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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심수관
 15대 심수관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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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관요(窯)의 시작은 정유재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정유재란이었다. 1597년 8월 13일,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카, 가토 기요마사는 5만 6천여 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남원성을 공격한다. 당시 남원성을 지키는 병력은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를 합해도 고작 4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성이 함락되는 건 시간 문제였으리라.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일본 도자기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심당길(沈當吉)을 포함한 조선도공 80명이 사쓰마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시마즈번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그들을 사쓰마로 보냈다. 이후 심당길 등은 사쓰마 미야마 마을에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역사는 현재의 15대 심수관(沈壽官)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청송 심씨, 남원이 고향인 '심수관요'

2월 12일, 규슈올레를 걸으러 가는 길에 미야마 마을의 사쓰마야키에 들러 심수관요(窯)를 둘러보았고, 15대 심수관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5대 심수관의 설명에 따르면 심수관요의 전성기는 12대 심수관 때였다.

도자기로 세계에 이름을 날린 12대 심수관은 아들에게 '심수관'을 이어받으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13대 심수관이 나올 수 있었고 그 이름은 지금까지 세습되고 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심수관요의 정원에는 홍매화가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한국은 겨울인데, 제주보다 남쪽에 있는 가고시마는 완연하게 봄기운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한 15대 심수관은 한때 우리나라 여주에서 1년간 옹기 제작을 배운 적도 있단다. 그가 31살 때다. 그는 1999년에 15대 심수관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그의 다른 이름은 심일휘(沈一輝). 심수관요는 시조인 심당길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대가 끊긴 적이 없다고 한다.

15대 심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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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관요는 무엇보다도 조선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청송 심씨이며, 고향은 남원.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일본 사쓰마로 끌려왔으니 고향이 남원인 것은 당연하다. 15대 심수관은 '청송 명예군민 1호'이면서 '남원 명예군민'이기도 하다. 청송 심씨 제사에도 참여한다니, 여전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한국을 자주 찾고 있다고 했다.

"에도시대 초기부터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도자기를 중심으로 15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 자랑스럽다."

심수관요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15대 심수관은 이렇게 말했다. 정유재란으로 사쓰마로 끌려온 조선도공들은 사무라이 신분을 받았고, 시마즈 번주로부터 조선의 백자를 재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게 심수관요의 출발이면서 사쓰마야키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마즈 가문이 이 지역의 재료를 이용해서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만들라고 했다. 이 지역은 한국에서 많이 떨어져 있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17년 동안 노력해서 유약을 바른 흰 도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마즈 가문에서 굉장히 기뻐했고, 그때 처음으로 사쓰마라는 이름을 붙인 도자기(사쓰마야키)를 생산하게 됐다."

15대 심수관은 규슈올레를 알고 있었다. 심수관요를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을 통해서 규슈올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심수관요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은 한 달에 400~500명 정도. 심수관요 도자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값이 제법 비싼 편이다.

가고시마에 간다면 한 번쯤은 꼭 들러 보자. 의미도 있고, 자긍심도 느낄 수 있으리라.

15대까지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심수관요. 대대로 이어지는 가르침이나 가훈을 묻는 질문에 그는 오래 생각하더니 "자식을 도자기 만드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당길부터 시작돼 도자기를 만들면서 가문을 이어왔으니, 무엇보다 도자기를 만들어 가업을 이어나가는 것이 우선이었으리라. 그런 강한 의지가 심수관요를 버티게 하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다.

16대를 계승할 아들은 현재 24살이며,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15대 심수관은 13대 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설명한다.

"우리도 힘든 시대가 있었다. 열심히 했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다. 13대가 가장 힘들었는데, 전쟁 때였다. 일할 사람도 없고, 도자기도 팔리지 않아 수입이 없어서 어려웠던 때였다."

조선도공들이 흙 없는 미야마 마을에 정착하게 된 이유

15대 심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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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심수관이 세습을 한 것은 1906년이며, 1964년에 사망했다. 그가 살았던 때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침략 야욕을 거세게 드러낸 시기였다. 결국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전쟁을 끝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건 심수관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려운 시기를 잘 버티고 견디어 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리라.

"사쓰마 도기의 특징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초대 사쓰마야키부터 지금까지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다. 흰 도기를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하느냐, 그 시대의 풍미를 반영하면서 어떻게 기술을 넣느냐, 그래서 더 고가로 보이게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도공들이 사쓰마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의 미야마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 도착했던 곳은 구시키노의 시마비라였다. 그곳에서 살다가 미야마 마을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도공들은 고라이촌, 즉 고려촌이라는 마을에 모여 살았지만, 그곳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협력했던 조선인이 있어서 같이 살기를 거부하고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조선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원료인 흙이 없는데도 미야마 마을에 정착하게 된 배경이다. 흙은 이부스키에서 실어왔으나, 지금은 이부스키의 흙을 사용하지 않는다. 도기를 만드느라 흙을 너무 많이 파냈기 때문이다.

15대 심수관은 인터뷰를 마치고 살고 있는 집 일부를 공개했다. 주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문의 보물을 보여주었다. 심당길이 조선에서 올 때 가져온 망건과 그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도기였다.

세심한 손길로 가문의 보물을 보여주는 15대 심수관의 얼굴에는 온화한 빛이 가득했다.

만일 조선도공 심당길이 정유재란 때 사쓰마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본은 일찍이 도자기의 가치를 알아봤지만, 우리는 어땠나? 심수관요를 나오면서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15대 심수관이 심당길 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는 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15대 심수관이 심당길 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는 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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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심수관이 조선도공 심당길이 조선에서 가져온 망건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15대 심수관이 조선도공 심당길이 조선에서 가져온 망건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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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심수관, #조선도공, #정유재란, #심당길, #사쓰마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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