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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평생을 토박이말만 부여잡고 사는 시조시인이 있다. 바로 일본 교토의 한밝 김리박 시인으로 최근 토박이말 시조시집 <울 핏줄은 진달래>를 도서출판 얼레빗을 통해서 펴냈다. 시조집을 손에 쥐자마자 나는 단숨에 읽어내려 갔고, 시조집 곳곳에 울컥하는 심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빛되찾은 그나날에 네 살의 아들놈은
미친 듯 울고계신 아버지를 쳐다보며
겨레의 참빛되찾은 그기쁨을 새겼도다 
- 첫째매 넷째가름 둘째쪼각 '아버님생각'

시인 나이 네 살, 그 천진난만한 어린 가슴에 '겨레의 참빛 되찾은 아버님의 그 기쁨'을 알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아니 알 길이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가 두 손에 쥐여주던 알사탕도 기억 못할 그 어린 나이에 시인의 조국은 광복을 맞았다. 얼마나 기뻤으면 아버지는 미친 듯 울고 계셨을까? 어린 마음이지만 그날의 아버지 모습은 일흔이 된 시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누에고치가 실을 뽑듯 풀려나온다.

만일 그해 시인이 열네 살만 되었어도 아니 스물넷만 되었어도 아버지의 그 미칠 듯이 기쁜 모습은 그렇게 오래 뇌리에 새겨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버지 나이와 멀어질수록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은 이해할 수 없는 골짜기요, 뫼며, 심연이다. 이해 할 수 없기에 신비하고 신비하기에 더욱 그리웠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강제연행으로 끌려와 35년간을 왜놈땅에서 살다 가셨다. 죽어서도 고향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는 시인의 가슴은 이미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져 있다.  

김리박 시인의 <울 핏줄은 진달래> 시조집 표지(한국어판-왼쪽), 일본어판
표지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울 핏줄은 진달래 김리박 시인의 <울 핏줄은 진달래> 시조집 표지(한국어판-왼쪽), 일본어판 표지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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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앙버티여 고장을 안찾았고
섬나라땅 흙속에 묻히시고 말았구려
끌려가 서른다섯해 남땅바람 쌀쌀하리.
- 둘째쪼각 '아버님생각' 2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시인은 소나무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푸른 삶을 다시 읊는다. 소나무처럼 꿋꿋이 살고자 다짐한다. 그것이 가당할지 모르지만 시인은 이를 악문다. 아버지 손에 끌려 다다른 땅, 이미 아버지는 고인이 되고 헛헛함만이 남은 땅에서 홀로 살아가야하는 시인의 삶은 팍팍하다. 문득 그것을 깨달을 때 소나무 뿌릴지언정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꽃부린 안고와도 길이길이 푸르르니
가담의 므리라 참선비는 아는거라
이몸도 소나무처럼 꿋꿋이 살리라. 
- 둘째매 첫째가름 '소나무'

소나무를 노래하는 시인은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낙담도 하지 않는다. 비록 그의 마음이 어둡고 스산할지라도 그는 내색하지 않는다. 그의 꿈이 하찮은 일신의 영화에 있지 않기에 그는 참을 수 있다. 그의 높은 꿈은 조국이며, 그의 궁극의 노래 역시 조국이다. 시인의 노래 속에는 '조국'이 빠진 적이 없다. 쪼개진 조국 말고 하나 된 조국 말이다.

