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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만약을 생각해 본다.

세월호 참사 때 만약 선장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가습기 살균제 사건 때 만약 제조사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각종 사고 때마다 언급되는 무책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때로는 개인에게, 때로는 집단에게 겨누어진다.

무책임이 문제시 되는 일은 어떤 위치에 있는 자가 책임을 졌다면 최소한 피해를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돌발적인 사고 뿐만 아니라 예견된 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초기 대응미숙에 대해 역사 속 여러 사람의 이름을 소환하며 갑론을박을 펼치곤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전쟁에 속하며 수많은 판단착오와 대응미숙이 나오는 게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기록을 본 사람들은 '만약 초기에 어느 정도 막았다면......'이란 가정을 해보았을 것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조선시대, 7년 동안 전쟁을 겪었던 임진왜란을 살펴보면 그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은 무책임하게 상황을 방관하거나 회피했고 어떤 이는 책임을 넘어서 사명감을 가지고 상황을 대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이들 가운데 지금 거론할 인물은 경상좌병사였던 이각이다. 그는 임진왜란 초기 가장 큰 무책임함을 보이고도 의외로 그다지 이름이 자주 거론되지 않는 이다.

임진강을 건너온 경상좌병사

병사들을 이끌고 임진강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은 자신 앞으로 기어 오다시피 한 자를 보고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커다란 체격과 거친 수염은 자못 무인의 풍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걸친 옷가지에 상투는 죄다 흐트러져 있으며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 ~ 1592)이었다.

명색이 도원수였지만 김명원은 병서를 많이 읽었다 뿐이지 실제 전투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문관이었다. 게다가 한강전투에서 자신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왜군을 물리친 부원수 신각(申恪 ? ~ 1592)을 모함해 죽게 만든 용렬한 자이기도 했다.(단, 김명원은 도원수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는 전시행정관으로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정의 잘못된 인사가 가져온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한강 사수전에서 패한 김명원은 신각이 전선을 멋대로 이탈해 패했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 시각 신각은 해유령에서 왜군 70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김명원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승전한 신각을 처형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인다.

이러한 일로 조정의 신임을 잃은 김명원은 임진강 전선에서는 명목상 도원수였을 뿐 그 지휘를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나가는 재상에게 부여된 정2품 임시 벼슬) 한응인(1554 ~ 1614, 한응인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막 귀국한 중이었다)에게 거의 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 김명원이었지만 이각이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 김명원은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임진강은 경상좌병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어찌하여 경상좌병사가 임지를 버리고 이곳에 와 있는가!"

이각은 김명원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왜적이 강대하여 병사들은 흩어지고 이렇게 홀로 남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병사를 다시 모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고심 끝에 어가를 호위하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김명원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어가를 호위한다? 지켜야 할 곳조차 버리고 온 자네가 어가를 호위하러 여기까지 왔다? 하하하!"

이각은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명원은 손가락으로 이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가 도망함으로 인해 경상도가 순식간에 함몰되었는데 어찌 할 것이냐? 당장 죽어 마땅한 자로다!"

이각은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애원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대감의 종이라도 되겠소이다."

김명원은 혀를 차며 이각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외쳤다.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말은 못할지언정 구차히 목숨을 바라는 것이냐! 여봐라! 이자의 목을 당장 베어라!"

처음부터 어긋난 이각의 행보

아무리 군권의 최고 책임자인 도원수라 할지라도 하급 관리도 아닌 무관직 최고 품계인 종2품 병마절도사를 그 자리에서 참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은 조정으로 압송 후 처형하거나 보고를 받은 왕이 무직승지인 선전관을 보내어 처형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후에 아무도 도원수 김명원이 이각을 참수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방어체계가 급히 붕괴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각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각이 맡은 직책인 경상좌병사는 경상좌수사와 더불어 왜군이 쳐들어올 경우 최전선이었다. 나름대로 전쟁징후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한 조선 조정이었지만 예상 외로 엄청난 병력이 몰려오자 일선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과 지방관들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큰 전쟁이 난다고 해도 수천 명 병력이 해안가 정도를 건드릴 것이라 예상했지 한 번에 만 명 이상 대부대가 상륙해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도 모자라 이러한 대부대가 연이어 밀어닥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몰려온 왜군의 수많은 배를 처음 접한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은 배를 모아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박홍이 선택한 방식은 바다에서 싸우는 걸 포기한 채 동래성을 방비하는 것이었다.

이후 박홍은 수군을 이끌고 동래성 가까이 왔다가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후퇴하고 만다. 병력수의 차이로 유리할 것이 없는 전투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성을 증축했고 해자도 갖춘 동래성이 불과 하루 만에 무너진 것은 이각의 행보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왜군의 침입을 받을시 왜군과 접전하는 곳은 그 자리를 사수하고(부산진과 다대포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경상좌도의 병력은 동래로 집결하는 체제가 갖춰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부산진이 함락되는 동안 울산 병영에 주둔한 경상좌병사 이각이 이끄는 병력이 동래성으로 진군했다. 경상좌수사가 동래근처 해안가로 이동했으며 양산군수 조영규(?∼1592)와 울산 군수 이언성(?~?) 또한 동래성으로 합류한다.

