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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대하다!". 이 말은 2007년에 개봉한 영화 <300>(잭 스나이더 감독, 제라드 버틀러 주연)을 보면 스파르타를 침략한 페르시아 군대의 황제 크세르크세스가 던지는 말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성서에 나오는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왕과 동일인물이라고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싸움밖에 모르는 야만인으로 비치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싫어했고 섬세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고증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실제로 관대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황제 크세르크세스와 스파르타군의 치열한 전투를 그린 영화. 제라드 버틀러 주연
▲ 영화 <300> 페르시아 군대의 황제 크세르크세스와 스파르타군의 치열한 전투를 그린 영화. 제라드 버틀러 주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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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하다'라는 뜻은 한국어 사전을 보면 ▲ ​마음이 넓고 남을 헤아리는 아량이 있음 ▲ 사람이 무엇에 향하는 마음이 너그럽고 크다 ▲ 죄나 허물 따위를 너그럽게 용서함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관용'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일까요?

관용이라는 의미 역시 '관대함'이라는 뜻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어학적 의미로는 ▲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다 등을 뜻합니다. 나를 넘어서 타인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다는 면에서는 관대함이나 관용이나 같은 의미로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승자만의 전리품?

그러나 관용을 베푸는 주체에 대해서는 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관대한 마음이나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곳이라면 경제적 차원이나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 사회가 실현되고 있는 곳임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 볼 것은 우리들이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나와 상대방의 차이를 무시하고서 말입니다.

첫째,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나보다 훨씬 나은 학력, 돈, 혹은 나와 반대되는 이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를 관용의 정신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둘째,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보다 가난하고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을 뿐더러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내게 악을 저질렀을 때,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내게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을 때는 '가진 놈이 더해!'라며 못난 내 인생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보다 여러모로 사회적 위치가 낮은 사람이 내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약간의 여유를 보입니다.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이죠. 물론 법의 판단에 맡겨 가차 없는 처벌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해자에게 용서를 베푸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나와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대립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관용의 정신이 발휘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회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관용이 만연한 사회는, 자신의 강력한 권력을 이루기 전까지 관용이란 없습니다. 나중에 비로소 확고한 권력 헤게모니를 구축하였을 때에는 관용을 베풂으로써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칼날을 뭉툭하게 만듭니다. 지배 논리가 작용하게 되는 거죠. 이럴 때 권력자의 관용은 약자나 비판자들에게 사회적 안정이라는 기대효과, 즉 심리적 보상을 던져줍니다.

관용은 가부장적 용어! 타인을 흡수하려는 욕망?

'관행에서 벗어난 소수파의 행동에 대해 지배자나 다수파의 문화가 자기들 마음대로 기꺼이 '관용한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관용의 행위는 자비로운 행위나 '은혜 베풀기'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위르겐 하버마스)

'관용은 늘 '최강자의 논거' 편에 있습니다. (중략) 주권은 오만하게 내려다보면서 타자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가 살아가게 내버려 두마. 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내 집에 네 자리를 마련해 두마. 그러나 이게 내 집이라는 건 잊지 마'(자크 데리다)(93쪽)

하버마스의 주장처럼 관용이라는 단어가 '은혜 베풀기'와 같은 가부장적인 용어이며 자신의 권력 안으로 타인을 흡수하려는 욕망으로 시행된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권력자의 욕망이 관용의 진정한 참뜻을 호도할 수 있다는 면에서 주의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울한 시대에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한 저자가 빠리에서 택시를 몰며 1995년 쓴 책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 암울한 시대에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한 저자가 빠리에서 택시를 몰며 1995년 쓴 책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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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가 쓴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보면 프랑스의 '똘레랑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냥 우리말로 번역하여 '관용'이라 표기하면 될 것을 굳이 똘레랑스라 말합니다. 이 이유에 대해 네덜란드의 언론인 헨드릭 빌럼 판 론(1882~1944) 이 쓴 <똘레랑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김화숙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앙가주망'을 이제 더 이상 굳이 앙가주망이라 표기하지 않고 '실천'이나 '참여'라는 말로 표현하듯이 똘레랑스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언젠가는 '관용'이란 말로 토착화되기를 바란다. 단어의 토착화란 결국 그 의미가 삶 속에 널리 퍼진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91쪽)

똘레랑스 역시 진정한 관용이 필요

똘레랑스란 외래어가 우리말로 명확한 뜻을 지닌 채 번역된다는 것은 이미 그 의미를 많은 국민들이 이해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단어에 대해 거부감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화숙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지적한계를 드러내며 던지는 '똘레랑스'란 말이 아직 유효하다면 대한민국은 똘레랑스라는 단어를 일상 언어로 인정할 만큼의 관용 정신이 가까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랑스의 똘레랑스 역시 보편적 내셔널리즘이란 비판이 만만치 않습니다. 한 예로, 이슬람 여성들이 착용하는 '히잡'의 착용 문제입니다. 프랑스에는 '공공장소 안 종교 상징물 착용 금지법'이 있습니다. 이 법이 논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 바로 '히잡'입니다.

'2004년 9월 법 제정 뒤 2005년 1월 말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히잡을 벗지 않아 퇴학당한 여학생은 43명인 것으로 집계됐다'(97쪽)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을 거치며 탄생한 프랑스의 똘레랑스가 국제적으로 이런 논란에 휘말린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이 법은 영국이나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등장한 '다문화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의 독특한 내셔널리즘의 표현입니다. 프랑스의 내셔널리즘은 '보편적으로 열려있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적인 것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이나 프랑스나 관용과 똘레랑스를 외치고 있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관용은 아직 요원한 것 같습니다.

관용이란 포용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관용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도 합니다. 강자의 논거로 이용되는 관용의 정신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자의 헤게모니마저 감싸 안을 수 있는 진정한 관용은 과연 어디에서 탄생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자크 데리다의 말을 되짚어 봅니다.

'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내 집에 네 자리를 마련해 두마. 그러나 이게 내 집이라는 건 잊지 마'.


세계 문화의 겉과 속 - 모든 문화에는 심리적 상흔과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12)


태그:#똘레랑스,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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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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