사고는 더욱더 심각해졌다"며 "국가권력의 중추인 관저를 무대 삼아 시간대별로 서술함으로써 우리에게 남은 숙제를 확인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심각한 원전사고가 일어났을 때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지는 지진이 발생한 그날 그 시점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력 회사, 정치인, 관료, 학자, 노동조합, 그리고 언론 등 이른바 '철의 육각추'라고 할 만큼 굳건한 '원자력 마을'(국내에서는 '원전 마피아'로 통용되기도 한다)의 주민들은 '사고는 없다'고 적히 화려한 비단 깃발을 국민들 앞에 흔들며 안전 신화에 권위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3·11'이라는 현실 앞에 기는 처참히 꺾였다. 깃발은 비단이 아니라 거적 조각에 불과했다." (11~12쪽)

후쿠시마 사고는 어쩌면 일본 전체를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를 만큼 엄청난 사고였다. 사고 발생 초기부터 일본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현장의 정보는 제대로 취합되지 못해고 유관 기관들은 따로 놀았다. 사고 수습을 위한 지휘 계통을 단일화하고 정보를 통합하며 발빠른 대응책을 내놓아야 할 관저는 '멘붕'에 빠졌다. 원자로에 전원이 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급기야 '멜트다운'과 폭발이라는 최악의 위기로 치닫는 100시간 동안, 사태 수습의 최고 책임자인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상황이 어떠냐?"는 다급한 물음뿐이었다.

"거대한 격납 용기가 파열했을 때 '도쿄까지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있겠구나', '3천만명을 피난시켜야 하는구나' 하는 최악의 사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아야 할 텐데'하고 바랐습니다. 그 와중에 이른바 '최악의 시나리오'에 가까운 이야기가 나온 거죠.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소리였습니다. 사실상 일본을 포기한다는 얘기인데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간 나오토 총리 증언, 224쪽)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전문가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급기야 후쿠시마 원전의 운영 책임자인 도쿄전력이 원전포기와 전원철수를 선언해 버리고 총리가 이를 막기 위해 도쿄전력과 대치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간 총리는 "도망가려해 봐야 소용없다"며 "철수는 안 된다. 일본의 동쪽 반을 핵 폐기물로 만들 수는 없다. 사장 이하 60세 이상은 여기서 죽을 각오를 하라"(234쪽)고 다그친다.

'원전 르네상스' 벗어나지 못한 한국...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

당시 일본 정부는 수도권도 피난지역으로 지정하는 안까지 검토했으나 다행히 사용후연료는 폭발하지 않아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다. 자칫 일본의 사고가 세계의 위기로까지 번질 수 있는 상황을 가까스로 넘기자, 독일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원전의 사용을 줄이거나 가동중인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유독 '원전 르네상스'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만이 노후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신규 원전을 짓는 것으로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월성, 고리 원전 주변에서 후쿠시마 사고와 동일한 규모의 사고가 만약 발생한다면, 그 피해 정도와 영향은 후쿠시마 사고보다 몇 배, 혹은 몇 십 배 더 클 것으로 본다"며 "후쿠시마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 책을 쓴 기무라 기자의 결론은 이렇다.

"인간사회는 절대 원전 사고에 대응할 수 없다. 그저 농락당할 뿐이라는 교훈은 앞서 체르노빌 사고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이번 사고가 자신을 향한 경고일 수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은 채 냉담했다. 사고를 통해 일본 원전 관계자들의 수준이 낮다는 사실은 드러났다. 하지만 과연 다른 나라였다면 극복할 수 있었을까?" (286쪽)

책을 읽는 내내 후쿠시마와 세월호, 관저와 청와대가 오버랩됐다. 후쿠시마에도, 세월호에도 컨트롤타워는 없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재난을 만들어 낸 사유화된 권력의 실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컨트롤타워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실이 <관저의 100시간>이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이고도 두려운 '진실'이다.

덧붙이는 글 | <관저의 100시간>(기무라 히데아키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 2015.03. / 1만6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관저의 100시간 - 후쿠시마 원전 사고, 재난에 대처하는 컨트롤 타워의 실상을 파헤친다

기무라 히데아키 지음, 정문주 옮김, 후마니타스(2015)


태그:#후쿠시마, #핵 발전소, #고리 원전, #월성 1호기, #원전 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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