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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나무 낙엽에 앉은 이슬
▲ 계수나무와 이슬 계수나무 낙엽에 앉은 이슬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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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을이 제법 깊다. 한 주 사이에 도시 근교의 산들이 알록달록 단풍색으로 부드러워졌다. 이른 아침, 숲길을 걷다가 계수나무 아래에 수북하게 떨어진 낙엽을 본다. 노랗게 남은 계수나무의 단풍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땅에 떨어진 흙빛을 닮은 단풍의 빛깔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한다.

신기한 것은 계수나무 이파리에 내린 이슬이 계수나무 이파리에 남은 색소에 물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슬은 자기의 맑음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변의 빛깔들을 품을 뿐인데, 유독 계수나무 이파리에 앉은 이슬은 나뭇잎을 닮은 빛깔로 변해가는 것이다. 다른 나무나 이파리에 비해 색소가 풍부하거나 쉽게 분해되기 때문인가보다.

계수나무에 맺힌 이슬
▲ 이슬 계수나무에 맺힌 이슬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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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단순히 반영된 것이 아니라 계수나무 이파리에 앉은 이슬에는 은은하게 계수나무의 빛깔이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마리...'

계수나무 이파리에 앉은 이슬의 빛깔은 영락없는 수정과의 빛깔이다. 수정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계수나무의 껍질의 이름이 '계피'이기 때문이다. 계수나무는 껍질이나 이파리 할 것 없이 향기도 좋지만, 색깔이 잘 우러나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 순간에 흙빛으로 변한다. 계수나무 이파리는 노랗게 단풍이 들지만, 낙엽으로 떨어지면 그리 오래지 않아 흙빛으로 변한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

사실, 자연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으니 낙엽이 되었다고, 흙으로 돌아간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들레 씨앗에 맺힌 이슬
▲ 민들레와 이슬 민들레 씨앗에 맺힌 이슬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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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씨앗이 여전히 남아 가을의 아침을 장식하고 있다. 아침 햇살에 온 몸이 마르면 훨훨 날아 여행을 떠나고, 그 어딘가에서 자수성가할 것이다.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홀홀단신으로 떠나는 일, 그것도 두려운 일이겠지만,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 배워야 할 것들은 너무 많다. 자연은 어떠한 경우에도 견딜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포기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꽃 피우고 열매맺는 것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아도 그 모든 생명의 끈을 놓아야만 하는 순간이 있지만, 그 순간도 그는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이게 하는 것, 이것처럼 삶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행동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연의 행위를 보면서, 절대로 목숨은 스스로 끊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행여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고민한다면, 자연 앞에 서서 그들의 삶을 한 시간만이라도 묵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들의 삶의 단편 한 줄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절대로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씀바귀 이파리에 맺힌 이슬
▲ 씀바귀와 이슬 씀바귀 이파리에 맺힌 이슬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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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마다 이슬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다르다. 한로가 지난 후, 풀섶에 선다면 씀바귀 이파리처럼 반들반들한 이파리에서 동글동글 원형에 가까운 이슬 방울을 만날 수 있다. 씀바귀 이파리를 닮은 것들 중에는 매발톱도 있지만, 씀바귀보다 일찍 시드는 데다가 남은 이파리들로 억세져 씀바귀만 못하다.

늦여름, 가을 초입에 씀바귀는 다시 한번 새 순을 낸다. 그래서 이파리는 부드럽고, 부드럽고 매끈한 만큼 이슬을 송글송글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단풍이 든 딸기 이파리와 이슬
▲ 딸기이파리와 이슬 단풍이 든 딸기 이파리와 이슬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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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의 또다른 매력을 볼 수 있는 이파리는 솜털이 많은 이파리들이다. 딸기 이파리도 좋은 소재지만, 잔디나 벼과의 식물들의 솜털에 송글송글 맺힌 이슬 방울들은 마치 아기들이 가지고 노는 줄줄이 방울 딸랑이처럼 예쁘다.

가을에는 단풍도 낙엽도 아름답지만, 난 개인적으로 한로 이후에 내리는 이슬을 가장 좋아한다. 이 이슬은 첫 얼음이 어는 순간까지도 이어지는데, 밤새 내린 이슬이 살짝 얼었다가 햇살에 녹아내리는 모습도 절경이다.

도시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풍경이지만,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부지런만 떨면 요즘부터 겨울이 오기까지는 풀섶에서 이슬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참이슬에 취한 아침, 그러나 정신은 너무나 맑아진다. 세상살이가 번잡해서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할 것 같을 때에는 자연 앞에 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연에는 치유능력이 있으며, 그들이 간직한 자연의 속성으로 인해 맑은 에너지가 우리 몸에도 전달된다.

'피톤치드'니 우리 몸에 좋다고 알려진 자연의 향기(에너지)는 사실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사람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전염되는 것처럼, 자연의 품에 안기면 자연의 에너지가 전염되는 것이다. 자연의 품에 안기는 행위는 카타르시스(정화작용)를 위한 최선의 방법 중 하나다.

잔디에 맺힌 이슬, 거미줄도 이슬방울을 붙잡고 있다.
▲ 잔디와 이슬 잔디에 맺힌 이슬, 거미줄도 이슬방울을 붙잡고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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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세상사를 잠시 덮어두고 자연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느끼는 온갖 중압감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의도적으로 '벗어나야겠다'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세상 짐을 온전하게 '내려놓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아갈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을 더 명료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자연에는 왜곡이나 속임수나 거짓이 없다. 그런 자연을 닮으면, 자연스럽게 옳은 판단을 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겨울이 오기까지 이슬의 계절이다. 가끔은 소주 한 잔으로 우리의 삶을 툴툴 털어버리기도 하겠지만, 가끔은 참이슬에 취해보는 것도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이슬사진, #계수나무, #씀바귀,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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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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