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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육상에서의 병참활동을 끝내고 바다로 나아갔던 보성 군학마을 앞바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배를 타고 배설과 함께 있던 조선수군 함대 12척을 찾아 나섰다.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육상에서의 병참활동을 끝내고 바다로 나아갔던 보성 군학마을 앞바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배를 타고 배설과 함께 있던 조선수군 함대 12척을 찾아 나섰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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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철폐령에 맞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로 요약되는 장계를 쓴 이순신은 보성읍성을 나서 남쪽의 해안으로 향했다. 1597년 8월 17일(양력 9월 22일)이었다. 이순신의 다음 목적지는 백사정이 있는 명교마을과 군영구미 군학마을이었다.

지금의 보성읍에서 봇재를 거쳐 율포로 가는 길이다. 봇재를 넘기 전에 턱골재와 활성산성이 있다. 턱골재는 보성읍 봉산리와 쾌상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막는데 역할을 한 몽중산과 군사들이 진을 쳤던 진두골 사이다.

득량만을 내려다보는 활성산성은 길이 1600m의 토성이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년) 득량만 인접지역의 경비를 위해 쌓았다. 바다로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감시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경사가 급해 밖에서 성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없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이순신이 보성 열선루에서 수군철폐령에 맞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로 요약되는 장계를 썼다. 사진은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는 당시 열선루의 석조유물이다.
 이순신이 보성 열선루에서 수군철폐령에 맞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로 요약되는 장계를 썼다. 사진은 보성군청 앞마당에 전시돼 있는 당시 열선루의 석조유물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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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모래와 해송이 어우러진 율포해변. 호수처럼 잔잔한 득량만이 만든 해변이다. 보성읍에서 명교마을로 가는 길목, 차밭을 지나서 자리하고 있다.
 은빛 모래와 해송이 어우러진 율포해변. 호수처럼 잔잔한 득량만이 만든 해변이다. 보성읍에서 명교마을로 가는 길목, 차밭을 지나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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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산성을 지나면 봇재와 만나고 사방으로 차밭이 펼쳐진다. 차밭에서 해안으로 가면 율포해변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득량만이 만든 해변이다. 은빛 모래와 해송이 잘 어우러져 있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북적대는 곳이다.

비봉리 선소마을도 지척이다. 선소마을에는 당시 격군 등 200여 명과 전선, 식량 등이 비치돼 있었다. 이순신도 여기서 임진왜란 때 병졸을 훈련시키면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병선을 만들었다.

이순신 조선수군 재건로는 율포에서 장흥 방면, 회천수산물위판장을 지나 명교마을과 군학마을로 이어진다. 백사정이 있던 명교마을은 능주에 살던 이천 이씨가 임진왜란 때 가족을 잃고 피난 와 진주 강씨의 딸을 맞아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율포해변에서 가까운 비봉리 선소마을과 포구. 당시 격군 등 200여 명과 전선, 식량 등이 비치돼 있었던 곳이다.
 율포해변에서 가까운 비봉리 선소마을과 포구. 당시 격군 등 200여 명과 전선, 식량 등이 비치돼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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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포해변에서 명교마을로 가는 길에 만난 전어 선상 경매. 회천수산물위판장 앞에서다.
 율포해변에서 명교마을로 가는 길에 만난 전어 선상 경매. 회천수산물위판장 앞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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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교마을은 보성군 회천면 벽교1리에 속한다. 율포해변에서 도보로 20∼30분 거리다. 여기 백사정(白沙汀)은 예부터 우물과 식수가 풍부했다. 모래 해변도 넓어 군대가 유진하기에도 좋은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명교마을에 닿은 이순신은 백사정에서 먼 길을 달려온 말들을 쉬게 했다. 군사들도 해안가에서 물 한 모금씩 마시며 잠시 쉬었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도열시켜 다시 한 번 점검을 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의 함대가 기다리고 있을 군영구미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보성군청에서 배설에게 전령을 보내 전선을 이끌고 군영구미로 들어와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터였다(관련기사 : 어명 거역한 이순신 "죽기로 싸운다면...").

