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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말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나를 부른 관장님은 이렇게 운을 떼셨다. 기관 운영이 좋지 않은 상황을 이야기하고 내가 운영하고 있는 여러 음악프로그램을 거론하면서 몇몇 프로그램은 폐강하고, 따라서 그것을 관리하는 나의 현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다. 결정적인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아 그러면 제가 물러나야 하는 건가요?" 이렇게 묻고 싶은 말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래 주시면…" 하는 대답이 나올까봐서. 그래서 "제가 생각을 좀 해볼게요"라고 말하고 관장실을 나왔다. 나는 집에 돌아와 여행가방을 챙겨 언니가 사는 제주도로 향하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빠졌다.

확실한 것은 내 천직은 예술가이고, 선생이고, 직업은 기획자이고, 사회복지사이지만 예술가 활동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게다. 평생교육원, 복지관, 문화의집, 주민센터 등 어디를 가도 무료 문화예술프로그램이 있다. 그래서 전업 작가들은 예전처럼 개인서화실을 운영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문화공간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려면 다소 적더라도 고정수입이 크게 도움이 되고, 불규칙한 전업 작가 활동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나는 정년 때까지는 일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스스로 '절대 물러나지 말아야지'라고 상념을 정리한 뒤 집에 돌아왔다.

새로운 일터에서 새내기가 되다

다행히 내가 퇴직해야 하는 상황이 이런저런 경로로 전해지고 우여곡절 끝에 다리가 돼주는 사람도 생겨 일을 그만두기 전에 오라는 곳들이 생겨났다. 내가 상처받을까봐 어느 정도 이상의 어려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던 관장님도 반기셨다. 9년간의 일터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정들었던 곳에 사직원을 제출하는 한편, 새로 입사하는 기관에 낼 자기소개서도 함께 작성했다. 1월 초부터 새 일터에서 일해야 하는데, 30명의 직원 중 몇 명만 빼고 내 딸보다 어린 직원들이 대다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새내기는 어쨌든 새내기이니까, 새로운 행정 서식을 배우고 새로운 기관체계를 익혔다. 이제 100일이 다 돼간다.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서 20년간 강의했던 곳과 10년 가까이 강의했던 곳 두 군데를 정리해야 했다. 새로운 곳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기관이라 기관도 자리잡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필요했고, 나도 전심전력을 다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잘 까먹기 쉬운 나이에 접어든 자신을 더욱 담금질하고,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이전에 한 대학원 공부를 한 번 더하기로 했다. 퇴직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고, 내 자신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깨닫게 되고, 사회초년생의 초심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 같다.

청각장애인도 다양한 통역이 필요한데

며칠 전, 평소와 다름없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는 건물 유리창 청소를 하고 있었다. 유리창 저편에서 상사가 나를 향해 뭐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인사인 줄 알고 반갑다며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나 나를 향해 뭔가를 말하셨다. 입모양을 보니 그냥 인사가 아니었다.

"선생님! 뭐하세요. 얼른 회의실로 들어가세요!"

공지사항으로 전달된, 오전 8시 50분에 시작하기로한 외부 특강이 있었던 모양인데 난 몰랐던 게다. 이전 기관에서는 회의를 하면 항상 누군가 옆에서 중요한 공지사항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말들도 적어 필기 통역을 해줘 내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지화와 수화를 많이 사용한다. 회의 때 필기 통역을 해주는 직원이 따로 있진 않았다.

수화를 잘 몰라 답답해하는 나를 위해 필기통역을 자진해서 해주겠다는 센스있는 직원을 만났으나 조직 위계상, 또는 팀마다 순서대로 앉아야 하기 때문에, 문화팀인 나는 직업팀 직원 옆에 앉으면 안 된다고 해 필기 통역을 받을 수 없었다.