편제상 경상좌병사가 울산 병영에서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2천이 조금 되지 않았다. 부산진의 경우 경상좌수사가 지휘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600명 남짓한 병력을 첨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병력은 왜군과 최초로 맞닥트렸기에 합류할 수 없었다. 이는 다대포 첨사의 병력 800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밖에 동래, 울산, 양산의 병력은 각각 천여 명 남짓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대응체계상 동래성에 들어서야 할 병력은 총 5천 남짓이었다. 그리고 이 병력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인 이각이었다.

울산 군수 이언함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동래성에 들어선 이각은 그 동안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동래성이 방비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각은 양산군수 조영규를 불렀다.

"공이 먼저 병사들을 끌고 성 밖으로 나가 복병(伏兵)으로 적의 예기(銳氣 : 날카로운 기운)를 꺾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

조영규는 휘하 병력 수백을 이끌고 동래성 밖 4km까지 진군한 후 매복을 실시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일본제 1군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병력과 뒤이어 상륙한 3만 대군이었다. 조영규가 거느린 병력으로 성밖에서 대군을 맞아 싸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영규는 퇴각하여 좌병사 이각과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보고했다.

"왜군의 병력이 엄청나게 많아 맞아 싸울 수가 없었소이다. 성을 지키면서 어서 한양으로 이 소식을 전해야 하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을 지킬 의지를 굳게 다졌지만 막상 병력을 총지휘해야 할 이각은 발뺌을 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성 안에서 이렇게 있다간 반드시 패할 것이오. 난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성 밖에서 응원하겠소. 부사께서는 성을 지키시오. 그렇게 안과 밖에서 왜군을 치면 승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송상현은 이각의 말이 어불성설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당장 있는 병력으로도 넓은 동래성을 지키기 어려운데 이를 반으로 나누면 더욱 지키기 어려운 건 자명한 일이었다.

"병력이 부족하오. 성 안에서 같이 지켜야 하오."
"그렇다면 내 휘하 병사들을 좀 남겨 두겠소."

송상현의 만류에도 이각은 군사 20명만 남기고 부하들을 이끌고서는 동래성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이각은 왜군의 모습조차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빠져나갔고 동래성은 왜군과의 접전 끝에 방어가 허술했던 동쪽 성벽부터 무너져 하루 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군수 조영규, 조방장 홍윤관이 전사하고 울산군수 이언함은 포로로 잡혔다. 성안에 있었던 동래성 주민들은 왜군들에게 모조리 학살당했다.

왜군과는 절대 마주치지 않겠다!

동래성이 함락됐지만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른 조선의 방어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후세 많은 비판을 받은 방어제제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는 문제없이 그 체제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각이 동래성 구원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간 사이, 경상좌병영 소속 13개 읍군병력 수천 명은 울산 병영으로 집결한 후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 동래 부근 소산(오늘날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까지 퇴각해 온 이각은 휘하 최고 군관에게 명령을 내린다.

"너는 지금부터 쉬지 말고 말을 달려 병영으로 돌아가 내 첩과 면포 천 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라."

군관은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

"그렇게 하면 지금 병영에 집결해 있을 병사들이 크게 동요할 것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각은 크게 화를 내며 칼을 빼어 들었다.

"명을 들을 것이냐 단칼에 죽을 것이냐!"

군관은 성 밖으로 나가 왜군과 싸우겠다는 이각의 말이 완전 거짓임을 깨닫고는 마주 언성을 높였다.

"명을 거두어 주소서!"

이각의 칼이 허공을 그리자 군관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른 병졸과 군관들이 그런 이각을 멍하니 보자 이각은 서둘러 말을 달려 홀로 병영으로 향했다. 이각이 이끌던 군사들은 그 길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도주할 생각만 하며 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각은 사람을 시켜 첩에게 먼저 달아나라고 일러둔 뒤 안동판관 윤안성(1542~1615)의 영접을 받으며 그에게 병사를 나눌 것을 제의했다. 윤안성은 의아해 했다.

"성을 버리고 진을 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게다가 병사를 나누자는 건 무슨 말입니까? 본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은 어디 있습니까?"

이각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재빨리 말했다.

"내가 거느린 정병들은 성 밖에서 응원할 요령으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거느린 석전군(石戰軍 : 투석전을 전문으로 하는 병사들)을 떼어 주시오. 그대는 다른 판관, 현령들과 성을 굳게 지키면 될 일이오."

이각이 구체적으로 나눌 병종까지 말하자 윤안성은 의심을 버리고 석전군을 떼어 주었다. 이각은 병사들에게 면포를 성 밖으로 날아 실어두라고 시켰다. 이각의 병사들이 물건을 나르느라 분주한 것을 본 윤안성은 의아해 하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병사들 중 하나가 외쳤다.

