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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반기문은 뉴욕에 차려진 빈소에서 약식 조문을 했다. 그는 어쨌든 유엔 사무총장이었고 당장 업무를 제쳐두고 귀국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이후 수차례 방한했지만 봉하 마을에 들르지 않다가 2011년 12월에야 들르면서 그 사실을 노무현 재단 측에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다. 이유는 석연치 않았다.

'공식 일정'이 아니니 비공개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반기문이 외교부 장관일 당시 직속상관이었고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줬다. 또한 봉하 마을 참배가 떳떳하지 못한 일도 아니다. 굳이 비공개로 할 이유는 없었다. 친노-친문 지지층이 이 행동을 납득하기 힘들어 하고 기자들의 이목을 피하고 일부러 노무현 색채를 지운 게 아니냐며 반기문을 '신의가 없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친노-친문 지지층은 알아야 한다. '신의' '배신자' 프레임에만 고착화되면 반기문에 대해 검증해야 할 다른 산적한 문제들이 뒷전으로 미뤄지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친노-친문 지지자들의 이너서클(내집단) 안에서나 인정받을 만한 것들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설득해야 할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성이 6가지 차원으로 발달하게끔 진화했으며, 집단마다 이 재료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도덕성이 나타난다고 한다.  배려/피해, 공정성/부정,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 자유/압제가 그것들이다. 반기문의 행보는 이중 '충성심/배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센서는 단결력 있고 평화로운 집단 구성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①집단에 대한 희생과 노력, 봉사, 충성심, 애국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인식한다. 반대로 ②배신자는 집단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며 격분을 드러내고 응징하게끔 기능한다. 반기문을 신의, 배신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②번에 불이 들어왔다. 문제는 반기문 지지층은 '반기문은 원래는 노무현의 사람'이라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며 ①번에 불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

정치권에서 반기문 대망론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2009~2010년 무렵이다. 문재인이 대선 주자로 부각되기 이전이라 야권(특히 박지원) 쪽에서도 잠시 영입 의사를 비췄다. 재밌는 것은 그럴 때마다 여권에서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분(반기문) 원래 보수 성향인데' 같은 반응이 종종 튀어나왔다는 것. 최근 친노-친문 인사들의 공격이 잦자 반기문의 측근 김숙 전 유엔 대사도 "공사를 구분해야 한다. 반 총장은 개인적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야당에 빚이 있다고 주장할 일은 아니다"라는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신의'가 몸통이 아니라, '노력주의'가 몸통이다

<그림1> 반기문 2기 연설문 전체 의미망(2012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396만3963자, 200자 원고지 1만6011매 분량, 장편소설 16권을 쌓아놓은 높이).
 <그림1> 반기문 2기 연설문 전체 의미망(2012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396만3963자, 200자 원고지 1만6011매 분량, 장편소설 16권을 쌓아놓은 높이).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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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반기문을 어떤 집단의 소속으로 봐야 할까? 필자는 그의 소속을 '노력주의/국가주의자들의 느슨한 연합'이라고 잠정 규정하고 있다. 반기문 지지층은 아직 조직화된 실체는 없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의 리더십을 소비해왔는지를 살펴보면 정말 그래 보인다. 반기문 대망론의 형성 시점은 자기계발, 멘토 담론이 대유행한 2000년대 후반이다. 출판 시장에서 전체 88%가 사실상 '자기계발'류인 반기문 서적들이 특수를 누렸을 때다.

이 책들의 대략적인 취지들은 비슷비슷하다. '반기문처럼 묵묵히 [노력]하면 성공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 노력과 보상이라는 전형적인 노력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부 언론은 이 분위기에 편승해 이상적인 멘토, 진정한 영웅, 파워엘리트, 대선주자 등 별별 여론 조사로 반기문 띄우기에 힘을 보탰다. 반기문 개인을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위 <그림1>은 필자가 지난 12월 30일 반기문의 사무총장 2기 임기 5년 치 연설문을 수집해 의미망 분석을 실시한 결과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관련 기사①'을 참조하면 되며, 여기서는 이 의미망에 '노력'이라는 키워드가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 정도만 짚고 넘어가자. 결국 반기문의 리더십은 '노력' 한 마디로 정리 가능하다.

