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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한창이던 4월 무렵, 나는 차를 타고 미사리·팔당댐 주변을 훑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보냈지만, 벚꽃이 만발한 곳을 찾을 수 없어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근처 워커힐 언덕에서 만개한 벚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파랑새를 찾아 떠난 틸틸과 미칠이 결국 자신의 집에서 파랑새를 찾았다는 동화가 떠올랐다. 서울 여행, 멀리 떠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곳들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광진구의 걷기 여행을 선택한 이유다.

큰 금계국 꽃과 아차산 4보루 전경
 큰 금계국 꽃과 아차산 4보루 전경
ⓒ 양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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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차산 등산로

걷기 여행하면 요즘 유행하는 올레길이나 둘레길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장 전통적인 걷기 여행을 꼽자면 바로 등산이 아닐까. 광진구에는 높지 않은 그렇지만 경치만큼은 다른 산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아차산(287m)이 있다. 여러 코스가 있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코스는 긴 고랑 길에서부터 4, 3보루를 거쳐 고구려 정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총 소요 시간은 약 3시간이며, 긴 고랑 길까지는 군자역에서 3번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여름 산이 가장 무섭다고 얘기한 친구가 있었다. 여름 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에 압도되서 한 말일 터이다. 하지만 아차산의 여름은 즐거움으로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전,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곳곳에 팬티 바람으로 바위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수다 삼매경에 빠진 여인들, 배달 음식을 시켜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아차산 등정. 간단히 물놀이를 즐긴 후, 다시 신발을 꿰어신었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한강
 아차산에서 바라본 한강
ⓒ 양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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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비는 이제부터였다. 앞으로 40~50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내리막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몇 개의 나무다리를 지나고 잔돌이 박힌 길을 걸어 소나무 숲을 통과하고 나니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길 끝에 놓인 벤치 두 개를 보곤 한고비는 넘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벤치에 앉아 땀도 닦고, 물도 마시고, 한숨을 돌리는 찰나, 편안해진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이런, 끝이 아니다. 나무 사이로 가파른 나무 계단이 보였다.

물이 끓는 온도가 100도라 했다. 그런데 98도에 이른 사람들이 나머지 2%를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나머지 2%가 그만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2%를 채워보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다시 마음을 내어 계단을 올랐다. 몇 번을 쉬어가며 계단을 오르고 나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서울 시내와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아차산 4보루다.

아차산에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상징하는 아차산성이 있다. 6세기 들어 신라가 북진하면서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 이 성도 신라의 영역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전까지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바로 이 산성의 일부인 보루들이 등산로 곳곳에 고구려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아차산 4보루에 핀 큰 금계국꽃
 아차산 4보루에 핀 큰 금계국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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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에 오르면 노랗고 큰 금계국 꽃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끈다. 일부러 심어 놓은 듯 만발한 노란 꽃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가만히 앉아 노란 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성을 탈환하려는 고구려 병사들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는 듯했다. 죽령 이북 한강 유역을 탈환하려던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이 바로 여기라니 온달 장군의 넋이 큰 금계국 꽃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온달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러 천 리 길을 달려온 평강 공주의 넋일까. 싸움은 치열했으나 이곳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은 꽃이 되어 후세들을 반기고 있었다.

4보루를 지나 1시간 정도 걸으면 3보루가 나온다. 3보루 역시 한강 이남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한다. 전망대에 올라 우리가 사는 동네가 어디인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세 먼지가 많은 봄에는 뿌옇게 보이는 날이 많지만, 비가 잦은 여름 날씨에는 선명하게 서울 시내를 관망할 수 있다.

아차산 3보루(296m)는 아차산 6개 보루 중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다. 특이한 점은 3보루에서 디딜방아의 볼씨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볼씨는 디딜방아의 쌀개를 받치기 위해 기둥처럼 박아놓은 나무나 돌이다. 3보루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곳으로 추측된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싸움을 벌이는 병사들이 가장 행복했을 시간은 아마도 식사 시간 아니었을까.

아차산 산 속 막걸리 집
 아차산 산 속 막걸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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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딜방아를 찧어 만드는 음식은 비록 어머니가, 아내가 만들어 주는 맛은 아닐지라도 그 포근함에 가장 근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루의 고단한 일상을 뒤로하고 한데 모여 앉아 식구의 따뜻함을 느끼는 시간. 잠깐 눈을 감고 당시 병사들이 밥을 먹으며 나누었을 소소한 이야기들을 상상해보았다.

4보루와 3보루를 지나자, 산을 탄 지 두 시간이 넘어갔다. 어느덧 배가 출출해졌다. 이쯤 해서 반가운 얼굴이 산행객을 맞이한다. 바로 산속 막걸리 집 여주인이다. 막걸리 집이라고 해봐야 간이 의자와 파라솔을 몇 개 놓은 것이 전부이지만, 그곳에서 먹는 막걸리 한잔의 맛은, 빈속을 타고 내려가는 뜨끈한 막걸리의 기운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

멸치와 마늘종이 공짜로 무제한 제공되니 주머니 사정이 가뿐해도 걱정 없다. 막걸리 한 잔에 따뜻하게 데워진 속으로 기분 좋게 일어났다. 편안한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걸어 내려와 등산을 끝냈다. 물놀이도 즐기고,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그밖에 고구려의 이름 없는 병사들도 만나고 막걸리까지 한 잔 더했으니 이 이상 부러울 게 무엇이랴.

