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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했다는 소리를 페이스북 계정 대문에 버젓이 걸어 놓은 사람들은 끝끝내 학벌에 저당 잡힌 삶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굳어지겠지. (중략) 자신이 몸담고 있거나 몸담았던 공간이 이 사회에서 어떤 맥락 속에서 자리하는지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중략) 학벌 자본을 성찰하지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슨 놈의 (중략) 공부한답시고 깨춤을 추는지..."

며칠 전 페이스북에는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이 떠돌았다. 평소 누리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헤비 유저'로 꼽혔던 박아무개씨가 쓴 전체공개 게시물이 파급력이 큰 SNS 특성상 널리 공유된 것이다. 이 글은 즉시 논란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이미 페이스북에 학력을 적어놓은 이들이 상당하거니와 비난의 대상이 된 '명문대생'의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극우식 주장" VS "못 할 말 아니다"

서울대 앞을 자주 지나치는 관악구 대학동 주민들은, 대학 서열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서울대 정문'을 해체하자고 주장해도 좋을까?
 서울대 앞을 자주 지나치는 관악구 대학동 주민들은, 대학 서열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서울대 정문'을 해체하자고 주장해도 좋을까?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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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림(경희대·철학 3)씨는 "(박씨 논리대로라면) 자기 사진을 SNS에 올려놓는 사람은 외모지상주의사회의 외모지상주의자인 거냐"고 반문했다. 고준우(고려대·사회학 3)씨도 "자신이 배운 (대학 서열의 문제점에 대한) 지식을 고작 사람들 걸러내는 일에 활용하는 사람은, 배움의 가치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김정일 개XX' 해보라는 극우의 태도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명예남성 개XX' 해보라는 게 페미니즘이 아니며, '명문대생 개XX' 해보라는 게 학벌주의 반대운동이 아니며, '자본가 개XX' 해보라는 게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며, '호모포비아 개XX' 해보라는 게 젠더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한 누리꾼들도 있었다. 안정훈(가명·학력 미기재)씨는 "학력을 적어놓지 않은 채, 타임라인에 글을 쓰면 '좋아요'가 5밖에 안 됐다. 하지만, '서울대' 대나무숲에 글을 올리니 '좋아요'와 '공유'가 대충봐도 대나무숲 평균을 웃돌긴 하더라"며 씁쓸해했다.

우주민(가명·학력 미기재)씨는 "한국 사회에 버젓이 존재하는 대학 서열과 차별 맥락을 보면 (박씨의 주장이) 못 할 말도 아니"라고 했다. 이어서 "명문대 간판을 내건다는 건, 인정하기 싫겠지만 차별을 지속하는데 기여하는 신호를 계속 주고받는 꼴이다. 명문대 이름을 썼다고 모두 차별에 동의하진 않는다며 '일반화하지 말라'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을 내 식대로 변형해 '당신 주변의 명문대생들도, 당신처럼 생각하게끔 변화시켜달라'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다"고 말했다.

논란이 불거진 뒤 박씨는 누리꾼들에게 미해결 숙제를 남긴 채, 페이스북을 떠났다. 이 숙제는 단순히 박씨 개인이 일으킨 물의로 볼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학력을 SNS에 밝혀서는 안 되는가'라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페이스북이 과연 '표준이력서'와 같을까?

'학력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박씨의 요구가 기업 입사, 대학 입시 등 서류전형을 겨냥했다면, 비교적 사회적 거부감 없이 수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보수 정권과 진보 정당 공히 '표준이력서' 사용을 정책 방향으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이력서란 학력, 외모, 성별, 나이 등을 기재하지 않는 이력서를 말한다.

표준이력서는 채용과정에서 성별과 나이 차별을 막고자, 주민등록 번호 맨 앞자리와 뒷자리 첫 번째를 'X'로 가린다. 또한 외모 차별을 막고자 사진을 없앴고 신체(키와 몸무게)에 관한 사항을 적는 칸이 없다. 결정적인 건, 대학 이름을 안 적는다. 대학 서열 때문에 생기는 차별을 막고자 최종학력과 전공만 적는 것이다.

2015년 25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고용노동부와 교육부, 한국경제신문 등 주최로 열린 '2015 대한민국 고졸인재 잡 콘서트'에서 취업 준비 중인 학생들이 현장 채용 면접을 받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2015년 25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고용노동부와 교육부, 한국경제신문 등 주최로 열린 '2015 대한민국 고졸인재 잡 콘서트'에서 취업 준비 중인 학생들이 현장 채용 면접을 받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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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현재 박근혜 정부까지 고용노동부는 기업이 입사 지원자들에게 표준이력서를 받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권장만 할 뿐 기업을 규제하진 않아 실제 채용 현장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허점 때문에 진보 정당 정의당은 20대 총선 공약 중 하나로 '표준이력서 의무화'를 내걸었다.

표준이력서의 취지는 기업이 채용과정에서 '현재의 직무 능력'을 보고 사람을 뽑게 하는 것이다. 학교 이름을 쓰지 않는 이유가 뭘까. 입시까지의 노력은 이미 학교를 선택할 때 보상 받는다. 그 이후의 노력은 다시 개인 차가 생길 수 있다. 학교 간판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 차별로 이어지는 '학력위계주의'의 폐해를 막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도달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기회의 평등'이다. 하지만 단순히 서류전형에 원서를 넣을 기회만 있다고 충분하진 않다. 부자 부모의 '물질 자본'은 사교육비라는 환전 방식을 통해, 자식의 '학력 자본'으로 세습될 수 있다.

