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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 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 6400여명, 교직원이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1980~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기자 말

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시행 이후 한국 사회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시작으로 민주화 열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단체도 여럿 탄생했다. 1988년에 접어들면서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학내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교수협의회'를 발족했다. 총장과 학장을 직선으로 선출하면서 부패한 사학과 마찰은 더욱 심화됐다.

'백파' 교수가 절대적으로 많았지만

전국 대학에 교수협의회가 속속 발족할 때 인천대 분위기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선인학원 설립자 백인엽을 추종하는 교수(이하 백파 교수)들이 교수협의회 출범을 준비했다. 백인엽이 관선이사장 체제에서 선임한 박재규 학장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88년 2학기가 되면서 본격화됐다.

한편으론 민주화를 갈망하는 교수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선인학원 초·중·고등학교 교사 채용까지 간섭한 백인엽이 교수 채용에도 간섭했기 때문에 백파 교수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1981년 관선이사 파견 시 김민하 학장에 의해 채용된 교수 40여명과 1987년 관선이사 파견으로 들어선 신능순 이사장체제에서 선임한 박재규 학장이 채용한 교수 30여명이 있었다. 여기에 양심적인 교수들이 가세하면서 교수협의회 구성이 본격화됐다.

이들은 1986년 휴교 조치 때 재단에 의해 '직권 면직' 처분을 받았다가 소송에서 이겨 복귀한 김주익 법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1988년 9월 8일 열린 교수협의회 창립총회에서 김 교수는 백파 교수를 누르고 회장으로 당선됐다.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학원 민주화투쟁에 교수들도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교수협의회는 특히 인천대가 종합대로 승격될 때를 대비해 총장과 단과대학장 후보를 교수협의회에서 직접 선출하게 회칙으로 명문화했다. 1988년 10월 29일 종합대 승격을 얻어내자, 교수협의회는 '총장 후보 선출 규정'을 마련하고 12월 19일 초대 총장 후보 선출을 위한 총회를 열었다. 교수협의회는 박재규 학장과 김주익 회장을 총장 후보로 추대했고, 백파 교수들도 후보로 등록해, 후보자는 5명이 됐다.

4차까지 가는 투표에서 김주익 교수와 박재규 학장이 각각 1순위와 2순위 후보로 선출됐다. 이사장은 박 학장을 초대 총장으로 임명했다. 교수들은 박 총장의 공약 사항에 기대를 걸었다. 그는 주요 보직 직선, 대학발전 10개년 계획 수립, 교권 확립을 위한 외부 간섭 배제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1980년대 인천대는 학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에 재원을 투자하지 않아 대학원 건물(좌측)이 수년째 방치됐다. 당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내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사진제공ㆍ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
 1980년대 인천대는 학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에 재원을 투자하지 않아 대학원 건물(좌측)이 수년째 방치됐다. 당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내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사진제공ㆍ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
ⓒ 한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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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학원 교사협의회도 결성

"고교 평준화 정책이 서울 다음 인천에 처음 도입된 1975년에 인화여고를 입학했다. 당시 운동장을 고르게 해야 한다며 돌을 줍기도 하고, 백인엽은 돌아다니며 학생 동원에 교사를 채근하고 발로 차기도 했다. 교무실과 교장실 외엔 어떤 교실에도 전등이 없었다. 해떨어지기 전에 집에 갈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화장실은 대소변 떨어지는 소리가 옷매무시를 고치고 나올 때나 들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전등은 당연히 없었다. 교육환경 바꾸겠다고 학교에 도전한 저를 포함한 5명은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박인옥 인천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

박 대표가 기억하듯이 선인학원의 초·중·고교에선 반교육적 행위가 30년 가까이 일상화됐다. 초·중·고교 교장이나 중간관리자들이 백인엽의 집에 불려가 '신년 하례식'을 하거나 백씨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가 빈번해졌다. 또한 학교 관리비 일부가 백인엽의 지시에 따라 학교 운영과는 관계없는 일에 유용되는 사례가 드러나기도 했다.

