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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자 장난기 넘치는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직서'

나는 여행기를 일부러 많이 접해보지 않았다. 특히 여행을 하기 전에는 여행에세이를 더욱 멀리하게 된다. 여행은 어떤 이야기보다 주관적인 것이고, 그만큼 나만의 특별한 여행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런 주관적인 느낌을 마구 적다보면 추억을 같이 만들었던, 또는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잘못 대변하기 쉬워 많은 여행기들이 손발을 오그라들게 한다고 믿곤했다.

재치있는 사직서가 떨어졌고 책에는 백수부부의 세계일주라는 말이 버젓이 쓰여있다. 그들은 사표를 쓰고 전셋집을 뺀 것으로 "우리는 다 걸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의 머리부분이 돈으로 채워진 데에 현실적이면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벽을 세워버린 안타까운 마음은 숨길 수 없다.

그래도 돈이라는 현실을 어느 여행자보다 꼼꼼히 준비했다. 여행을 "잠시멈춤" 이라고 표현했듯이("멈춤" 후의 계획이 다소 막연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미래를 염두해 둔 철저한 잠시멈춤이었던 것 같다.

동반자와의 세계배낭여행 예습서

<잠시멈춤, 세계여행> 겉표지.
 <잠시멈춤, 세계여행> 겉표지.
ⓒ 중앙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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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여행장소)가 넘겨질 때마다 나오는 '가계부점검'표는 이 책을 에세이와 여행정보책의 경계에 있게 만들어냈다. 사랑을 속삭이는 이야기 끝에 나오는 가격표는 이야기가 배로 느껴지기도 혹은 반감되기도 하지만 동반자와의 세계배낭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예습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즐겁다. 가야 할 곳에 얽매이지 않으며, 느긋한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자신들의 뚜렷한 여행목표가 있는 이 부부의 여행기는 마치 유럽을 일주일만에 종주해버리는 어느 여행자들과는 달라 더 즐겁다. 여행의 주관적인 느낌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여행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왜 우리는 여행을 하는가에 대한 부부 여행가가 줄 수 있는 다른 대답이었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과감하게 펼쳐놓은 것도, 기대와 걱정 그리고 여행이 끝나갈수록 서로에 대한, 세상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여행을 하지 않은 제 3자가 느끼기엔 충분하지 않겠지만)이 느껴진다.

사실 이 부부는 나에게는 두 번째 '부부 세계여행단'이다. 2010년에 나와 로마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가 있는데, 2년 전 결혼을 하고 결혼 1년이 되기 전 세계여행을 떠나 몇 달 전 일본으로 돌아간 친구다. 쿠로키 부부의 여행 끝에는 일본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포함하고있다.

세계여행 중에 독일과 미국에서 잠깐씩 얼굴을 봤었는데 다시금 일본에서 힘차게 생활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아보면 세계여행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다 걸었다"는 느낌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제 그만 멈추고 돌아와야 하는 여행일 수밖에 없으니... 아직까지 여행기를 끝내지 못한 이 쿠로키 부부 역시 작가 오빛나씨 부부와 같이 이런 자초지종의 여행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읽고 나면 그 뒤가 궁금해지는 여행책

머리말에 작가는 안타까움을 한가득 담았다. 책 분량을 줄이느라 혼쭐이 난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일주일에서 열흘이 되는 어떤 여행이 단 4면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 더 보고싶고 어떤 풀지않은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요소인 이 부분은 직접 경험해보라는 '잠시멈춤, 세계여행' 작가의 진심이 아닐까 싶다.

처음 책을 펴자마자 떨어진 사직서 양식을 읽어봤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2014년 9월 이 책과 비교해 한없이 짧은, 20일의 몽골여행이 생각났다. 나는 몽골로 떠나기 전 회사를 그만뒀고, 다녀와서는 한국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며 독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꿈을 꿨었다.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도 이제 혼자하는 배낭여행을 그만두고 지금의 여자친구와 세계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 여행기 제목의 '잠시멈춤'은 636일의 세계여행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궁금하신 분은 여행기의 또 다른 묘미, 여행 후의 이 부부의 삶을 들춰보시길...


잠시멈춤, 세계여행 - 함께여서 용감해진 자발적 백수 부부의 636일 간의 세계일주

오빛나 지음, 배용연 사진, 중앙M&B(2015)


태그:#여행, #세계여행, #부부여행, #잠시멈춤, #여행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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