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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준과 그의 아버지, 동생, 아들, 조카, 그리고 그의 선조 정지년을 기리는 옥계서원(문화재자료 5호)의 강당
 정사준과 그의 아버지, 동생, 아들, 조카, 그리고 그의 선조 정지년을 기리는 옥계서원(문화재자료 5호)의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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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3월 4일 투옥되었던 이순신은 4월 1일 석방된다. 이순신은 권율 도원수 아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에 따라 전라도를 향해 내려온다. <난중일기>에는 백의종군 중에 이순신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정사준(鄭思竣)은 이순신이 순천에 머물 때 특히 자주 만난 인물이다.

충무공과 정사준이 매우 절친한 사이였음을 말해주는 일기의 기록들을 읽어본다.

"4월 27일 : 정사준이 와서 원균의 패악하고 망령된 행동에 대해 많이 말했다.
5월 1일 : 순찰사와 병사가 도원수가 머물고 있는 정사준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논다고 하였다.
5월 4일 : 정사준이 와서 하루 종일 돌아가지 않았다.
5월 14일 : 정사준, 정사립(정사준의 동생), 양정언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하여 길을 떠났다."

정사준 본인, 아버지, 동생, 아들, 손자 모두 왜적과 싸웠다

정사준(1553∼1604)은 순천 옥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그의 5대조 정지년을 주벽으로 하는 이 서원에는 정사준의 아버지 정승복, 아들 정선, 동생 정사횡, 형 정사익의 아들 정빈도 함께 제향하고 있다. 정선, 정사횡, 정빈도 모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참전 의사들이다. 아버지 정승복도 옥구 현감과 어란포(해남 송지면 어란리) 첨사로 있을 때 달량포(해남 북평면 남창리)와 추자도에서 왜구들을 크게 격파한 바 있다.

정사준은 1584년 무과 급제 후 선전을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모친 상중이었다. 그는 조정의 기복령(起復令, 상중이지만 관직에 복귀하라는 명령)에 따라 이순신의 막하에서 근무했다. 9월에는 임금의 행재소(왕의 임시 거처, 현재는 의주)로 곡식과 무기를 싣고 가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의주로 곡식과 무기를 실어나르는 정사준

이순신은 장계 <장송전곡장(裝送戰穀狀)>에 '경상도 접경 지역 요충지인 광양현 전탄의 복병장으로 보냈던 바 매복하여 적을 막는 일에 특별히 기이한 계책을 마련하여 적이 감히 경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정사준이 '이의남 등과 약속하여 의곡(義穀, 백성들이 성의로 모은 곡식)을 모아 배에 싣고 행재소를 향해 출발합니다. 화살, 화살대, 종이 등도 함께 보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596년 윤 8월 15일 순천에 온 통제사 이순신은 그날과 그 다음날 계속 정사준의 집에서 묵은 후 17일 낙안으로 이동한다. 이 역시 정사준과 이순신이 얼마나 친한 관계인지를 잘 말해준다.

옥계서원의 사당
 옥계서원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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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 중 <승평지>는 '정사준은 판관 정승복의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본현(순천)의 주사(主事)로써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일곱 차례 전투에서 여러 차례 적함을 격파했다.'라고 전한다. 정사준의 공로에 관한 이보다 놀라운(?) 증언은 이순신이 직접 적은 장계 <봉진화포장(封進火砲狀)>에 기록되어 있다. 놀랍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사실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순신)은 여러 차례 큰 전투를 치르면서 왜군의 조총을 많이 얻었는데, 늘 가까이 둔 채 그 기묘한 이치를 시험했습니다. 몸체가 긴 탓에 총구멍도 깊었기 때문에 포의 기운이 맹렬하여 부딪히는 것은 모두 부서졌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승자(승자총통)나 쌍혈(대략 연발총) 등의 총통은 몸체가 짧고 총구멍이 얕아 맹렬하기가 왜군의 총통만 못하고 소리도 작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유의) 총통을 만들려고 했는데 신의 군관인 훈련원 주부 정사준이 신묘한 방법을 터득하여 야장(대장장이)으로 낙안의 수군 이필종, 순천의 사노(개인의 종) 안성, 난을 피해 김해 병영에 살고 있는 사노(절의 종) 동지, 거제의 사노(절의 종) 언복 등을 거느리고 정철(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을 두드려 만들었는데 체제가 매우 정교하고 포탄의 맹렬함이 조총과 같습니다.

실 같은 구멍과 불을 댕기는 기구는 조금 다르지만 며칠 내로 만들 수 있고, 만드는 과정 또한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중략) 지금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다섯 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에서 각 도와 관가에서도 아울러 제조하도록 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정사준과 야장 이필종 등은 별도로 상을 주시어 그들이 감동을 받아 흥겨워하며 (우리나라 조총을) 앞 다투어 만들도록 하심이 마땅합니다."

조선 조총 : 서울 전쟁박물관 유리 속의 전시물을 찍은 것이므로 실물과 다릅니다.
 조선 조총 : 서울 전쟁박물관 유리 속의 전시물을 찍은 것이므로 실물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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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준에게 특별한 상을 내려달라고 청원하는 이순신

옥계서원은 전남 순천시 연향동 1097에 있다. 문화재자료 5호인 이 서원의 주요 건물은 강당과 사당 옥계사이다. 흔히 서원 강당에 '○○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듯이 이 서원 강당에도 '옥계서원' 현판이 붙어 있다.

그런데 본래는 '옥계원'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모양이다. 뜰에 '옥계원 기적비'와 '옥계원 헌성비'가 세워져 있다. 기적비(紀蹟碑)는 서원의 역사를 새겨둔 비석이고, 헌성비(獻誠碑)는 서원을 조성할 때 성금 등을 낸 이들의 공헌을 적어둔 비석이다.

1603년 이순신을 기려 타루비가 세워졌다. <이충무공전서> 중 '승평지'에는 '이 충무공 비가 수영에 있는데 읍인 전 현감 정사준과 통제사 막좌가 비를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603년 이순신을 기려 타루비가 세워졌다. <이충무공전서> 중 '승평지'에는 '이 충무공 비가 수영에 있는데 읍인 전 현감 정사준과 통제사 막좌가 비를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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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사는 서원의 일반적 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학습 공간인 강당이 앞에, 제사 공간인 사당이 뒤에 위치) 배치에 따라 강당 뒤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을 찾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요즘 사람들을 탓할 일도 아니다. 이순신은 특별한 상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조정은 정사준을 1601년(선조 34) 공신 임명 때는 물론 1605년 원종(추가) 공신 책봉에도 명단에 넣지 않았다.

1601년에는 고경명, 곽재우, 김면, 김천일, 정기룡, 조헌 등 대표적 의병장들도 넣지 않았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1605년에마저 정사준을 공신으로 포상하지 않았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타루비 세운 뒤 세상을 떠나는 정사준

정사준은 1603년 이순신을 기리는 타루비(보물 1288호)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탠 후 1604년 타계한다. <승평지>에는 '이 충무공 비가 수영(여수)에 있는데 읍인(순천 사람) 전 현감 정사준과 통제사(이순신) 막좌(부하들)가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란 중 많은 공을 세웠고, 생애 마지막 업적으로 1603년 충무공을 기려 타루비도 건립했지만 정사준은 1605년 2차 공신 임명 때에도 자신이 인정되지 않는 것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보지 않고 이승을 떠났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가 그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굳게 닫혀 있는 옥계서원 외삼문 밖을 맴돌다가, 그냥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


태그:#정사준, #조총, #타루비, #이순신, #옥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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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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