그가 임기 내내 한 노력은 유엔 회원국들에게 '노력해달라'고 촉구하는 것이었으며, 노력 촉구야말로 그가 국제 문제 해결과 세계 평화를 달성하려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효과적인 방향이었는지를 떠나서 '충성심/배신' 센서가 발달한 사람들은 집단에 대한 희생과 노력, 봉사, 충성심, 애국심 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결국 무엇을 '집단'으로 인식할 것인지가 친노-친문 지지층과 반기문 지지층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낳는다.

[관련 기사 ①] 반기문, '우려'보다 위험한 '노오력왕'의 귀환

친노-친문 지지자들이 반기문을 '배신자'라고 공격하며 전력을 소비할 때, 반기문은 귀국 후 대중교통을 타거나 전통 시장을 방문하는 등 친 서민적인 제스쳐로 새로운 신의 관계를 형성하는 전략을 세울 것이다. 그런 그가 구조적 불평등보다는 노력주의와 성장에 집중하는 보수적 리더라는 진실을 평범한 사람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 할 것이다.
 친노-친문 지지자들이 반기문을 '배신자'라고 공격하며 전력을 소비할 때, 반기문은 귀국 후 대중교통을 타거나 전통 시장을 방문하는 등 친 서민적인 제스쳐로 새로운 신의 관계를 형성하는 전략을 세울 것이다. 그런 그가 구조적 불평등보다는 노력주의와 성장에 집중하는 보수적 리더라는 진실을 평범한 사람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 할 것이다.
ⓒ U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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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친문 지지층은 노무현-문재인을 축으로 결집하며 집단의식을 고취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문재인을 역대 대통령(혹은 대선주자 중) 몇 없는 민주적 인사로 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실현을 궁극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이런 인식도 결국에는 국가 차원까지 확장될 것이다. 구체적인 인물에 대한 애정을 경유해 추상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참여정부 장관 출신인 반기문이 문재인과 맞서는 것은 '배신'이다. 반면에, 반기문의 지지층의 집단 인식은 추상적인 차원부터 출발할 것 같다. 전통적 보수층은 "사람이 먼저"인 친노-친문 지지층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줄곧 여론조사 1위였던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의 지지율이 4.13 총선 패배 직후 단번에 빠졌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도저히 안 무너질 것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와르르 무너졌다. 보수에게는 국가가 있어야 사람도 있다. 누가 리더가 될 것인지는 부차적이다. 리더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갈아 끼우면 그만인 '부품'이다. 보수의 세계는 냉정하다. 반기문이 전두환부터 노무현까지 여러 정권에서 일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기문 지지층에게 반기문은 관료 출신이며 관료는 국가를 움직이는 부품이다.

부품 본연의 임무는 그저 "이 한 몸 불살라 노력"하는 것이며, "국민 없고 나라 없는데 정당 정파(派)가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반기문, 2016.12.20).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관료는 데마고그(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정치를 하면 대체로 나쁜 데마고그가 된다고 했다. 관료는 민주주의와 정치 세계의 기본 요소들인 "당파성, 투쟁, 열정, 분노와 편견 등'이 결핍돼 있어서 본성 상 불가피한 갈등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고로 반기문 지지층에게 반기문은 애초에 노무현 측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다. 게다가 이 부품은 그 성능에 은근히 기대를 품게 한다. 국제 무대로 진출(출세)해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적이 있고, 이제는 국가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겠다니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여기에 더해 엘리트 선망 의식이나 자수성가형 성공 신화에 대한 환상, 지역주의 등도 한몫하겠지만 말이다. 친노-친문 지지자들이 보수 앞에서 반기문을 '배신자'로 규정하는 것은 정말 소모적인 태도다. 반복되면 짜증만 유발할 것이다.