경제적 불평등과 세습 사회에서 사람들의 출발선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결국 재분배를 통해 부(富)의 조건을 꾸준히 조정하지 않는 이상 '기회의 평등'은 불가능하므로, 우선 '조건의 평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상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지만, 현실의 세계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을 모른 체 할 수도 없다. 그래서 평등을 위한 시발점으로서 다양한 정책들이 필요하다. 고용할당제처럼 사회적 약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서 현재의 조건의 불평등을 상쇄해나가는 식이다. 이것을 '결과적 평등'이라 한다. 문제는 '페이스북 학력 프로필도 표준이력서처럼 결과적 평등이 필요한 곳이냐'다

파편이 엉뚱한 곳으로 튀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결과적 평등을 추구할 때 가장 많이 부딪히는 어려움은 '역차별 논란', 다시 말해 불평등을 상쇄하기 위한 정치적 힘조절에 실패할 경우다.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섬세하지 못하면, 파편이 엉뚱한 사람들을 향해 튄다. 이번 페이스북 '학력 프로필' 비난 사건이 그런 사례는 아닐까. 대학 서열이 분명 부당한 편견과 차별을 낳는 현실이 있으며, 이 맥락에서 각종 대학 이름들이 거론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 이름은 차별적 맥락 위에서 오간다→따라서 대학 이름은 차별의 원인이다→SNS에 대학 이름을 적으면 안 된다' 식의 논리는, 증상(차별의 말들)과 증상의 원인(차별의 구조, 개인의 심리)를 분리하지 못 하는 태도다. '서울대'와 '고졸'은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 'ㅅ+ㅓ+ㅇ+ㅜ+ㄹ+ㄷ+ㅐ'와 'ㄱ+ㅗ+ㅈ+ㅗ+ㄹ'이라는 글자의 조합에 불과하다.

다만, 왜 이런 글자 조합들이 우월감과 위축감을 느끼게끔 하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일종의 '신호'로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개인의 심리 차원에서 보면, 사회에 만연한 자기계발론이('노력하면 뭐든 보상받을 수 있다') 청년의 생각과 감정 흐름을 뒤틀어버려 '보상심리'라는 탁류로 치닫는 측면이 있다(관련 기사:  수시충, 분캠충, 편입충... '벌레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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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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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심리는 '무한경쟁'과 '경제적 불평등' 같은 구조적 배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심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증상만 보고 소위 '명문대생'들의 입을 틀어막자는 식의 처방을 내리는 게 과연 '작은 변화부터 이끌어내는 문화운동'으로 포장될 수 있을까? 1968년 '68혁명' 이후, 프랑스는 국립대의 이름을 '파리 1대학, 2대학, 3대학...'하는 식으로 바꿨다. 대학 서열을 없애려는 평준화 큰 흐름 속의 작은 조치 중 하나였다.

실제로 프랑스의 국립대들은 평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립대-국립대' '파리대-지방대' 불평등이 존재한다. 한편 그 옆 나라인 독일은 대학 이름을 그대로 남겨뒀고 똑같이 68혁명을 겪었지만, 대학 평준화는 더 잘 이루어진 편이다. 결국 대학 이름이 꼭 문제의 본질은 아니었다. 한데, 이 두 나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중·고등학교 때 철학과 작문을 가르치고, 대학 진학률이 10명 중 4명 꼴로 낮다(한국은 10명 중 7명 꼴). 또한 할아버지 세대부터 지금의 청년 세대까지 정치적 문제에 대한 토론과 시위가 활발하며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강한 시민들'의 사회라는 점이다. 두 나라의 시민들은 적어도 한국인보다는, '학력과 상관없이' 표현의 자유가 고양돼 있다.

SNS는 표현의 자유를 통해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대학 이름'이 우월감과 위축감을 불러일으키는 신호가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소위 '명문대생'들의 입을 틀어막는 조치까지 필요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외모 자본' 역시 남녀 공히 '취업 성형'의 방식을 거쳐 '물질 자본'과 맞교환이 이루어지고 격차가 생기므로 사진도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표현의 자유을 제한해(↓) 나의 상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높이기 이전에(↑), 모두의 표현의 자유가 고양될 수 있는 방향'부터' 찾아야 한다(↑).

교육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처럼 철학과 작문 교육을 필수적으로 제공해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능수능란하고 격의없이 말할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 최소한 다양하게 얽혀있는 문제들을 풀어나갈 시발점이 될 '강한 시민'을 탄생시키진 않을까. 이런 맥락들에 대한 고민만 충분하다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방법은 의회 안에서 이루어져도 좋고 분명한 물리력을 띤 거리에서의 집회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분명 도저히 고쳐쓰기 힘든 차별적인 말들, '김치녀' '맘충'과 같은 것들이 있고 이런 혐오성 발언들은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대학 이름들'은 독일처럼 고쳐 쓸 수 있고 개성도 드러낼 수 있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느낀다. 대학 이름들을 당장 지워버려 기만적인 평범 상태를 실현하자는 주장은, '결과적 평등'의 측면에서 봐도 철부지적 몽상에 가깝다.

그래서 여성학자 정희진씨도 출판 시장에서, 저서에 학력을 기꺼이 기재해놓는 건 아닐까. 언어는 사람들의 도구이다. 일부러 사람을 해치려고 만든 도구가 아닌 이상,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뺏지 말자. 차라리 모든 사람들이 자기 도구를 가질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결과적 평등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태그:#대학 순위, #이력서, #자기소개서, #페이스북,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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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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