아차산 기원정사
 아차산 기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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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정사 전경
 기원정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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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보다 가볍게 즐기는 산책, 기원정사 둘레길

3시간의 아차산 등산길이 부담스럽다면,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산책을 더 선호한다면, 기원정사 둘레길을 추천한다. 긴 고랑 쪽 아차산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층계 길을 오르면 바로 기원정사 둘레길이다. 산길을 지나 기원정사까지 20분, 다시 기원정사에서 고구려 정 아래 아차산 입구까지 데크길로 20여 분이 걸린다.

먼저 산길을 올라보자. 산길이라지만 나무다리가 네 개나 있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적당히 섞여 있어 약간의 땀을 흘리면 쉽사리 오를 수 있다. 이십 대 시절 처음 갔던 한의원에서 원장님이 나에게 물었다. 짧고 굵은 길을 가기를 바라느냐, 가늘고 긴 길을 가기를 바라느냐. 나는 그때, 그 젊음에, 짧고 굵은 길을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가늘고 긴 길이라니, 어딘지 지루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는 짧고 굵은 길이 얼마나 몸과 마음에 무리가 될 수 있는지, 가늘고 긴 길이 얼마나 여유로울 수 있는지 안다. 하지만 아직 가늘고 긴 길을 선택할 마음은 없다. 두 가지 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면 인생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기원정사 둘레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짧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가늘고 긴 내리막길이 기다린다.

땀을 닦고, 물 한 모금 마시며 몇 번의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길옆으로 작은 돌탑들이 보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제각각 쌓아 놓은 것인데, 그 중 높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돌 서너 개로 쌓아 놓은 낮은 탑들이 전부다. 낮은 탑을 쌓으며 기원했을 나지막한 소원들을 상상해봤다. 오늘 하루가 행복하기를, 가족들이 건강하기를, 오늘 저녁도 맛있게 행복하게 먹을 수 있기를. 그 소원들을 참 예쁘다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산길의 끝, 기원정사에 다다랐다.

기원정사는 조계종 비구니들의 절이다. 대웅전, 작은 주택,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요사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다. 작지만 대웅전 앞의 잔디밭은 잘 정돈되어 깔끔하고, 곳곳에 놓인 소나무들은 운치가 있었다. 대웅전 앞 층계에 앉아 잔디밭과 그 너머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면 절로 명상이 된다. 운이 좋아 스님의 독경 소리를 함께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보다 행복한 명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도 식었고, 명상도 멋지게 끝냈다면 다시 몸을 일으켜 데크길을 걸어보자. 20여 분 동안 걷는 데크길은 아무 부담 없이 주변의 나무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중간 정도에 이르면 길 양옆으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소나무 향기를 더욱 짙게 느낄 수 있다. 빗방울이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소리도 아름답게 들린다. 소원 탑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소원들을 상상해보고, 스님의 독경을 들으며 명상도 해보고, 소나무 숲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들었다. 이만하면 40여 분의 산책길로 꽤 괜찮은 것 아닐까.

나무 그늘 아래서 늘어지게 한잠, 어린이대공원

어린이 대공원 조각상
 어린이 대공원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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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대공원 롤러 코스터 타는 사람들
 어린이대공원 롤러 코스터 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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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일컬어 '피로 사회'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두 번째로 길며(2015년 기준), 얼마 전에는 하루 18 시간의 운전에 지친 버스 노동자가 졸음운전 끝에 큰 사고를 내기도 했다. 우리는 '피곤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당신이 이처럼 피로에 지쳤다면, 등산도 둘레길도 모두 피곤하게만 여겨진다면 어린이 대공원으로 떠나보길 바란다.

1973년 개장한 대공원은 오랜 연식만큼 울창한 숲과 잔디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도 충분하다. 주말이면 잔디밭에 텐트와 돗자리를 펼쳐놓고 쉬는 가족과 연인들을, 한가한 평일 낮에는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는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무 그늘 아래 잔디에 누워 잠을 청해보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뛰노는 유치원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해보자. 잠깐 깨어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뒤적여 보자. 그렇게 한동안 책을 읽다 보면, 졸음이 찾아온다. 다시 한참 동안 잠에 빠져보자. 꿈도 없는 깊은 잠을 깨우는 것은 놀이공원에서 기구를 타고 노는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충분히 잤다 싶으면 어슬렁어슬렁 일어나 놀이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자. 꼭 놀이기구를 타지 않아도 좋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맘껏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덩달아 즐거워진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바이킹을 타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던 그 시절에 놀이 공원은 얼마나 크고 넓게 느껴졌던가. 풍선을 사달라고 조르던 내게 풍선을 건네던 아버지의 손은 또 얼마나 크고 듬직했던가.

광진구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 여행기를 쓰며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장소를 깊게 관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꼭 멀리 떠나야만, 외국으로 나가야만, 오지로 들어가야만 여행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익숙한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소중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여행 아닐까.

어린이 대공원 분수대에서 노는 아이들
 어린이 대공원 분수대에서 노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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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차산, #기원정사, #둘레길, #어린이대공원, #여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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