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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자영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OECD 국가들보다 두 배나 많다고 합니다. 창업하고 3년 안에 닫는 가게는 47%, 10년 안에 닫는 가게는 75%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가게들, 10년 이상 된 우리 동네 가게를 찾아갑니다. - 기자 말

아버지 이명원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업사 일을 도왔다. 지금은 아들 이근수씨가 가게를 물려받아서 운영하고 있다.
▲ 65년째 성업 중인 가게 아버지 이명원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업사 일을 도왔다. 지금은 아들 이근수씨가 가게를 물려받아서 운영하고 있다.
ⓒ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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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생, 지업사와 출생년도가 같다

1952년, 남과 북이 휴전하려면 아직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갔다.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집도, 벽으로 칼바람이 불어오는 집도, 식구들과 등을 대고 누울 수만 있다면 '안온한 집'으로 쳤다. 그해에 이서복씨는 '대영지업사'를 열었다. 그의 가업을 잇게 된 둘째 아들 이명원씨도 1952년생, 지업사와 출생년도가 같다.  

"군산 북중학교 2학년 때, 학교 그만두고 지업사 일을 혔어요. 가게 종업원 둘이서 창고 물건을 빼돌려서 팔다가 걸렸거든. 그 공백을 누군가는 메워야 혔어요. 아버지가 나보고 도와돌라고 혔죠. 그때는 폭 35cm짜리 갱벽지가 접어져서 나왔어요. 사람들이 손수 도배를 하던 시대예요. 신문지만 바르고 사는 집도 많았고. 장판은 구라모도라고, 세멘(시멘트)종이 재질 같은 게 나와요. 그 위에 손수 콩기름을 멕여서 깔았어요."

전북대 상대 1회 졸업생이었던 이서복씨는 아들을 어른처럼 대했다. 엄하게 일을 가르쳤다. 도매와 소매를 겸하는 지업사. 포장한 물건을 충청도 곳곳까지도 보냈다. 이서복씨는 십 수 년째 해왔던 일, 아들 명원씨가 조금만 잘못 해도 혼냈다. 그러니까 10대 소년인 아들은 "초자니까 모를 수도 있죠"라면서 대든 적도 있다.

아버지의 말이 법이던 시대, 이서복씨는 아들에게 "어차피 네가 혀야 할 일이니까 맡아서 혀라"고 했다. 명원씨는 그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도배장판 일을 자신의 업으로 생각했다. 일을 가르쳐주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명원씨는 가게에 혼자 남았다. 중매로 만난 이상희씨와 7년간 연애하고 결혼해서는 함께 가게를 꾸려갔다.

"지금 세풍 아파트 근처쯤 될 거예요. 화전 외인 아파트라고 있었어요. 제가 단지 전체의 도배장판 공사를 맡아서 혔어요. 그때는 지금 같이 좋은 도배풀이 있들 안 혔어요. 큰 솥에다가 풀 끓이느라고 새벽마다 그렇게 고생을 혔어. 근디 회사가 망해버렸어요. 지업사 일은 가장 힘든 게 뭔지 알아요? 일해주고 돈을 못 받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업사들이 죽어나가는 거예요. 일은 혔는디 공사비는 커녕 재료값도 건지들 못 혀요. 그런디도 도배를 해준 사람들한티 책임을 지고 노임비는 물어줘야 하잖아요. 속병이 안 생기겄어요? 별 사람들이 많아요. (웃음) 도배장판을 하는 사이에 집 팔아먹고 도망을 가버리는 사람들까지 있어요."

이근수씨는 이명원씨의 아들이다. 학교 공부를 잘 했던 근수씨는 지업사 일을 물려받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엄궁에 있는 과일 경매시장 33번 중매인 가게로 출근했다. 날마다 새벽 3시 반까지. 중매인이 경매 받은 과일을 옮기는 일을 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오후에는 경매 받은 과일을 1톤 트럭에 싣고 거제도(부산보다 물가가 비쌌다고 함)로 갔다. 세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움직였다. 아파트 단지를 돌며 과일을 팔았다. 근수씨는 앞날을 고민했다. 학교 졸업한 뒤에 직장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에게 어떻게 다가서고 응대하는지를 눈여겨봤다.

