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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없는 두발 짐승은 내가 못생겼다고 한다. 사실 못생겼다기보다는 사막에 최적화된 얼굴이다. 벌렁거리는 낮은 코, 튀어나온 입술, 눈 주위의 다크 서클, 이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었다.

다리와 발목이 긴 나는 몸통이 지표보다 10℃ 정도 서늘한 곳에 위치해서 지열을 피할 수 있다. 등의 혹에는 대용량 파워 젤(지방)을 지니고 있다. 목을 굽히고 있어 그렇지 쭉 펴면 기린만큼 길다. 나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머리는 늘 태양을 향한다. 머리로 그늘을 만들고 몸에 그늘을 제공한다. 털 없는 두발짐승은 인간이고 나는 낙타다.
나는 사막의 서바이버다 나는 물 없이도 일주일은 버틴다 ⓒ 김경수
나는 사막의 나침반이다 나 없이는 사막을 건널 수 없다 ⓒ 김경수
원래 내 머리에는 멋진 왕관이 있었다. 옛날에 부처님은 나에게 가장 작은 고환을 준 대신 가장 아름다운 뿔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슴이 찾아와 서역에서 동물잔치가 있다며 내 뿔을 빌려갔다.

잔치에서 만난 동물들이 사슴의 뿔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자 사슴의 마음이 변했다. 다음 날 돌려주기로 했던 강가에서 매일 기다렸지만 사슴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슴은 멋진 내 뿔을 갖게 되었고, 뿔을 잃은 나는 지금도 물을 한번 마시고 먼 산을 쳐다보기도 하고,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는 습성이 생겼다.

아주 옛날 내가 사는 사막은 공룡들의 놀이터였다. 잽싸게 달아다니는 설치류나 갑옷으로 무장한 느릿한 갑각류에 비하면 나는 사막의 공룡이다. 공룡은 멸종했지만 난 이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은 최고의 서바이버다.

이 척박한 땅에서 나는 생존을 위해 가시덤불과 씨앗 그리고 동물의 뼈와 가죽까지 생명체의 흔적은 모두 먹어치운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해진 것이다. 비록 내 멋진 왕관을 잃었지만 말이다.
사막은 나의 놀이터 나는 태양이 두렵지 않다 ⓒ 김경수
선수들의 안전은 나의 몫 타클라마칸사막에서 ⓒ 김경수
나는 전투에 임하면 시속 20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지만 좀처럼 달리지 않는다. 사막에서 만큼은 체온 상승과 수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히려 코끼리처럼 어슬렁 걷는다. 말이 빠르기는 하지만 나처럼 멀리까지 가지는 못한다.

가끔 주인님을 등에 태우기도 하고 수백 kg의 짐을 싣기도 한다. 실제로 나는 주인님을 모시고 2006년에 아타카마사막과 2009년에 나미브사막을 건넜다. 발톱이 죽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것 외에 심한 부상은 없었다. 내 주인님은 털 없는 두발짐승에 앞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다.

나는 콧물과 눈물도 재활용한다. 콧김으로는 거의 수분을 방출하지 않는다. 모래 바람이 불면 코를 닫으면 되고, 진한 눈썹으로 눈을 덮고도 멀리까지 볼 수 있다. 작은 귀엔 많은 털이 있어 모래바람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나는 낮에 열을 저장했다가 밤에 기온이 내려갈 때 수분을 아껴서 열을 식힌다. 몸이 일종의 지속가능한 신재생 에너지판이다. 추운 사막에서 새벽이 열리면 항온 동물인 주인님은 뼈 속까지 한기를 느끼지만 나는 체온이 34℃로 떨어져도 견딜 수 있다.
고비사막에서 나는 길을 잃고 물 없이 5시간을 버텼다 ⓒ 김경수
나도 가끔 달리고 싶다 호주에서 ⓒ 김경수
나도 몸 안의 수분이 20~25% 빠지면 위험해진다. 그런데 털 없는 두발짐승의 탈수율 한계는 10~12%이고 한 번의 수분섭취량도 나에 비해 1/50밖에 안 된다. 땡볕 아래 모래언덕에 오래 서 있으면 조난을 당하거나 쓰러질 확률이 높다.

2005년에 주인님을 모시고 고비사막을 건너다 길을 잃고 몇 시간을 헤맬 때는 물 없이 5시간을 버텼다. 주인님과 2013년에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정글을 달릴 때에는 녹색 전갈을 봤다. 사막에 사는 전갈을 정글에서 본 순간 혹시 녹색 낙타도 있을까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정글에서 녹색 낙타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도 때론 버거울 때가 있다. 주인님을 모시고 사막과 오지를 건널 땐 말하기도 힘들다. 모래언덕을 오를 땐 가쁜 숨을 몰아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여기서 끝인가.',  '이제는 자신이 없었다'고 되뇌지만 차마 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더 억울한 건 내가 메르스균을 인간에게 옮기는 원흉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메르스균의 숙주에 불과하다. 나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놈은 박쥐인데 말이다. 평소에는 온순해보여도 나를 귀찮게 하면 가끔 침을 찍찍 뱉거나 발로 차고 무는 건 사실이다.
나의 몸은 신재생 에너지판이다 이집트에서 ⓒ 김경수
가끔은 주인님을 등에 태우기도 한다 사하라사막에서 ⓒ 김경수
나는 지금도 가끔 주인님을 모시고 사막과 오지를 횡단하는 꿈을 꾼다. 네 다리를 공손히 꿇고 주인님을 등에 태우고 춤을 추고 싶다. 그곳에는 문명세계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진귀한 자연의 선물이 너무 많다.

공룡화석이나 멋진 수석 하나 발견하면 그걸 주인님에게 선물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든 나를 찾을 리도 없고 모든 것이 편해진 요즘 세상에 시간과 돈과 위험 부담까지 감수하며 사막을 찾아 나서는 두발짐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남들이 갖지 않은 두 가지 습성이 있다. 석양이 지는 황혼이 되면 내가 걸어온 길을 잠시 뒤돌아보고, 새벽녘에는 오늘 걸어가야 할 곳을 바라본다. 나의 이런 습성은 행복을 쫓아 살아가는 고뇌하는 털 없는 두발짐승의 모습일 수도 있다.

지나온 길을 잠시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살피는 것은 그들의 인생에도 꼭 필요한 자세이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방향을 분간할 수 없고, 허둥대며 뒤만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하루에 새벽과 밤이 있는 건 앞을 내다보고 뒤를 돌아보라는 자연의 섭리인 게 분명하다.
낙타의 꿈 가끔 주인님과 사막을 건너는 꿈을 꾼다 ⓒ 김경수
나는 주인님과 생사를 함께 했다 남미 아타카마사막에서 ⓒ 김경수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오지레이스,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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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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