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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년전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한 남자가 일어섰다. 물론 주변에 개화파 조직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1881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바람앞에 등불처럼 흔들렸던 조선을 바꾸고자 일어섰던 김옥균은 3일천하로 그 꿈은 끝나 버렸다. 2012년 안철수는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선언하고 책도 출간하였다.

그 후로 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사회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여전히 야권은 통합하지 못했고 결국 안철수는 탈당을 선언했다. 정당정치를 믿고 싶었다는 안철수는 과연 돈키호테같은 캐릭터인가? 아니면 세상을 정말 바꾸고 싶었던 사람일까.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1호로 지정된 김옥균묘
▲ 김옥균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1호로 지정된 김옥균묘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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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30여년전 김옥균은 안철수와 달랐던 것은 실패할망정 과감히 행동했다. 결국 그의 혁신에 기반한 혁명은 실패했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강화도령이 왕으로 옹립된지 2년만인 1851년에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난 김옥균은 7살에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자랐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의 신문물을 보고 감탄한 김옥균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호조참판등을 역임하며 개화파의 확산에 힘을 쓰는 과정에서 조선이 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김옥균 무덤 앞에 있는 비석
▲ 김옥균 비 김옥균 무덤 앞에 있는 비석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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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선진국 초입에서 주저앉을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을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정치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그런 안개속에서 갈길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여당을 견제해야할 제1야당의 중심인물인 문재인과 안철수는 이제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어느 정도 지적·정치적 경험은 획득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선 역시 서양세력을 힘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자각을 했으나 이를 감정적으로 대하여 힘을 키우기보다 쇄국으로 일관하였다. 김옥균은 비전은 가지고 있었으나 국내외 역량을 동원할 수 있는 인재도 부족했고 세력도 부족했다. 일본의 속내도 모른채 궁여지책으로 일본의 도움을 바랬으나 결국 정치 주도 세력과의 협력에도 실패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갑신정변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결국 김옥균은 실패했다. 그럼 기존의 정치 질서를 바꾸고 공천제도를 손보려고 했던 안철수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성과물을 얻지 못하고 제 1야당을 나온 안철수는 자신의 말대로 혈혈단신이 되었다. 자신이 지지기반이 되어줄 세력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셈이다.

정치적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소수의 집권층에게 한정되어 있는 지금 상황에서 어떤 정책안과 혁신이 현실로 옮겨지려면 과감하게 움직여야 할때는 움직여야한다.


태그:#김옥균,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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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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