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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문익환, 박용길 부부

민주와 통일의 큰 스승이었던 문익환 목사였지만 그 만큼 고초도 컸습니다. 그 속에서 문익환과 박용길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애정어린 조언을 나누는 동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의 가시밭을 걸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귀감이 되는 남녀의 만남입니다. 늦봄과 봄길의 삶의 이야기가 더욱 널리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부의 황제를 닮은 사내

1954년 일본에서 늦봄과 봄길의 모습
▲ 봄길과 늦봄 1954년 일본에서 늦봄과 봄길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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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이 일본에서 유학생 모임에 참석한 것은 1939년 4월, 만으로 스물한 살 때였다. 관동조선신학생회가 요코하마에서 '봄 모임'을 할 때 신학생 문익환이 들어서자 여학생들 쪽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목구비가 배우 같고 피부색이 백옥처럼 흰 사내가 동그란 안경을 썼는데 그 모습이 꼭 부의(만주국 황제) 같았다는 것이다.

당시 박용길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유학한 앳된 처녀로서 동기들보다 한 토막은 작고 어리지만 성적이 우수하고 쾌활했다. 그녀는 '부의 황제를 닮은 사내'가 인상이 얼마나 좋던지 언니에게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게 인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필이면 박용길이 졸업생 신분으로 전도사 일을 보는 교회로 문익환이 현장 활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문익환이 교회 일로 편지를 보내자 박용길이 답장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평생 주고받은 수천여 통 편지의 시작이었다.

1943년 문익환이 박용길에게 보낸 편지와 서로 주고 받았던 편지 일부
▲ 늦봄과 봄길의 편지 1943년 문익환이 박용길에게 보낸 편지와 서로 주고 받았던 편지 일부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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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병

박용길의 부친 박두환은 본디 구한말 대한제국의 무관(武官)으로서 말을 타고 임무를 수행하는 기마장교였다. 그런데 일제가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금광의 분석 기사가 되어서 평안북도의 금광촌으로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이 되자 너무 기뻐 환갑이 지난 나이에 국군에 입대하여 국군창군에 힘쓰다가 1948년 추운 겨울 강원도 홍천에서 사고로 순직,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어머니 현문경은 1907년 초등학교 교과서인 유년필독을 저술한 현채 선생의 손녀로 일찍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을 세워 교육에 힘썼다. 그 시절에 세 딸을 모두 일본에 유학을 보내며, "너희들은 남들이 못하는 교육을 받았으니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가르쳤다.

문익환은 일본신학교를 다니던 중 폐결핵으로 휴학을 하고 금강산에 요양을 가게 되었다. 박용길의 부모님은 폐결핵에 걸린 문익환이 탐탁치 않았다. 금강산에서도 계속 서신이 오가며 가깝게 지내는 것을 알게 된 박용길의 집안에서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할 박용길이 아니었다.

1944년 서울 안동교회에서 문익환과 박용길의 결혼사진
 1944년 서울 안동교회에서 문익환과 박용길의 결혼사진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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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만 살아도 좋다.
문익환과 결혼을 못하면 평생을 전도사로 일하겠다."


결심을 보이자 아버지가 문익환을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요양을 마치고 만보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던 문익환이 박용길의 부친을 보러 서울로 찾아갔다. 병원으로 데리고 가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다행이 폐병은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그는 기뻐하며 결혼을 승낙했다.

1944년 6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 새색시가 만주의 만보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시동생 문동환도 신혼집에 얹혀 살았다. 만주 만보산 교회에서 문익환은 전도사였고, 문동환은 학교교사로 있었다.

늦봄과 봄길

만주 만보산 교회 앞에서 신혼시절 문익환과 박용길, 그리고 문동환
▲ 만보산 교회에서 만주 만보산 교회 앞에서 신혼시절 문익환과 박용길, 그리고 문동환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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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북간도에서 시작됐다. 남경학살사건이 있었던 곳에서 문익환이 전도사를 하던 시절은 정치적으로 황량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훗날 문익환은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살린 것은 박용길의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박용길은 문익환이 지어준 별명대로 연분홍 코스모스처럼 작고 가늘었지만 내면이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낙천적이었다. 친정에서는 서울에서 곱게 자란 딸이 북간도 만보산까지 들어가 신접살림을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군인인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그는 담대했다. 임신 중인 몸을 이끌고 월남할 때도 휴전선을 타고 앉아 야식을 먹을 만큼 담력이 컸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 때 '문익환의 등장' 뒤에 박용길이 있었던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용길은 문익환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가장 열심히 조력하고, 가장 눈부시게 계승한 최후의 동지였다. 문익환은 자신의 호 '늦봄'에 맞추어 아내의 호를 '봄길'이라고 지어주었다. 늦봄과 봄길은 평생 한길을 걸어가는 동지였다.