벼가 익어 누렇게 채색된 보성 명교마을의 가을 풍경. 이순신이 지나던 당시 백사정이 있었던 마을이다.
 벼가 익어 누렇게 채색된 보성 명교마을의 가을 풍경. 이순신이 지나던 당시 백사정이 있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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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명교마을 앞 해변. 이순신은 당시 군대가 머물기 좋은 이 해변에서 잠시 쉬면서 군사들을 점검했다.
 보성 명교마을 앞 해변. 이순신은 당시 군대가 머물기 좋은 이 해변에서 잠시 쉬면서 군사들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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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백사정 해안에서 점심을 먹고 군사들과 함께 내륙에서의 마지막 행선지가 될 군영구미 포구로 향했다. 군영구미는 지금의 회천면 전일2리 군학마을을 일컫는다. 1457년(세종 3년) 여기에 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 '군영구미(軍營仇未)'라 불렸다. 임진왜란 땐 '구미영성(龜尾營城)'이라 했다.

이순신이 해안길을 따라 도착한 군영구미는 적막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의 함대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이 수군들과 함께 타고 바다로 나가려고 했던 배였다. 배설이 이곳을 거치지 않고 회령포로 가버린 것이었다.

이순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배설로 인해서 당초 구상에 차질을 빚을 처지였다. 그때 장흥의 군량감관과 그 밑에서 일을 보던 색리가 수군의 생명줄과 다름없는 군량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조선수군 재건 당시 이순신도 보고 지났을 산자락. 명교마을에서 군학마을로 가는 길이다. 길섶에 노란 돼지감자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조선수군 재건 당시 이순신도 보고 지났을 산자락. 명교마을에서 군학마을로 가는 길이다. 길섶에 노란 돼지감자 꽃이 활짝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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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바다로 나아가는 배를 탔던 군학마을. 그 모습을 지켜봤을 수령 520년의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이순신이 바다로 나아가는 배를 탔던 군학마을. 그 모습을 지켜봤을 수령 520년의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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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이 약속을 어겼다고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이순신은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지역주민들의 배를 동원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이 마을 출신의 김명립과 해상의병 마하수에게 향선을 구해올 수 있는지 물었다. 김명립과 마하수가 바로 구해 오겠다며 어선이 모여 있는 포구로 달려갔다.

다음날(8월 18일) 아침, 안개 자욱한 바다의 물살을 헤치고 있는 어선들이 보였다. 한두 척이 아니었다. 해안에 가까이 온 배들을 확인하니 마하수, 백진남, 정명열, 김안방, 김성원, 문영개, 변홍원, 정경달 등이 타고 있었다. 동원돼 온 배가 10척이나 됐다.

이순신은 김명립과 마하수에게 큰 일을 해냈다며 치하했다. 배를 몰고 온 지역의 선주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역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 다 제치고 달려오는 호남 사람들이었다.

군학마을 앞바다 풍경. 이순신은 이 바다에서 김명립과 마하수 등이 구해 온 향선을 타고 조선수군 함대를 찾아 나섰다.
 군학마을 앞바다 풍경. 이순신은 이 바다에서 김명립과 마하수 등이 구해 온 향선을 타고 조선수군 함대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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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학마을에 서 있는 김명립의 유적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 바닷가 앞에 세워져 있다.
 군학마을에 서 있는 김명립의 유적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 바닷가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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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곧바로 전라도 내륙을 돌아다니며 확보한 병참물자를 배에 싣도록 했다. 병참물자를 나눠 싣고 줄지어 선 배들의 모습이 거북의 꼬리(龜尾)처럼 보였다. 이 일대에 쌓은 성의 이름이 '구미영성'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바다로 나아간 이순신은 배설과 함께 있는 조선수군의 함대를 찾아 나섰다.

이순신이 향선을 얻어 바다로 나아간 군학마을에는 김명립 장군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김명립 장군의 후손들도 마을에 살고 있다.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의 표지판도 군학마을 앞바다에 최근 세워졌다.

이순신이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봤을 고목도 마을회관 앞에 있다. 세월의 더께가 한눈에 묻어나는 이 고목은 520살 먹은 둘레 6.2m의 느티나무다. 당시 구미영성의 흔적도 바닷가 언덕에 일부 남아있다.

군학마을의 가을 풍경. 보성군 회천면 전일2리에 속하는 마을은 1457년(세종 3년) 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 군영구미(軍營仇未)라 불렸다.
 군학마을의 가을 풍경. 보성군 회천면 전일2리에 속하는 마을은 1457년(세종 3년) 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 군영구미(軍營仇未)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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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10월 10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명교마을, #군학마을, #이순신, #조선수군재건, #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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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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