초·중·고교의 민주화 바람은 1987년 이후 교사를 중심으로 각자 소속한 학교 교육을 바로 세우려는 자각에서 비롯했다. 1987년 9월 25일 항도실업고에서 처음으로 교사협의회가 결성됐다. 이를 계기로 운봉공고·인화여고·선화여중·선인중·운산공고에도 교사협의회가 창립했다.

이어 1989년 3월 18일, 교사들은 재단의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를 결성했다. 인천대에서 열린 결성식엔 교사 200여 명이 모였다. 이 교사협의회에 6개 학교 교사협의회가 단체 가입했고, 교사협의회를 구성하지 못한 4개교에선 개인 자격으로 가입했다. 당시 선인학원의 중·고교 교사가 총670명 정도였는데, 이중 절반에 가까운 320명 정도가 회원으로 가입했다.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는 일선 학교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종합해 건의서를 작성했다. 이 건의문을 보면, 선인학원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수학여행은 반드시 한 장소(예, 고교 설악산, 중학교 속리산) 한 여관(예, 고교 진양모텔, 중학교 곡산여관)으로 재단 내 학교가 여행하는 것을 지양하고, 학생과 선생님들이 협의해 장소와 숙소를 정할 수 있어야함 ▲졸업앨범은 한 사진관에서 독점 제작하는 것을 지양하고, 편집은 졸업준비위원회에서 하며, 공개 입찰은 학교당국에서 실시해 제작함 ▲학생들의 건강(특히 호흡기 질환과 감기)과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교실 바닥 개선(일명 도기다시: 돌 따위의 표면을 갈아서 광택·무늬 등을 내는 것) ▲연수비 대통령령 규정대로 지급 ▲육성회비 공개적 운영 ▲학생 생활지도에 필요한 시내 직통전화 개통.

교사협의회는 이 건의서를 제출하고 이사장 면담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하지만 백인엽을 따른 이사장은 면담을 거부했다. 결국 교사협의회는 1989년 5월 20일, 당시로는 꽤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직분을 저버린 이사장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전교조 가입 여부 놓고 갈등하면서 교사협의회 해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가입 여부를 놓고 교사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면서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는 해체됐다. 1989년 6월 무렵이다.

전교조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기치로 세우고 참교육을 표방했다. 1988년 4월 4일 전교조 인천지부가 결성됐다. 하지만 당시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 가입교사들을 징계했다. 파면도 서슴지 않았다.

선인학원 교사협의회 안에선 전교조 가입 여부를 놓고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선인학원의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이냐, 나라 교육 전반 문제를 해결하려는 커다란 흐름에 동참할 것이냐를 놓고 맞선 것이다.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는 1989년 6월 22일 총회를 열고 전교조 가입 여부를 결정했다. 당시 집행부는 무리해서 전교조 가입건을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단위 학교 교사협의회 집행부가 교사들에게 불신임을 받아,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는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그래도 교사협의회의 탄생은 1991~1993년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 또한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시립화의 주요 동력이 됐다. 교사협의회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교사들은 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학교 정보를 교환하고 각 학교당국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또한 인천대 교수협의회와 학생회 집행부와도 정보를 공유했다.

이러던 중 1991년 4월 22일 '각서 파동'이 일어났다. 선인학원의 모든 학교 교사와 직원들에게 '각서' 용지가 배부됐고, 그날 중으로 즉시 제출하라는 지시가 시달됐다. 각서 내용은 이랬다.

'본인은 학교법인 선인학원에 근무하면서 취득한 모든 비밀을 철저히 보안 조치할 것이며, 만약 비밀을 누설하거나 이로 인해 학교법인 선인학원의 명예를 훼손한다든가, 손실을 초래 했을 경우엔 어떠한 처벌을 하여도 이의 없이 감수할 것을 각서합니다'

이것이 백인엽이 재단에 복귀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라 판단한 교사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재단은 결국 각서 제출을 취소했고, 이미 받은 각서는 폐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선인학원, #백인협, #전교조, #인천대학교, #비리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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