게다가 반기문의 예정된 귀국 후 일정 중에는 '봉하 마을' 방문이 있다. 배신자로 규정돼 잃을 게 없는 지금이야말로 참배를 하기에 자유롭다. 물론 그가 참배를 해도 친노-친문 지지층은 그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경우 반기문 지지층에게 '참배해도 난리냐 지겹다 지겨워' '저것 봐라 역시 저놈들은 노무현교 신도들이다'라는 반격의 명분을 주며 '신의' '배신' 프레임은 손익분기점을 넘길 것이다. 이제 이해하시겠는가.

친노-친문 지지층은 서부영화적 카리스마를 좀 탑재할 필요가 있다. 한마을에서(이슈에서) 정의 구현을 했으면 툭툭 털고 미련 없이 다음 마을로 떠나야지, 눌러 앉으면 어찌 확장하겠는가. 이제 반기문이 봉하 마을을 참배하면 그냥 '많이 늦었지만 그게 사람 도리죠' 정도로 점잖게 인정하고 말면 될 일이다. 한정된 시간과 감정 에너지는 효율적으로 소비되어야 한다.

재료를 잘 배합해 이성보다 직관에 호소해야

<그림2> 반기문 '북한' 관련 의미망. 7시 방향에 도움, 지원, 격려는 북한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 했다. 다시 말해 그의 대북정책은 다소 기름칠이 되어있을 망정 박근혜 정부와 실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그림2> 반기문 '북한' 관련 의미망. 7시 방향에 도움, 지원, 격려는 북한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 했다. 다시 말해 그의 대북정책은 다소 기름칠이 되어있을 망정 박근혜 정부와 실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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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친문 지지층은 반기문 지지자들을 설득하고 싶다면 새로운 전략을 재수립해야 할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란 직관이 먼저고 이성은 그것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기능을 주로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친노-친문 지지층의 발상으로는 아무리 이성적을 생각해봐도 반기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동료 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서로 도덕적 논리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올바름만을 갖고 상대방을 계몽하고 호통치는 태도로는 확장성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취할 수 있는 대안들이 몇 가지 있다.

현재 반기문을 가장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체면' 코드다. '최악의 유엔 사무총장' '유엔의 투명인간' 'B급 사무총장' 등 외신들의 평가는 한국인들의 (다소 유난한) 체면 의식을 건드린다(아래 관련기사② 참조).

이러한 평가의 원인을 더 추적하면 그가 시리아 내전 등의 문제에 무기력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만 시리아는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멀리 있는 나라라 이입 수준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반기문과 박근혜의 대북 정책이 마치 다른 것인 양 '통일 대통령'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하려는 시도를 무임승차로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림2>는 지난 1일 필자가 반기문의 연설문에서 '북한' 관련 담론 지도를 추출한 것이다.

보다시피 '도움' '지원' '격려'와 같은 단어들은 유기적인 연결을 맺지 못 하고 있다(아래 관련기사③ 참조). 대북 압박을 계속 해나가면서도, 인도적 문제로 물꼬를 터 가며 긴장을 완화하겠다는 반기문의 대북정책이 따져보면 정작 실천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10년간 뭐 하다가 이제 와 통일 대통령?' 같은 평가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것이다. 무자격자에 대한 분노는 인간의 도덕성 중 '공평성/부정' 센서를 자극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기폭제도 무자격자에 대한 분노다. '한국인을 부끄럽게 만든 사무총장' '대북정책 무임승차' '박연차 23만 달러 수수 의혹' '아들 취업 특혜 논란' '반기문 동생 부자 국제 사기극 논란' 등도 이와 비슷한 코드들이다. 만약 반기문이 숱한 의혹과 논란들로부터 살아남는다면, 친노-친문 지지층은 노력주의 지지층에게 왜 지금 사회가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사회인지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반기문의 경제 정책들을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노력주의 리더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음이 밝혀진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게 자동 증명되는 게 아니다. 설득의 과정에서 친노-친문 지지층도 반기문에게 배울 것은 있다. 한 명 한 명이 상대에게 호통치지 않고 친숙히 다가가는 외교관적 태도가 필요하며, 문재인 캠프도 의제 선점을 해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②] [10년치 외신 분석] 어디에도 없는 '반기문'
[관련기사 ③] '통일 대통령 반기문'.. 과대평가 혹은 기회주의


태그:#반기문, #유엔, #노무현, #문재인, #봉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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