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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군청 마당에 전시돼 있는 열선루 주춧돌들. 열선루는 정유재란 때 수군철폐령을 받은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다'는 장계를 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성군청 마당에 전시돼 있는 열선루 주춧돌들. 열선루는 정유재란 때 수군철폐령을 받은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다'는 장계를 쓴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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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봄이 꽃에서 신록으로 옮겨가고 있다. 유채, 철쭉 등 봄꽃과 어우러지는 연둣빛 신록이 아름다운 나날이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신록이다. 모처럼 하늘도 깔끔하다. 집안에 있기엔 너무나 아까운 나날이다.

달력을 보니 4월 28일이 이순신 탄신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먼저 꼽는 이순신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각별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와해된 조선수군을 재건하던 노정을 따라 간 경험이 있어서다.

 보성읍내에 있는 방진관. 이순신의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지낸 사실을 떠올려 준다.
 보성읍내에 있는 방진관. 이순신의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지낸 사실을 떠올려 준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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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진관에서 사진으로 만난 이순신의 전쟁 기간 일기들. 나중에 '난중일기'로 한데 엮여 불러진다.
 방진관에서 사진으로 만난 이순신의 전쟁 기간 일기들. 나중에 '난중일기'로 한데 엮여 불러진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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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1545년 서울 마르내골, 지금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21살 때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인 상주 방씨와 혼인했다. 보성을 '이순신의 처가'라고 하는 이유다. 이순신은 장인의 전폭적인 격려와 후원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지내며, 시쳇말로 처가살이를 했다. 장인과 장모가 세상을 떠나자, 후손이 없는 처가를 본가로 삼았다.

이순신에 대한 전라남도의 관심도 높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한 인연 덕분이다. 전라남도는 지난해 전남도내에 산재한 이순신 유적을 전수 조사했다. 올해부터는 유적 명소화 사업을 하나씩 진행할 예정이다.

전라남도의 이순신 유적 명소화 사업은 성웅 이순신보다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주역이었던 호남민중의 역할을 다시 조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곡성 석곡의 대황강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길에 하룻밤 유숙한 능파정이 있었던 곳이다. 잡풀이 우거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곡성 석곡의 대황강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길에 하룻밤 유숙한 능파정이 있었던 곳이다. 잡풀이 우거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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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목과 잡풀을 제거한 뒤 드러난 바위와 글씨들. 정유재란 당시 능파정의 흔적이라고.
 잡목과 잡풀을 제거한 뒤 드러난 바위와 글씨들. 정유재란 당시 능파정의 흔적이라고.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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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를 제대로 답사한 건 3년 전이었다. 겨울 동안 전문가의 고증 자료를 들고 찾아 다녔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애를 먹기도 했다. 표지판은커녕, 지역주민들도 모르기 일쑤였다.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하룻밤을 유숙했다는 곡성 석곡 강정마을의 능파정 터를 찾아갔을 때다. 두 번의 방문에서도 능파정 터를 찾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전문가의 고증 자료에는 대황강변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근처를 다 헤집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찾아갈 때는 톱과 낫, 함지박에 바가지를 갖고 갔었다. 우거진 잡목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잡목의 가지를 베어내고 잡풀을 걷어냈더니, 내 키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함지박에 강물을 채우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을 바가지에 담아 뿌렸다. 하얀 바위에서 글씨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찾기 수월해졌다. 조선수군 재건로를 소개하는 홍보책자와 지도가 만들어져 있다. 현장에 표지판도 세워졌다. 유적 소재지의 주소까지도 공개돼 있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수군 재건에 앞서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 상상도. 구례 구만저수지 앞 도로변 벽에 그려져 있다.
 조선수군 재건에 앞서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 상상도. 구례 구만저수지 앞 도로변 벽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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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순절한 군관과 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인 석주관. 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시작지점이다. 구례군 토지면에 있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군관과 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인 석주관. 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시작지점이다. 구례군 토지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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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때다.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됐다가 풀려나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전선 12척만 겨우 살아 남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전라도 일대에서 와해된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기까지의 여정이 조선수군 재건로다. 그 길이 구례에서 곡성, 순천, 보성, 장흥, 해남, 진도로 이어진다.

 정유재란 때 죽은 의병과 승병의 추모비. 석주관 맞은편 산 언덕에 있다.
 정유재란 때 죽은 의병과 승병의 추모비. 석주관 맞은편 산 언덕에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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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을 지켜봤을 수령 500년의 왕버들나무. 당시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구례읍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을 지켜봤을 수령 500년의 왕버들나무. 당시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구례읍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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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군관 9명과 병사 6명을 데리고 구례에서 조선수군 재건을 시작한다.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군사와 군기, 군량을 확보하고 군선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전남과 경남의 도계에 있는 구례 석주관을 출발점으로 해 구례읍, 구례구, 압록을 거쳐 옥과, 곡성으로 간다.

이순신은 당시 구례현청과 옥과현청, 곡성군청에 들러 체찰사와 군자감 등을 만나 전황을 파악하고, 군사를 모은다.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구례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군자감 손인필이었다. 구례읍에 있는 손인필의 비각을 중심으로 정유재란 승전공원이 조성돼 있다.

구례현청이 있던 현 구례읍사무소 자리에는 당시 상황을 묵묵히 지켜봤을 500년 된 왕버들나무 고목이 서 있다.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구례현청의 모정, 명협정도 복원돼 있다.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군관과 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석주관 앞에 이원춘 현감과 왕득인 등 일곱 의사의 무덤과 추모비도 있다.