"면포를 옮겨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깜작 놀란 윤안성은 이각을 찾았다. 이각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미리 생각해 놓은 꾀가 있어 겉으로는 태연히 윤안성의 부름에 답했다.

"왜 그러시오?"

윤안성이 크게 상기된 표정으로 성 위에서 소리쳤다.

"면포는 왜 옮기시는 게요?"

이각은 태화강을 가리키며 윤안성을 위시한 성 위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 말에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며 어수선해졌고 이각은 말에 오르더니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이각이 애초부터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윤안성은 크게 노해 칼을 빼어들고 달아나는 이각의 뒤통수를 보고 소리쳤다.

"네 이놈! 네 놈의 목을 베어 군문에 걸 것이니라!"

윤안성은 당장 이각을 추격해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마저 성을 나가 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병사들의 분위기가 더욱 안 좋아질까 염려되었고 주장을 보필하는 장수인 아장(亞將) 원응두의 경우에는 겁을 먹고 달아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안성은 한숨을 쉬며 달아나는 이각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음날 경상좌병영은 제대로 응전도 하지 못한 채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각이 놓쳐버린 명예회복 기회

연이은 이각의 도주는 왜군의 기세를 올려 주었고 결국 초기 조선군의 방어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진 주요 이유였다.

당시 경상좌수사 박홍도 왜군의 기세에 눌려 수군을 거느리고 싸워볼 엄두를 내지 않았고 연이어 왜군을 피해 다닌 바가 있었다. 하지만 박홍은 파발을 보내 처음으로 한양에 왜군의 침입을 알린 바가 있었다. 즉, 최소한 해야 할 일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었던 것이다.

박홍은 임지를 버리고 평양까지 도망 왔으나 공으로서 죄를 씻으라는 명을 받고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운다. 그럼에도 몇몇 신하들은 박홍의 죄를 소급하여 엄벌에 처하라고 탄핵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박홍의 죄는 컸지만 평양까지 어가를 따라온 것으로 보아 자신의 뒤를 봐줄 사람을 찾아 목숨을 구하지 않았나 싶은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럼 역시 도주만을 일삼은 이각은 어땠을까. 난중잡록에는 이각이 비겁한 자였지만 일단 힘과 무예가 뛰어나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각과 박홍 외에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예상을 뛰어 넘는 왜군의 숫자에 제대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숨거나 도주한 장수와 관리들이 많았다. 그러나 초기에 왜군과 맞닥트린 관리 중 군사부문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각과 박홍이 그보다 낮은 직급이었던 정발이나 송상현처럼 목숨을 던져 적을 막아내려 했다면 왜군이 그렇게 쉽게 한양까지 북상할 수 있었을까?

어쨌건 몇몇 지방 관리들과 경상도를 지나 빠져나온 이각은 한강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후퇴하는 도원수 김명원 부대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임진강으로 향하는 길목인 혜음령에서 역시 임지를 벗어난 경상좌방어사 성응길과 함께 한양을 점령한 뒤 계속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각은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곧장 퇴각하여 임진강을 건너가 버린다.

이례적인 처형

결국 이각은 도원수 김명원에 의해 처형당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 김명원은 이각을 즉시 처형하기로 마음먹었을까?

임진왜란 초기, 당시 조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대규모 왜군의 공격으로 인해 도주하거나 대응을 하지 못한 경상도 쪽 관리들에 대해 조선조정은 대부분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이는 부원수 신각의 일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당시 신각은 왜군과의 접전 후 그 진격을 막고 적을 참살한 첫 승리라는 공을 세웠음에도 도원수 김명원의 보고만으로 처형을 당한 바였다. 반면 김명원은 그로 인해 조정의 신망을 잃고 임진강 방어전에서는 명목상으로 도원수 직책만 지닌 채 실권을 잃고 있었다.

이런 김명원이었기에 너무나도 전투를 기피하는 게 자명한 이각을 직접 처형하지 않으면 도원수로서 군율이 서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각의 일을 조정에 보고해 처형하게 한다면 앞서 신각의 일로 인해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김명원은 조선군의 사기와 실추당한 자신의 통솔력을 위해서 도주를 일삼고 비열한 행동까지 한 이각을 당장 처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만약 이각이 동래성에서 송상현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후속 군대가 속속 당도한 왜군을 막아내긴 어려웠을 테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제승방략에 따라 모인 조선군이 제때 한양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이일 등의 지휘하에 어느 정도 버텼을 가능성이 있었다.

남해를 지나 서해로 올라가려는 왜군은 당시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적 이순신을 만나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 초기대응에서 이각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그의 도주가 조선군을 패닉에 몰아넣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로 인해 결국 이각은 동래성순절도를 통해 그 추한 모습이 후대까지 영원히 남는 희대의 졸장으로 각인되고 만다.


태그:#임진왜란, #이각, #김명원, #제승방략, #동래성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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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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