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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발리의 시골 정경 속으로 아내와 함께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나는 발리를 대표하는 여러 풍경사진들을 둘러보다가 해질녘 황금빛이 곱게 물들어가는 발리의 계단식 논을 발견하고 그 정경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 계단식 논을 찾아가는 시간도 일몰시간 바로 전으로 맞추었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이 뜨갈랄랑(Tegallalang) 계단식 논은 우리의 숙소가 있는 우붓(Ubud)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계단 논을 바라보는 좋은 위치에는 식당과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 뜨갈랄랑 계단 논을 바라보는 좋은 위치에는 식당과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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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중부 산악지대에서 벼를 재배하는 이 계단식 논을 서양 사람들은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라고 부른다. 야자수 아래, 물 위에서 햇빛을 가득 받고 자라는 작물이 서양인들의 시각에는 신기해 보였는지 '테라스'라는 아직 시적인 이름을 붙였다.

발리를 찾는 서양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 계단식 논이 발리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간직한 풍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논이 지천으로 보이는 한국에서 온 나와 아내에게 서양 사람들이 느끼는 것만큼의 신비함은 떨어지지만 야자수 아래에 각고의 노력으로 계단식 논을 만들어나간 발리인들의 생활은 경외감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태운 차가 한 언덕의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나와 아내는 "와!"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우리의 차 앞에는 인간이 가진 한 눈의 범위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넓은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테라스'에는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가득 스며들고 있었다.  햇살을 받고 있는 산비탈 전체가 촘촘한 논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마치 산 속에 몰래 감추어둔 비밀의 화원같이 보였다.

카메라 든 사람들이 우르르... 사진찍기 좋은 이곳

발리의 이국적 계단논 앞에서 서양 여행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뜨갈랄랑의 여행자 발리의 이국적 계단논 앞에서 서양 여행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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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언론 매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뽑은 해외의 사진 찍기 좋은 곳 탑(Top) 10에 포함될 정도로 사진 배경으로 훌륭한 곳이라는 명성이 허튼 말이 아니었다. 이곳은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갑자기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모이는 사진 촬영장으로 바뀌기도 한다.

뜨갈랄랑은 발리 현지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 뜨갈랄랑의 발리인 뜨갈랄랑은 발리 현지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여행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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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니 계단식 논을 바라다볼 수 있는 모든 위치에는 이런 경관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카페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계단식 논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카페가 들어서면서 뜨갈랄랑도 점점 관광지처럼 꾸며지고 있었다. 빼어난 조망권을 갖고 있을수록 카페의 장사 실적이 달라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전망이 좋은 곳에는 여지없이 카페가 들어서 있다.

여행자들은 카페에서 계단 논을 감상하며 음료수를 마신다.
▲ 뜨갈랄랑의 카페 여행자들은 카페에서 계단 논을 감상하며 음료수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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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논은 경사가 아주 급한 지역에 농사를 지으면서 만들어진 논의 형태이다. 이런 경사가 심한 계단식 논이 발리에 많은 것은 발리 섬 한가운데에 3000m가 넘는 고봉과 산악지대가 있고 그 주변은 대부분 경사진 비탈이기 때문이다.

발리는 섬의 규모에 비해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서 이러한 비탈에는 대부분 농경지가 만들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을 이루며 들어선 논을 다랑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다랑논 위에 야자수를 가져다 장식해 놓은 듯한 풍경이다. 하지만 논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아도 이곳은 정녕 아름다운 곳이다.

발리인들의 생명과 노동의 터전이었던 이 언덕은 이제 뛰어난 미감(美感)을 발산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발리인들의 일상이 빚어졌던 언덕이 이제는 서양인들을 불러들이는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분명 인간이 만든 작품을 보며 감탄하고 있지만 그 작품이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더욱 아름다운 것 같다.

계단식 논이 곡선을 이어가며 그리는 정경은 마치 한 설치 미술가가 언덕을 배경으로 큰 작품을 그려놓은 것 같다. 급경사 언덕의 계단 논이 그려내는 곡선은 유려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의 최고 경지 속에 있다.