"부산에서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온갖 알바를 했어요. 그래도 학점은 4.38이었어요.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 아니까, 용돈 달라는 말이 안 나왔어요. 공부하면서 일 하는 게 저한테 맞기도 했어요. 제가 가만히 있지를 못 하거든요. 부산은 대도시니까 정말 잘 사는 사람들, 잘난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나도 빨리 잘 돼야지. 너무 높은 데 보면 지치니까 적당한 높이를 보고, 이루고 또 다시 높은 데를 보면서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근수씨는 군 제대하고 바로 일을 했다. 20대 청년이 드문 공사 현장. 그는 목포에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타일 붙이고, 천장에 돔을 설치했다. 그 일을 총괄하는 사장은 40대, 땀에 전 작업복을 벗고, 근사한 세단을 타고 퇴근했다. 근수씨는 그 모습이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 일이라면, 근수씨도 잘 해낼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근수씨의 할아버지가 창업한 가게 '대영지업사'는 지금은 '대영장식'이다. 근수씨는 3대째 가게를 잇고 있다.
▲ 군산 '대영장식' 이근수씨 근수씨의 할아버지가 창업한 가게 '대영지업사'는 지금은 '대영장식'이다. 근수씨는 3대째 가게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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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 근수씨, 아버지에게 가업 잇겠다고 말하다

스물여섯 살 때, 근수씨는 군산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가업 이을게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쳐낼 것은 과감하게 없앴다. 외상 사절! 물건을 사가는 소비자나 업체가 "공사 끝나고 계산 할게요"라고 말하면, 거래를 하지 않았다. 물건 값과 시공비를 받은 다음에야 일을 진행했다.

"공사 대금을 먼저 주면서까지, 우리 가게를 찾아올 메리트가 있어야 하잖아요. 저렴하면 돼요. 그래서 저는 서울에 있는 공장에 가서 직접 물건을 사와요. 공장에서 대리점, 도매상을 거치면서 생기는 마진이 있잖아요. 저는 그걸 파괴시켰어요. 예를 들면, 남들이 10% 마진 볼 때, 저는 3%를 남겨요. 장사는 멀리 보면서 해야죠."

도시마다 큰 시장을 끼고서 지업사 상권이 발달해 있다. 군산도 군산역 시장 골목에 지업사들이 모여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근수씨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했다. "지업사 장사가 되겠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 때부터 지물업계 한 분야만 팠으니까 다른 것에 손 안 대고 갈 거예요"라고 했다.

그는 자신했다. 새로 도배를 한다면, 아는 사람한테 맡기는 경향이 있다. 인맥을 무시할 수 없는 게 지업사 세계다. 근수씨는 큰돈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자리에서 쌓아온 경력과 인맥의 값어치는 어마어마했다. 아버지는 먼저 근수씨에게 "네가 일을 알아야 기술자들을 다룰 수가 있다"면서 바닥재 시공을 배우게 했다. 

"6개월간 전주로 출·퇴근했어요. 30년 경력의 바닥시공 전문가인 막내외삼촌한테 일을 배웠어요. 새벽에 출근해서 밤 12시 넘어서 퇴근했어요. 완전히 스파르타 방식으로 배웠어요. '반년 일하고 네가 어떻게 기술을 알겠냐'고 하시는 기술자들도 계실 거예요. 진짜 하루도 안 쉬고 일하면서 배웠어요. 아버지가 저보고 방 열 몇 개를 시공해보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야 통과가 됐어요."

