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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보성군청 열선루의 받침돌로 추정되는 석조유물. 보성군청 앞 마당에 전시돼 있다.
 정유재란 당시 보성군청 열선루의 받침돌로 추정되는 석조유물. 보성군청 앞 마당에 전시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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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보성군청 열선루에서 수군 철폐령이 담긴 선조의 유지를 받아든 날이 1597년 8월 15일(양력 9월 20일), 추석이었다. 이순신은 곧바로 유지를 갖고 온 선전관 박천봉에게 영의정 류성룡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박천봉은 "영의정은 경기지방으로 나가 순시중이었다"고 했다.

그 순간 이순신이 영의정 류성룡에 대해 물은 것은, 조정에 그가 있었다면 '수군 철폐령'이 결코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순신에게 류성룡은 절대적인 보호막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유지를 내린 날짜를 보니 8월 7일이었다. 돌이켜 보니 그날은 수군 재건을 위해 전라도 곳곳을 누비다가 석곡 강정에서 유숙하던 날이었다. 이순신은 이런 유지가 내려진 지도 모른 채 수군을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탈옥한 백범이 40여 일 머물렀던 집)

이순신 "수군 철폐한다면 적이 다행으로 여길 것입니다"

왜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며 모은 병사가 몇 명인데. 나를 믿고 따라준 군사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동안 전폭적으로 성원해 준 호남 백성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동안 확보한 군량미는 또 얼마인데.

지금까지 수군 재건을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붓을 들었다. 그리고 하얀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 나갔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군량미를 확보했던 조양창의 터. 보성군 조성면 고내마을에 있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군량미를 확보했던 조양창의 터. 보성군 조성면 고내마을에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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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에 큰 힘을 실어줬던 양산원의 집 터 앞에 복원된 오매정. 마을주민들이 오매정에서 쉬고 있다. 그 옆에는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에 큰 힘을 실어줬던 양산원의 집 터 앞에 복원된 오매정. 마을주민들이 오매정에서 쉬고 있다. 그 옆에는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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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해볼 만하옵니다. 만일 수군을 철폐한다면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적은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입니다. 신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로 요약되는 장계였다. 조선수군의 폐지에 반대한다는 답서였다. 육군에 의지해 싸우라는 어명에 따르지 않겠다는 반박의 글이었다. 이순신은 장계를 쓰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장계를 쓰면서 이순신은 죽음을 떠올렸다. 어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로 했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수군 철폐령을 철회하도록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렇게 백성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듬뿍 담겨 있었다. 곧 조선수군을 재건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장계를 썼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수군철폐령을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로 대표되는 장계를 썼던 보성군청 열선루. 고증을 거쳐 그려낸 조감도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수군철폐령을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로 대표되는 장계를 썼던 보성군청 열선루. 고증을 거쳐 그려낸 조감도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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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무호남 시무국가' 글귀와 이순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호남의 역할을 표현한 이순신의 글귀다. 해남 명량대첩기념관에서 찍은 것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글귀와 이순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호남의 역할을 표현한 이순신의 글귀다. 해남 명량대첩기념관에서 찍은 것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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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던 이순신

하지만 이순신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명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괴로웠다. 고뇌도 깊어졌다.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군관들도 다가와 위로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이순신은 그날 밤을 지새우며 장수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평소의 주량을 훌쩍 뛰어넘은 술이었지만 취하지도 않았다. 비 갠 뒤 떠오른 보름달이 수루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순신은 수군 철폐령이 내려진 위기의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8월 16일 날이 밝자 이순신은 간밤의 일은 잊고, 곧바로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해안으로 이동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순신은 황대중과 김억추, 조팽년을 불렀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양곡 100석을 배에 싣고 진도로 옮겨놓도록 했다. 황대중은 진주에서부터 순천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순신을 보좌하며 흩어진 군사들을 모았던 군관이다. 이순신과 삶과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한 사이였다.

굴암으로 떠난 보성군수와 군관들이 거기에 있던 관원들을 데리고 왔다. 이순신은 보성군청의 무기고도 점검했다. 무기창고에 남아있던 무기를 모두 꺼내 말 4마리에 가득 실었다.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는 열선루의 석조유물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수군철폐령을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의 장계를 썼던 열선루의 주춧돌들이다.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는 열선루의 석조유물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수군철폐령을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의 장계를 썼던 열선루의 주춧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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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선루와 보성읍성 터의 석조유물을 설명하는 안내판. 보성군청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열선루와 보성읍성 터의 석조유물을 설명하는 안내판. 보성군청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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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이순신에게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왔다. 임금이 있는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박천봉의 손에는 이순신이 전날 밤 써준 장계가 들려져 있었다. 이순신은 전날 찾아온 어사 임몽정과 나주목사에게도 자신의 조선수군 재건 의지를 다시 한 번 밝혔다. 이어 안중묵을 만나 왜군을 궤멸시킬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날 오후 궁장 지이와 태귀생, 선의, 대남이 돌아왔다. 김희방, 김붕만도 뒤따라 왔다. 이들은 수군에게 필요한 개인 무기인 활을 만들어 줄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궁장들에게 천리를 갈 활을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굴암으로 떠난 보성군수와 군관들이 거기에 있던 박사명과 관원들을 데리고 왔다. 수군 철폐령이 내려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수군 재건을 위한 병참활동이 이순신의 구상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는 정유재란 당시 보성읍성과 열선루의 석조유물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에서 중요한 유물들이다.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는 정유재란 당시 보성읍성과 열선루의 석조유물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에서 중요한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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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보성읍성과 열선루에 쓰인 주춧돌들.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수군철폐령을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 장계를 썼던 당시 열선루가 있었던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다.
 정유재란 당시 보성읍성과 열선루에 쓰인 주춧돌들.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수군철폐령을 받고 '금신전선 상유십이' 장계를 썼던 당시 열선루가 있었던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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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한편으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전령을 보냈다. 배설에게는 남은 전선을 이끌고 군학마을의 군영구미(현 보성군 회천면)로 들어오도록 했다. 이순신이 배설에게 전선을 이끌고 해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은 바다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전라도 내륙에서 병력과 군기를 확보하고, 연해안에서 군량을 확보하는 이순신의 전략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도열시키고 군기를 점검했다.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시각, 호남의 보루나 다름없었던 남원성이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8월 17일 보성읍성을 나서 남쪽의 해안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백사정이 있는 명교마을과 군영구미 군학마을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보성읍성과 열선루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들. 현재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다.
 정유재란 당시 보성읍성과 열선루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들. 현재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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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9월 15일, 8월 22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열선루, #이순신, #금신전선 상유십이, #조선수군재건, #수군철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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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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