농사만을 짓던 뜨깔랄랑이 '관광지'로 변하다

계단 논 사이의 작은 길에서 여행자들이 한적하게 산책하고 있다.
▲ 계단 논 산책 계단 논 사이의 작은 길에서 여행자들이 한적하게 산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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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 있는 언덕에서 보면 계단식 논으로 내려가는 작은 길 몇 갈래가 이어지고 있다. 자세히 보니 계단식 논의 가장 상층부에는 짚풀로 장식된 아주 작은 사원이 보인다. 열대의 태양 아래 일을 마친 농부들은 이곳에서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당시 농부들은 경사가 심한 계단논을 고개를 구부려가며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힘든 노동의 시간을 보낸 농부들은 이 작은 사원에서 힌두교의 신에게 짜낭(Canang) 바구니에 작은 꽃을 바치며 예를 올렸을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 계단식 논을 아름답기만 한 열대의 정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고된 농사일을 하는 농부의 치열된 삶이 이 계단논에 펼쳐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계단식 논이 발리 농부들의 땀의 결정체라는 시각으로 보면 더욱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뜨갈랄랑의 계단식 논은 얼핏 보면 누군가가 가지런히 빚어 놓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경사도 심한 곳에 논이 오밀조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큰 기계가 와서 언덕을 개간하고 층층이 개발을 해 놓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계단식 논의 곡선은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휘어진 곡선도 아니다. 산 언덕의 경사와 계곡의 자연환경을 따라 각각 질서를 가지고 정성을 들여 만들어졌다. 항상 물을 담아놓아야 하는 논의 특성 때문에 경사면을 따라 만들어진 배수로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서양 여행자들이 뜨갈랄랑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서양 여행자와 가이드 서양 여행자들이 뜨갈랄랑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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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아래에서 뜨거운 햇살아래 농사만을 짓던 뜨깔랄랑은 지금은 외국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관광지로 변했다. 관광지가 되면서 계단논을 바라보는 길 주변에는 상가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다. 가게들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발리의 전통의상과 민속품을 파는 가게들이 대부분이다.

예술의 도시, 우붓에서 가까운 탓에 목각 공예품들도 많이 팔리고 있다. 나는 발리인들이 논농사를 짓던 이곳이 관광지가 된 것은 단지 서양인들 눈에 비친 계단식 논이 신기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논을 보면서 발리의 옷을 사고 공예품을 산다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의 예술도시 우붓에서 가까운 뜨갈랄랑에서는 회화 작품도 많이 판다.
▲ 그림 가게 발리의 예술도시 우붓에서 가까운 뜨갈랄랑에서는 회화 작품도 많이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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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발리 친구, 아롬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뜨갈랄랑의 이야기는 웃기다 못해 깊게 생각을 해보게 하는 내용이었다.

"원래 뜨갈랄랑의 계단식 논은 실제로 발리 농부들이 고되게 농사를 짓던 땅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너무 많은 게 변했어요. 이곳이 관광지가 되면서 농부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며 생활하게 되었지요. 가게를 하는 편이 수익이 더 좋았거든요. 그러다보니 계단식 논에서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게 되었답니다. 웃기는 것은 계단식 논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 계단식 논은 지금 억지로 경작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이 가장 발리의 원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던 나에게는 의외의 말이었다. 분명 발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고 그 모습은 발리 사람들이 힘들여 농사 짓던 당시와 같지만, 이제는 관광지를 대표하는 논이 되어버린 것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계단식 논을 비껴가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논을 정녕 아름답다고 표현해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계단 논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 기념품 가게 계단 논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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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논 사이로 난 작은 길을 잠시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농부들은 보이지 않고 계단논의 한가함을 즐기는 여행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나와 아내는 언덕 위로 돌아와서 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았다. 논의 전망이 한 눈에 들어오는 카페였고 그 전망은 역시 시원했다.

논은 억지로 경작 중이고 이곳 사람들은 기념품을 팔아 살아간다.
▲ 기념품 가게와 논 논은 억지로 경작 중이고 이곳 사람들은 기념품을 팔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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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다랑논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자리는 대개 예약을 해야 하는 자리지만 지금 오후 늦은 시간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피곤해진 다리를 쉬며 주스 한 잔을 마셨다. 나는 아내와 휴식시간을 만끽했다. 가슴을 적시는 자몽 주스 한 모금 한 모금이 더위를 날려버렸다.

뜨갈랄랑의 계단식 논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가게들도 많이 들어서 있다.
▲ 옷가게 뜨갈랄랑의 계단식 논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가게들도 많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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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억지스러운 풍경이 되었다고 하지만 계단식 논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논을 바라보는 풍경이 이렇게 운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저 다랑논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도가 낮아진 해의 햇빛이 길게 여운을 남기며 다랑논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부니 논 위의 벼이삭이 출렁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400 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뜨갈랄랑, #계단식 논, #라이스 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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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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