 이순신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낙안읍성의 푸조나무 고목. 낙안읍성 객사 뒤에서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이순신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낙안읍성의 푸조나무 고목. 낙안읍성 객사 뒤에서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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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 득량 박곡마을에 있는 양산원의 집 터. 지금은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양산원의 집은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많은 군량미를 확보한 곳이다.
 보성 득량 박곡마을에 있는 양산원의 집 터. 지금은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양산원의 집은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많은 군량미를 확보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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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선 무기를 손에 넣는다. 대포와 화약, 다양한 화살을 구한다. 보성에선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다. 이순신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곳은 당시 조양창이 있던 조성면의 고내마을과 득량면 박곡마을의 양산원의 집이었다. 득량(得糧)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수군을 철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조정의 수군 철폐령에 맞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는 장계를 써서 올린 곳은 보성 열선루였다. 배설이 이끌고 있던 조선함대를 찾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곳은 회천면 군학마을이었다.

당시 순천부에는 둘레 1025m, 높이 3.6m의 석성이 있었다. 지금의 순천시내 중앙로다. 여기에 순천부읍성의 동서남북 성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순천시 영동 옛 승주군청 자리에는 정유재란을 목격했을 500년 된 고목이 지금도 있다. 낙안읍성에는 이순신이 직접 심었다는 푸조나무가 객사 뒤에 있다.

보성에는 이순신이 많은 군량미를 확보했던 조양창의 터가 조성면에 있다. 양산원의 집터는 득량면에 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장계를 쓴 보성 열선루는 지금의 보성군청 자리다. 군청 앞마당에 주춧돌이 전시돼 있는데, 몇 해 전 발굴한 열선루의 주춧돌들이다. 앞으로 열선루를 복원할 때 쓸 돌이다. 뭍에서 병참활동을 끝낸 이순신이 처음 배를 탄 회천면 군학마을 해변도 멋스럽다.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 앞바다. 정유재란 때 뭍에서의 수군재건 활동을 끝낸 이순신이 배를 타고 12척의 전함을 찾아 바다로 나아간 곳이다.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 앞바다. 정유재란 때 뭍에서의 수군재건 활동을 끝낸 이순신이 배를 타고 12척의 전함을 찾아 바다로 나아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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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회진에 있는 회령진성 역사공원. 장흥군 회진면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배설로부터 12척의 전함을 회수한 곳이다.
 장흥 회진에 있는 회령진성 역사공원. 장흥군 회진면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배설로부터 12척의 전함을 회수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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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군학마을에서 배를 탄 이순신이 찾아간 곳은 회령포였다. 지금의 장흥 회진이다. 이순신은 여기서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머물고 있던 조선함대 12척을 회수해 거북 모양의 구선(龜船)으로 개조한다. 사다리를 타고 뱃머리로 올라와서 싸우는, 일본군의 특기인 백병전을 막기 위해서였다.

장흥 회진에는 회령진 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당시 회령진성의 흔적도 남아있다. 이순신은 여기서 재건한 조선수군과 함께 출정식을 갖고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 바다로 나아간 이순신은 조선함대를 이끌고 마량항 너머 바닷길을 따라 해남으로 향한다.

이순신은 이진, 어란을 거쳐 벽파진으로 간다. 어란에선 정탐 온 일본군과 땅끝 앞바다까지 추격전을 벌인다. 벽파진에 머무는 동안에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한밤중에 공방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순신은 울돌목을 등져선 싸움이 어렵겠다고 여겼다. 강한 해류를 이용하면 일본군이 쉽게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으려면 울돌목의 좁은 바닷길이 더 효과적이겠다는 판단이 섰다.

 해남과 진도사이 울돌목에 놓인 진도대교의 밤풍경을 배경으로 이순신이 고뇌에 잠겨 있다. 흡사 정유재란 때 고뇌를 거듭하던 이순신 같다.
 해남과 진도사이 울돌목에 놓인 진도대교의 밤풍경을 배경으로 이순신이 고뇌에 잠겨 있다. 흡사 정유재란 때 고뇌를 거듭하던 이순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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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싸우는 조선수군들. 해마다 가을에 울돌목에서 열리는 명량대첩축제 때 해상전투 재현 장면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싸우는 조선수군들. 해마다 가을에 울돌목에서 열리는 명량대첩축제 때 해상전투 재현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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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두고 수군진영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긴다. 이순신은 우수영 앞바다 울돌목을 지키며 조선수군과 함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각오로 싸워서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다.

고대부터 한·중·일이 만나는 국제 해상로였고, 제주도 해로와 조운로의 중간 기착지였던 어란진에는 만호진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수영에는 옛 우수영성의 흔적이 산재해 있다. 명량대첩비도 세워져 있다.

진도에는 명량대첩 때 순절한 군사와 지역주민들의 무덤인 정유재란 순절묘역이 고군면 도평리에 있다. 명량대첩 이후 바닷가에 밀려온 일본군들의 주검을, 주민들이 거둬서 묻어준 왜덕산은 고군면 내동리에 있다. 벽파항에는 한국전쟁 직후 진도군민과 교직원들의 성금으로 세운 이충무공전첩비가 있고, 벽파정이 최근 복원됐다.

가족과 함께, 친구끼리 나들이 할 때 한 번씩 찾아가면 좋을 곳이다. 아예 자녀들과 함께 코스별로 역사문화 답사여행을 계획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살아있는 지역 알기이고, 오래 기억될 체험학습이 될 것이다.

 진도 벽파진 앞바다.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수군진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대첩을 준비했던 곳이다.
 진도 벽파진 앞바다.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수군진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대첩을 준비했던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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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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