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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신 대출(대리 출석) 좀 부탁~!!!"
                
점심시간을 넘어 오후 2시가 가까워오는 어느 봄날. 학교 정문에서 오십 미터 미만의 거리에 위치한 커피숍 이층에 앉아있다가 동기를 발견한 내가 쏜살같이 달려내려가 외쳤다.

"야~ 대출도 한두 번이지, 교수님이 지난번에 고개 들고 내 얼굴 확인했단 말야. 웬만하믄들어와라 응?"
"알았어, 술 깨면 다음 시간엔 들어갈게."

선생님이 보도 왼쪽으로 가라하면 오른쪽을 보는 법이 없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나였다. 그러던 나에게 대학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음대생이었던 나에게 대학생활은 고등학교 시절과 다름없이 매일매일이 연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으니. 늦게까지 연습이 끝나고 어슴프레한 저녁 놀이 지는 시간대에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학교앞을 지나다보면 늘 누군가 나를 불러세운다는 것. 

"어이 신입!... 밥 먹고 가."
"아…. 네…."

말이 밥이지 들어가보면 밥은 찾아볼 수 없고 주종불문의 병들이 이리저리 난무하는 선배들의 술자리였다. 처음엔 마셔보지 않은 술이라 맛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저 주는 대로 받아마시고 취하면 토악질 하는 수준이었다.

그랬던 내가 3년여의 참선과 수도 끝에 결국 '꼴통주당'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안 믿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별명의 체면을 유지하는 중이다.

죠다쉬 청바지, 이랜드 티셔츠, 프로스펙스 운동화...

<응답하라 1988>의 서울대생 성보라.
 <응답하라 1988>의 서울대생 성보라.
ⓒ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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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음대에 다니면서 '몰래바이트'로 용돈벌이가 쏠쏠했던 나는 또래에 비해 제법 씀씀이가 컸다. 그중 대부분의 돈을 술집에 갖다 바쳤다. 몇몇 대학이 몰려있는 시내 한복판의 학교 주변 환경은 나를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배움의 세계로 인도했다.

막걸리와 동동주의 시큼한 냄새와 어느 비위 약한 놈이 뱉어낸 토악질 냄새가 꾸역꾸역 밴 민속주점. 두 평짜리 가게 안에 서너 개 테이블을 붙여놓아 제법 가깝지 않은 사이라면 함께 들어가 앉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작은 술집에선 맛이 쓰기로 유명했던 진토닉을 새벽까지 마셔댔다.

남자친구라는 이름이 붙은 친구와 들러붙어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술을 마시고 새벽녘에 술집 근처 여인숙에 방을 잡고는 남녀 가리지 않고 혼숙을 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방을 하나 더 얻을 돈도 없어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또는 남자친구가 선물해준 14금 반지를 맡기고는 다음날 다시 찾기 위해 벌건 대낮에 여인숙에 갔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시니 당연히 강의에 늦거나 못 들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햇빛 내리쬐는 나른한 봄날 오후, 점심을 먹고 간단히 맥주 한잔 하자고 (사실, 그 시절 맥주는 25도짜리 역겨운 냄새 풍기는 소주에 비해 엄청 비쌌지만 내가 벌은 레슨비가 아까운지 모를 정도로 나는 철이 없었다) 카페에 들어앉아 몇 병을 마시다보면 어느새 수두룩히 쌓이는 병이 늘어갔다. 그러니 결국엔 지나는 동기를 불러 대출을 부탁하여야 했던 것.

얼마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비쌌던 죠다쉬 청바지, 한참 뜨기 시작했었던 이랜드 티셔츠, 칼라풀한 폴로 가디건을 받쳐입고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으면 내로라하는 대학생 패션의 완성이라 했었다, 그때는. 나 또한 기를 쓰고 갖춰 입으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용돈을 술집에 갖다바치다 보면 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많은 술집과 카페에서도 우리에게 최고 으뜸은 피아노가 홀 중앙에 있는 곳이었다. 학교 앞에는 간혹 홀 안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들이 있었다. 가끔씩 친구들하고 저녁을 먹은 후 맥주를 마시러 가거나 선배들의 졸업연주회 뒤풀이로 술을 마시러 가면 피아노가 우리를 반겼다.

자주 드나드는 음대생들이기에 주인 입장에선 공짜로 비싼 음악을 듣는 셈이었다. 매주 매주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소음악회 때마다 교수님들과 선배들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고행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곳이었다.