으뜸아침 돋았으니 올해야 밝을건가
첫물떠서 세거룩께 올려드려 바쳐서
한겨레 묻바다 땅하나됨을 비나이다.
- 둘째매 첫째가름 '으뜸아침'

울핏줄은 진달래요 벚꽃은 아니라고
아들딸을 사랑담아 가르치고 키우셨고
남땅서 눈감으셨건만 죽살이는 참이었네.  
- 둘째매 넷째가름 '울핏줄은 진달래요'

울 핏줄은 진달래
▲ 진달래 울 핏줄은 진달래
ⓒ 이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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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면 고향 뜨고 아비는 술을 하고
▲ 고행생각 비오면 고향 뜨고 아비는 술을 하고
ⓒ 이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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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먼저 섬나라 천지를 뒤덮는 벚꽃 속에서도 시인의 가슴엔 겨레꽃 진달래가 피어난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아니라 후시미의 진달래라도 좋다. 진달래는 겨레의 핏줄이며 넋이요, 혼이다. 그것은 남몰래 감추고 보는 꽃이 아니고 아들딸에게 가르친 꽃이며 아버지가 시인에게 남긴 꽃이기도 하다.

'꽃내음 밀어오는 아름다운 봄밤에 / 한아름 진달래안아 갈쪽을 우러른다' 시인은 '넷째가름 어머님생각(1)'에서 진달래 한아름을 안고 갈쪽을 우러른다고 했다. 꽃멀미 나는 향기로운 봄밤에 고향 창원을 단걸음에 내딛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랴. 날틀을 잡아타면 한걸음에 내딛을 수 있는 고향이 아니던가! 잃어버린 고향 때문일까? 서러운 남의 땅 살이의 슬픔 때문일까? 유달리 시인의 노래 속에는 '봄'이 많이 등장한다.

봄철은 왔건만 차고진 꽃샘이니
어느때 꽃옷을 입어서 춤을출까
남나라 꽃놀이에 눈물이 돋는다. 
- 넷째가름 봄노래 '하늘'

남땅서 귀빠져도 사랑스런 다달들은
시나브로 맘깎여 믿고장은 멀어지니
죽어서 무엇이될까 한숨쉬는 이몸이라.
- 넷째가름 봄노래 '뒷핏줄'

얼, 겨레, 고향땅 말고 시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정서가 있으니 그것은 '통일'이다. 시인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날아다니는 '철새'마저도 부러워한다.

식히려 뒷쪽(북쪽) 가고 데우려 마쪽(남쪽) 가는 무대(조류)
▲ 무대 식히려 뒷쪽(북쪽) 가고 데우려 마쪽(남쪽) 가는 무대(조류)
ⓒ 이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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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없는 참아욱(무궁화) 나라
▲ 참아욱꽃 둘 없는 참아욱(무궁화) 나라
ⓒ 이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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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는 기쁠거야 믿고장 왔다갔다
겨레는 슬프네 못오가는 믿나라
빨리들 그날이와라 늙어가는 이몸이니. 
-둘째매 열한째가름 '철새'

못가는 된짝이요 못오는 마짝이니
몇해면 서른해를 날달이 섧고섧네.

어느때 된마함께 춤추고 노래할까
어느때 하늬새를 밭갈이 하올손지.

끊겨진 쇳길끝을 핏방울 뚜욱뚜욱.

기름진 띳줄땅은 풀떼만 우거지니
하늘의 소리개도 늙기만 하여서라.
- 셋째매 긴바닥쇠노래 '한길'

날짐승, 길짐승도 오고 가는 데 유독 사람만이 발길을 끊고 산 지 어언 반세기, 끊겨진 쇳길끝을 핏방울만이 뚜욱뚜욱 떨어지는 현실은 딱히 시인만이 서러운 게 아니다. 북에 가족을 둔 남쪽 사람이나 남에 가족을 둔 북쪽 사람이나 서럽고 아쉽고 형제자매가 그립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가족의 이산과 아픔을 노래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분단을 슬퍼하지 않는다.

다만 교토의 시인 한밝, 그 혼자서 이 무거운 침묵을 깰 뿐이다. 유독 그 혼자서 분단의 쓰라림을 읊고 있다. 아버지가 한스럽게 죽어간 땅, 그 고독한 땅 삼도에서 오늘도 그는 우주의 짓누르는 무게를 홀로 떠받치며 죽지 않고자 발버둥 친다. 시인이 모두 죽은 이 땅과 그 땅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칠 줄 모르는 샘물처럼 살아나는 것이리라.