바닥 공사는 변수가 따른다. 날씨나 바닥 면의 상태에도 영향을 받는다. 무겁고 뻣뻣한 장판, 여름철은 장판 다루기에 좋은 때다. 겨울철에는 보일러를 돌려서 장판을 부드럽게 만드는 게 먼저다. 그 다음에야 시공을 한다. 그렇게 해도 하자가 나올 수 있다. 근수씨는 무조건 하루를 넘기지 않고 A/S를 해준다. 그게 철칙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일을 자신이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근수씨. 일이 재밌다. 근수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마냥 대견스럽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일을 자신이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근수씨. 일이 재밌다. 근수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마냥 대견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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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간 쉬는 날 없이 일했어요, 요즘 들어서야 일요일에 쉬어요"

사실 근수씨는 바닥 시공하는 것보다 영업이 더 좋다. 수익이 생기면, 수도권에 있는 큰 공장들을 찾아가서 직거래했다. 60여 년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군 '대영지업사'를 신뢰해 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근수씨는 서울과 부산의 잘 되는 인테리어 업체들을 찾아다녔다. 보고 배운 것들은 군산 시장에 맞게 적용했다. 

"일은 진짜 재밌어요. 일반 지업사에서 취급하지 않는 물건을 '하면 되겠다'고 들여왔는데 대박이 날 때요. 물건을 대량으로 가져온다는 건 투자를 했다는 뜻이잖아요. 소비자들 반응이 좋으면, 당연히 수입으로 연결이 되거든요. 지금까지 실패는 없었어요. 운이 따랐지요. 하지만 제가 그 전에 얼마나 많이 시장조사를 하고 노력을 했겠어요?

아버지 가게에서 일 시작한 때가 2012년이에요. 몇 년간은 쉬는 날도 없이 일했어요. 친구들 만나서 놀고 싶을 때도 있는데, 사람이 다 잡을 수는 없잖아요. 간절했어요. 얼른 자리 잡고 잘 되고 싶었어요. 가게는 새벽 6시에 열죠. 그래야  현장에 나가서 시공팀에게 일거리를 맡기거든요. 요즘 들어서야 일요일에 쉬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 근수씨가 일 하는 것을 지켜봤다. 본 매장 외에 창고형 매장을 여섯 곳으로 늘릴 때는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러나 좋은 물건을, 전북지역에서 가장 싸게 들여올 때마다 믿음이 쌓였다. 공장에서 바로 물건을 떼어 와서 소비자한테 파는 일은, 아버지 세대에서는 상상하지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익산이나 전주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늘어났다.

근수씨는 "재고파악이 가장 중요혀"라고 아버지한테 배웠다. 물건의 수량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손님이 원하는 물건이 어느 창고용 매장에 있는지 파악된다. 그래야만 판매로 연결이 된다. 한꺼번에 여러 팀의 손님들이 와도, 취향과 가격에 맞게 안내할 수가 있었다. 물건이 비슷해도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를, 가게 안에 다 써 붙여놓았다.
  
전국에서 가장 물건이 많은 곳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근수씨. 지난해에 아버지에게서 가게를 완전히 물려받았다. 따로 '대영장식' 광고는 하지 않는다. 입소문을 믿는다. 인터넷 가격보다 더 저렴한 지업사가 군산에 있다고. 지난해에 근수씨는 576곳의 가정집에 벽지를 발라주고, 바닥 시공을 해주었다.

"장사꾼들이 이문 안 남기고도 준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죠. 저는 그냥도 줘요. 어차피 집세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죠. 3대째, 60년 넘게 소비자들을 만나서 신뢰를 쌓아온 가게예요. 공사도 잘해드리고요. 그래도 외상은 절대 안 줘요."

65년째 같은 자리에 있는 가게. 이명원씨는 가게를 열던 해에 태어났다. 
이 오래된 가게는 시들지 않고, 청년처럼 다시 기운차게 성업 중이다. 모두 아들 이근수씨 덕분이다.
 65년째 같은 자리에 있는 가게. 이명원씨는 가게를 열던 해에 태어났다. 이 오래된 가게는 시들지 않고, 청년처럼 다시 기운차게 성업 중이다. 모두 아들 이근수씨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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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거진군산 3월호에 실렸습니다.



태그:#입소문, #65년째 성업 중인 지업사, #군산 대영지업사, #장사, #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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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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