한창 유행하는 노래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신나게 불렀던 노래는 단연코 " 젊었다... 외로운 사람아, 너와 나는, 눈물을 흘리지 말자..."로 시작되는 학교의 응원가. 사실 나는 응원하러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 응원가만은 수도없이 많이 불러제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합창 때마다 피아노가 부서지도록 두들겨 대던 이도 나였다. 그 당시엔 '태양처럼 젊었다'라는 대사가 가슴 속에 와닿지도 않았는데 그저 한 잔 먹고 흥이 나면 홀이 떠나가도록 다른 손님들은 안중에도 없이 불러댔었다.

돌아갈 수 없어 더 아름다운 그때의 추억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류혜영 분)은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운동권 학생이다. '동지가'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민정당 당사 점거에 참여하기도 하는 그녀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당시 대학생을 대변한다.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류혜영 분)은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운동권 학생이다. '동지가'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민정당 당사 점거에 참여하기도 하는 그녀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당시 대학생을 대변한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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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이런 놀이를 좋아했는지, 나의 결혼식날. 나는 근무하던 직장이 위치한 광화문 변호사회관 골목 안의 한 카페를 아예 통채로 빌려 뒤풀이를 했다. 당연히, 곱게 화장하고 단아한 새색시인 내가 피아노를 두들겨대고 말이다. 대학 4년 내내 나와 함께 불려졌었던 나의 애창곡, 그룹 해바라기의 노래 <갈 수 없는 나라>를 불렀다.

그날 밤 우리는 2차로 북악터널 근처의 어느 호텔방을 신방으로 잡았는데 옆방엔 절친들을 재우려 예약했었다. 결국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나를 포함해 여자들이 한 방 그리고 옆방엔 내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신랑과 그 절친들이 자고 있었다. 그 노래를 부르고 그리 정신줄 놓도록 취하며 놀았던 나는 일주일 만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내 인생이 어떻게 엮이는지도 모르고 때때옷 입고 새신랑 대신 친구들 손을 맞잡고 신나게 먹고 놀던 나는 어느새 오십대 중늙은이 아줌마가 되었다.

여전히 꼴통주당 체면은 지키지만, 다시 똑같은 환경이 주어지고 자리가 마련된다 하더라도 다시는 그렇게 신나게 놀지 못할 것 같다. 체력이 달리는 것도 물론이지만, 반백의 머리에 주름 자글한 아줌마가 피아노 차지하고 앉아 두들겨대면서 악을 쓴다면 경찰이 오지 않은 게 다행이지 누가 가만히 두겠는가. 무례하고 버릇없어도 이해해주는 단골주점의 사장님이 있었고 든든한 선배들이 늘 우리보다 앞서 자리를 마련했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교수님들은 가끔씩 우리를 근처 삼겹살집에 불러 배불리 먹여주시면서 자신들의 유학 시절 배고팠던 기억을 무용담처럼 얘기해주시곤 했었다. 교수님들의 그런 이야기에 우리는 배가 고프더라도 유학할 수 있음 좋겠단 바람들을 가졌었다.

지금이야 스펙을 쌓기 위해 어학연수나 외국유학 혹은 인턴 경험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세상이 되었지만 내가 어린 시절엔 여전히 유학 가는 친구를 부러워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어려운 유학 시절을 거쳐 유명한 연주가가 되고 저명한 교수님들이 되고 혹은 유학지에서 공부는 안 하고 딴짓하다가(?) 짝을 만나 그곳 낯선 땅의 이민자가 되고 혹은 나같이 벌컥 벌컥 술만 마시면서 겉멋이 들어 얼래벌래 미국으로 시집 가서 딴엔 실용음악을 배우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다가 엄청난 현실과의 괴리감에 박살난 친구도 있다.

이젠 너무, 아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에,  IT혁명의 도움으로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의 SNS가 아니고선 죽을 때까지 얼굴 한 번 마주치기 어려운 친구들을 그리워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추억이지 싶다.

오늘도 나는 몇 줄 안 되는 이 글을 쓰는 핑계로 이제는 많이 순해지고 역겨운 냄새도 다 없어져, 심지어는 과일맛까지 나온다는 소주, 그중에서도 가장 쓴 오리지날 빨강 라벨의 소주를 들이킨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해 잠들기 전 장성한 두 아들들에게 엄마가 먹던 상을 치워달란 의미로 소리친다.

"아들들아, 오늘 엄마 대출 부탁해!!!"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피아노, #소주, #주당,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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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세상구경과 집밥사이에서 아슬아슬 작두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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