내 상사는 내 옆의 문화팀 직원들에게 "이 선생님께 잘 통역해주세요!"라고 지시했지만, 내 옆 20대 중반의 선생님 둘은 나름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주로 내가 묻는 것만 적어준다. 그리고 다음 회의가 되면 그 선생님들은 다른 일들을 하게 된다. 대신 내게 열심히 수화 통역을 해주는 선생님에겐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해서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이해한 척하곤 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아는 걸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물어보고, 상대가 공감해야 서로에게 최선인 것인데…. 지체장애인이란 말 속에는 전동휠체어보조기구가 필요한 사람과 지팡이만 짚을 필요가 있는 사람, 그리고 지팡이 없어도 손을 살짝 잡아줘야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청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청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 수화 통역을 하면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청각장애인도 비문해처럼 수화라는 언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도 있고, 나처럼 청각장애인들의 세상에서 따로 떨어져 일반인과 살아 수화에 서툴고 지화는 더더욱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때로는 서로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는 못 들어서 편할 때가 있고, 마음 아파하는 이야기는 잘 못 들어줘 미안하다. 하지만, 모두들 아는 이야기인데 내게만 절달되지 않을 때는 허허롭다. 그래도 나는 고맙다. 왜냐하면 듣지 못할 때보다 눈으로 마주치면서 알게되는 이야기가 더 많으니까. 할 줄 모르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고, 해야 하는 일들도 지천이기 때문에….

향기로 더불어 기뻐지는 시간들

이전에 일하던 곳들에서 오랫동안 정들었던 어르신들은 내가 일하는 시내에서 떨어진 외진 곳으로 와서 내가 새로 만든 통합서예 프로그램에 매주 참석하신다. 내게 배우기 위해서 전동휄체어를 한 시간 넘게 타고 와서 못 쓰는 손 대신 팔에 붓을 묶어서 한문을 쓰시는 분도 있다.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위해 일터 시간을 조절해서 오시는 분과 붓으로 입을 물고 한 점 한 점 농담을 마음에 찍어 그림을 그리는 분도 있다. 이분들을 보면 나는 얼마나 쉽게, 얼마나 사치스럽게 그동안 붓을 잡았는지 절로 반성하게 된다.

평생교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면서 단순히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배운 뒤에 사회에 참여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한방꽃차 소믈리에다. 운영비가 부족해서 현수막 대신 고운 한지에 직접 강좌글씨를 쓰고 개강했다.

개강날 꽃차협회에서 이렇게 셋팅을 해서 보여주었다
▲ 꽃차강좌 개설 개강날 꽃차협회에서 이렇게 셋팅을 해서 보여주었다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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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보지 못하는 친구는 향기만으로 기쁜 미소를 짓고,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친구는 한 팔만으로도 노란 생강나무꽃차를 덖으며 즐거움을 느낀다. 90분 수업을 하는데 드리는 강사비가 5만 원밖에 되지 않는데도 꽃차 강사 선생님은 다른 강사님들과 항상 함께 1시간 먼저 와서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도와가며 수업을 하신다.

꽃잎을 골라서 차례대로 덖기 시작하는 생강나무꽃차
▲ 생강나무꽃차 꽃잎을 골라서 차례대로 덖기 시작하는 생강나무꽃차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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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팬지꽃차를 만들어가는 모습
▲ 팬지꽃차 다양한 팬지꽃차를 만들어가는 모습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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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번이라고 세 번씩 세 차례 덖어 총 아홉 번을 덖어야 완성되는 한방꽃차 프로그램은 이제 개강해서 두 차례 진행됐다. 올해까지 서른 번을 시행할 예정인데 듣지 못하는 아가씨는 지난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더니 올해는 꽃차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하겠다고 열심이다. 향기로 더불어 성장해가는 젊은 삶에 거름이 되는 것 같아 뿌듯하다.

지난해 7월을 마지막으로 글을 올리고 아주 오랜만에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를 쓴다. 얼마나 오마이뉴스 쪽지가 도착했다. 문OO이라는 분인데, 한번씩 내 기사를 보며 힘이 났다는 분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글이 안 올라와서 궁급하다고 쪽지를 보내왔다. 그분께 인사를 보낸다.

"덕분에 저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요!"


태그:#서예가 이영미, #근원 이영미, #청각장애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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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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