"<울 핏줄은 진달래>는 나의 자랑이자 죽살이(인생)다"
[인터뷰] <울 핏줄은 진달래> 지은이 한밝 김리박


《울 핏줄은 진달래》 지은이 한밝 김리박
▲ 김리박 《울 핏줄은 진달래》 지은이 한밝 김리박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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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박이말 노래를 쓰려고 마음먹은 까닭은 무엇인가? 

"글월갈(문학)은 사람의 얼과 넋을 다루는 얼살이(문화)이며 얼살이는 참된 겨레말과 글로써 돋워지고 다듬어진다. 우리 한겨레의 얼과 뜻과 슬기와 마음도 오직 우리말과 거룩한 한글로 적어야만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어진다. 이런 까닭으로 바닥쇠 말(토박이말)로 글노래를 짓게 된 것이다."  

- 일본에서 조선의 정신, 우리말을 부여잡고 몸부림 쳤던 까닭은?
"내가 일본에 산다고 해서 그 뿌리가 한겨레인 것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한겨레답게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한겨레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조선의 정신을 잊지 말고 우리말과 거룩한 한글을 잊지 않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힘들었지만 조선의 정신과 우리말을 부여잡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 한국에서도 토박이말로 시를 짓는 사람이 많지 않다. 토박이말 시인으로 온전히 토박이말로 된 시조집을 내게 된 소감은 어떤가?
"내가 꼬리글에서도 밝혔지만 지난날 찍어낸 여러 글노래 날미(시집 책)들과 달리 <울 핏줄은 진달래>는 맘먹고 한 낱말도 한 마디도 되나라 꼴글말(한자말)을 쓰지 않고 오로지 바닥쇠말(토박이말)로만 펴내게 되었다. 바닥쇠말로만 노랫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한겨레의 얼 삶이며 아름다움이자 슬기이며 힘이다.

또 오늘날은 이른바 '세계화' 시대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참된 '세계화'는 참된 겨레얼을 지니고 바닥쇠 말(토박이말)로 스스로를 높이고 깊이고 넓히고 자랑할 얼넋이 묽고나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된 가락글(시)이나 글노래(시)는 마땅히 바닥쇠 말로 맞뚫고 있어야만 한다. 남 겨레의 말이나 글, 남나라의 말이나 글로서는 스스로의 겨레얼넋을 나타낼 수 없고 나타낸 것은 엉터리이자 우리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그러니 바닥쇠말로만 찍어낸 <울 핏줄은 진달래>는 나의 자랑이자 죽살이(인생)다."   

- 재일동포 3세들은 조선을 잊고 우리말을 잊으며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우리말과 거룩한 한글, 이것이 참사람의 얼이요 또한 우리 한겨레의 핏줄이다. 핏줄을 잃은 사람은 썩은 풀이요 구더기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죽살이를 끝까지 참사람으로 살아야만 뒷핏줄에 부끄럽지 않으며 또 그럴 때만이 일본 사람들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일이다."   

- 지금 한국은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말 쓰기에 핏발이 선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나?
"참얼은 하나 밖에 없다. 우리 한겨레의 얼은 단군얼이다. 이 단군얼을 곧게 곱게 바르게 지녀야만 온 누리를 떳떳하게 살 수 있으며 참된 사람이 된다. 그런데 단군얼은 바로 우리 바닥쇠 말(토박이말)과 거룩한 한글로 말하고 적을 때만이 지닐 수 있고 딴 나라 말과 글로는 끝내 지닐 수 없는 노릇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지켜내지 않고 딴 나라 말과 글을 즐겨 쓴다면 남나라 사람들은 우리를 업신여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울 핏줄은 진달래

김리박 지음, 얼레빗(2016)


태그:#울 핏줄은 진달래, #김리박, #한밝, #토박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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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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