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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한 장면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한 장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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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끌렸다.

지난 2017년이 마무리되어 가고, 2018년이 시작되어 한 달이 흐르는 사이 나는 한 편의 드라마와 한 권의 책에 푹 빠져 지냈다. 첫 회 방송이 나간 후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라는 리뷰를 보고 찾아보게 된 JTBC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이하 '그 사이'), 그리고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라는 표지 말에 이끌려 읽게 된 김승섭 교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그 사이'가 종영한 지금 마음에 남는 묵직한 울림을 따라가다 보니 이 두 편에 마음이 이끌린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그 사이'가 남긴 메시지를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통해 기록해본다.

재난, 고통, 그리고 성장

심리학에 '외상 후 성장'이라는 개념이 있다. 재난, 사별, 생명을 위협하는 병과의 싸움 등 삶을 뒤흔드는 역경을 겪어낸 사람들이 단지 상처를 이겨내는데 그치지 않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침투적 사고와 다양한 신체적 반응, 기억상실 등 많은 심리적 신체적 고통을 겪지만, 진실하게 공감해주는 타인의 지지와 기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해 간다고 한다. 나아가, 이런 과정에서 인생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되면서 이전보다 개인적으로나 관계에 있어 보다 나은 '성장'을 일궈낼 수도 있다고 한다.

'그 사이'의 문수(원진아 분)와 강두(이준호 분)는 쇼핑몰 붕괴 사고 현장에서 각각 동생과 아버지를 잃었으나 본인은 살아난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다. 문수는 사고 현장에 갇혀있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문수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딸을 잃은 슬픔 속에 죄책감을 서로 투사하다 별거중이다. 강두는 사고 당시 다리에 입은 끔찍한 상처가 수시로 쑤시고 아파 진통제에 의지해 하루하루 막노동으로 살아간다.

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겪는 죄책감과 모든 고통들은 실제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경험한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과 매우 닮아 있었다. 문수의 기억상실은 일종의 트라우마로부터 살아남고자 하는 방어기제고, 강두의 계속되는 다리 통증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 신체적 고통에 더해진 일종의 신체화 반응이다.

또한, 두 주인공은 수시로 사고 현장의 장면이 떠올라 원치 않는 공포를 다시 느끼고, 꿈에서는 힘든 기억들이 재현된다. 실제 생활에서도 갇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 드라마에서 자주 반복되는 사고현장 장면만큼이나 자주 이들에겐 이런 고통이 반복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통한 개인적 치유와 성장

그리고 둘이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은 외상 후 성장 모델에서 외상을 극복해가는 과정과 잘 맞았다. 외상을 성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심리치료는 우선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안전한 환경에서 힘든 기억들을 언어로 표현하고,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힘든 경험 속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힘과 나를 지지해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치료자가 절대로 이런 과정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상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 준비를 할 때까지 치료자는 변함없는 지지와 안전감을 제공할 뿐이다.

문수와 강두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마치, 이와 같은 심리치료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둘은 서로의 상처에 대해 짐작은 하지만, 이를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 해 줄 뿐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면서 조금씩 상처를 말할 수 있게 된 둘은 유가족 추모비를 세우는 일을 함께 맡게 되면서 아팠던 시간들을 다시 만난다.

물론, 옛 상처를 다시 만나고 기억해 내는 일은 편안하지 만은 않다. 때로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게 힘들만큼 어렵고, 드러나는 과거의 일들은 여전히 괴롭지만, 둘은 이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치유의 길을 걷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튀어 나오는 상처는 공포에 떨게 하지만, 둘이 함께 목적을 가지고 다시 만난 과거는 감정을 정화해주고, 의미를 찾아가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둘의 관계를 통해 쌓아가는 행복한 경험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를 통해 문수와 강두는 자신의 외상에 의미를 더하고 성장할 기틀을 마련한다. 13회 방송분에서 강두가 "그 일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거니까. 그러니까 우린 더 열심히 행복해야 해"라고 문수에게 말하는 장면은 이제 이들이 트라우마를 안전하게 재경험하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성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책임지지 않는 사회, 무너지는 개인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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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심리학의 연구결과 대로라면, 이대로 드라마는 해피엔딩을 해야 했다. '외상 후 성장 모델' 대로라면 이제 두 주인공은 서로 더욱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배운 지혜를 의미 있게 활용하며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강두는 아프고 둘의 관계는 또 한 번 위기를 맞는다.

마지막 회의 "어떻게 살아났는데. 아파서 죽는 게 말이 돼? 이러라고 강두 살려 준거래?"라는 문수의 오열처럼 이 설정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름 성장을 이야기하는 좋은 드라마라고 여기고 열심히 시청했는데 이렇게 신파로 흐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 김승섭 교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떠올랐다. 그러자 강두의 불행은 오히려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이 책을 쓴 김승섭 교수는 질병역학자다. 의대를 졸업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고치기보다는 그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규명하는 일을 한다. 자신의 연구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질병역학 연구들의 실례를 들어 적은 이 책은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이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일 경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데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사회의 건강관련 서비스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가난하고,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람일수록 질병에 더욱 잘 걸리고 생명을 위협받기 쉽다. 같은 생활습관과 건강행동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소외계층에서 더욱 질병에 많이 걸리는 것은 질병의 원인이 개인의 체질이나 습관 뿐 아니라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 사이'에서 강두는 사고현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잃었지만, 현장 자재에 아버지가 손을 댔다는 오해로 인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아픈 몸을 제도권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으며 돌보기보다는, '야매'약국에서 진통제를 받아먹으면서 지켜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에서 강두를 죽음의 문턱으로 내 몬 질병은 사고 후 의사의 진단 없이 불법으로 구해 복용해온 진통제가 간 손상을 일으켜 유발된 것이었다. 결국, 강두는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던 한 개인이, 가난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김승섭 교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여러 연구들을 예로 들어 '인간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사건의 의미가 해석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적 환경이 외상의 핵심요소'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트라우마 자체에서 오는 상처는 치유될 수 있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외상 후 성장'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은 개인에게 경제적, 사회적, 국가적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가난과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행복의 문턱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강두의 고통은 그래서 타당한 것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김승섭 교수는 책에서 로세토 효과를 이야기한다. 로세토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의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선 1960년대까지 병든 이웃을 돕고, 부모가 사망하면 아이를 함께 돌보며, 가족이 경제적으로 파산했을 때 그 가족을 공동체가 돌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미국의 의사들은 이 마을의 심장병 사망률이 같은 조건의 다른 마을보다 유의미하게 낮은 것을 발견하고 연구를 했는데 바로 이런 공동체의 지지가 심장병에 걸리지 않는 원인이었다고 한다. 즉, 공동체, 우리 사회가 개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한다면 가난이나 사회적 불평등에서 오는 질병과 죽음은 줄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결국 강두는 기적처럼 살아난다. 결과적으로는 지나치게 극적인 설정으로 드라마답게 강두가 살아나긴 하지만, 강두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두의 이웃들이 보여준 노력은 희망을 보여준다. 사고 후 강두가 버텨나갈 수 있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여인숙 주인과 그 아들, 술집 마담으로 구성된 강두의 이웃들이었다. 이 이웃들은 가족이 아님에도 강두를 위해 간을 기증하겠다고 나서고, 온 힘을 다해 강두를 돕는다.

동시에 의식 있는 개인들의 노력 덕분에 드라마 속에서 권력을 상징하던 회사(청유그룹)도 변화한다. 청유그룹은 과거의 사고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며 과거의 잘못을 회피하지 않고 잘 기록하고 되새기며 다시는 이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제대로 조사해보지도 않고 지급하지 않았던 강두 아버지의 보상금도 뒤늦게 전달된다.

강두의 회생은 어쩌면, 강두가 속했던 이 같은 사회의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것으로 놔두지 않고 함께 아파해주고 해결책을 찾아보려 노력하는 이웃들의 간절한 바람이 그리고 비록 뒤늦긴 했지만,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개선해 가려는 회사의 움직임이 아마도 강두에게 기적을 허락했을 것이다. 권력과 부를 가진 회사가 진작부터 책임 있는 행동을 했더라면, 강두는 병에 걸리지 않고 좀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 사이'는 그냥 멜로드라마가 아니었다. 외상 사건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성장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의미 있는 드라마였다. 외상 자체로 인한 상처는 문수와 강두처럼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주고받는 진실한 관계를 통해 치유되고 성장을 향한 원동력으로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외상을 겪은 후 국가와 속한 사회의 책임 없는 행동과 사회적, 경제적 소외는 이런 성장과 치유를 방해한다.

한국 사회에는 자연재해보다도 더 숱하게 사람에 의한 재난이 있어 왔고 최근에도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겪어온 숱한 재난들(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살인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침몰 등)은 분명 국가가, 사회가, 공동체가 그 원인을 제공한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난의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여전히 홀로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김승섭 교수는 '비를 막을 수 없다면, 함께 맞아주라'고 이야기한다. 함께 아파하고 같이 있어주는 문화, 부당함에 함께 맞서주는 문화가 공유될 때 수많은 재난으로 인해 상처받은 개인들이 진정으로 '외상 후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 함께 있어주는 이웃들이 강두에게 기적을 가져왔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이어질 때 재난의 후유증과 질병을 개인의 탓이 아닌 사회가 함께 책임을 지는, 가난과 소외가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변할 것 같지 않던 드라마 속 권력 주체가 용기 있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변화했듯, 함께 있어주는 용기는 우리 사회의 권력 집단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사이'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들려주는 외상, 치유, 성장의 말들

"적당히 타협하다가 무너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책임지는 건 회사가 아니라 개인이 되죠. "(서주원, '그 사이' 7회)

"그런데 지금은 참을래. 나랑 있으면 강두가 계속 괜찮은 척 할 것 같아. 지금은 많이 슬퍼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편해지지. 우린 다 못 그랬잖아. 서로 화내고 미안해 하느라." (하문수, 마마의 죽음 후 슬퍼하는 강두에게 왜 가보지 않느냐는 만화가 친구의 질문에 '그 사이' 11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다 좋았을 거니까. 그러니까 우린 더 열심히 행복해야 해" (강두, '그 사이' 13회)

"생존자예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구요. 살아남은 거잖아요. 그거 진짜 대단한 거예요. (만화가 문하생이 문수와 만화가의 대화를 듣다, '그 사이' 14회)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아야 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p216)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거대한가에 대해서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p295)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 하고 자신이 왜 상처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그래서 희망은 항상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진짜예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p305)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그냥사랑하는사이, #아픔이길이되려면, #김승섭교수, #외상후성장,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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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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