한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용길이 감옥에 있는 문익환에게 보낸 편지(1981.11.22)
▲ 봄길의 편지 박용길이 감옥에 있는 문익환에게 보낸 편지(1981.11.22)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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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를 문익환 집안만큼 전면적으로 겪은 곳은 없다. 한국 근현대사의 수난은 언제나 문씨네 집안의 안방을 쓸고 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문익환 집안은 가족의 원형이 조금도 깨어지지 않게 지켜냈다.

박용길은 문익환이 옥살이를 하게 되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썼다. 혹시 중간에 가로채는 편지가 있을까봐(주: 교도소에서는 '보안'을 명분으로 편지를 전해주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날마다 한 통씩 번호를 매겨가며, 마치 수험생을 둔 어머니가 새벽마다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는 것처럼 편지를 쓴 것이다.

특히 수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바깥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의 시간들이었으므로, 박용길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일기 쓰듯이 썼다. 여기에 판에 박힌 단조로운 감방생활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더해주려고 갖가지 사진도 붙여 보내고, 시와 그림들도 적어 보냈다.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노래 악보도 가끔씩 보내주었다. 통일의 집에는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 수천 통이 보관되어 있다.

늦봄을 따라 봄길로

통일의 집을 방문한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과 판문점을 넘어오는 박용길
▲ 봄길의 활동 통일의 집을 방문한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과 판문점을 넘어오는 박용길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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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후, 문익환 목사는 방북을 결심하지만 남한 인사의 북한 방문이 당시 재야운동에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몰라 여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때도 등을 떠민 사람이 박용길이었다.

"사람이 한 번 결심했으면
실행해야지 뭘 망설여요."


그로부터 받은 탄압과 옥살이, 보수 언론들의 박해에 박용길의 맘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1994년 1월 18일 문익환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6개월 후 남북정상회담을 몇 주 앞두고 김일성 주석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 목사 장례에는 북에서 조문을 보내주었는데 김일성 장례 때에는 조문파동으로 북과의 관계가 더욱 경색되었다.

박용길은 이듬해인 1995년 김일성 타계 1주기에 문익환 목사에 대한 조문의 답례와 김일성 주석을 잃고 슬픔에 잠긴 북녘동포들을 위로하고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으로 방북을 결행했다. 이로 인해 봄길은 늦봄이 11년 4개월 동안 치렀던 옥살이를 처음으로 몸소 겪어야 했다. 봄길은 늦봄을 따라 치렀던 옥살이를 기쁨과 자부심으로 받아들였다.

늦봄과 봄길의 모습
▲ 늦봄과 봄길 늦봄과 봄길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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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은 늦봄이 갔던 모든 곳에 닿으려 했다. 문익환이 민족사의 획을 그었던 그 모든 곳에 박용길은 가 닿았다. 특히 문익환이 죽은 후에도 늦봄이 살았더라면 갔을 법한 장소가 어디인지를 헤아려서 늘 그곳에 머물고자 했다.

남편이 떠난 후, 박용길은 함께 살던 집에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써 붙이고 세상에 내놓았다. 민족사에 바쳐진 이 불멸의 사랑은 남과 북 동시에 존경을 받았다. 분단 50년 동안 단 한 쌍밖에 누리지 못한 축복이었다.

당신의 양심
-문익환

당신의 양심은
당신의 얼굴이어라
봄 여름 가을 겨울 힘든 계절
갈아들기 예순여덟 번
짧지 않은 세월
늘어만 가는 잔주름살들
어느 하나 양심 아닌 것 없어라
희끗희끗 서릿발 날리는
머리칼 한 올 한 올
어느 하나 양심 아닌 것 없어라
진주라 천리길
허둥지둥 달려와서
접견실에 들어서는 조금은 성난 얼굴
내게는 그대로 하늘이어라 땅이어라
와락 안아주고 싶은 반가움이어라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며
떨려 오는 목소리 하며
나라 일 겨레 일 언짢은 이야기 나누며
거칠어지는 숨소리 하며
핏빛으로 터지는 꽃봉오리들이 보여
글썽이는 눈물 그 아픔 하며
어느 하나 사랑 아닌 것 없어라
삼월에 다시 올께요 하며
접견실을 나서는 해바라기 얼굴
정오의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단단한 발걸음이어라




태그:#문익환, #박용길, #늦봄, #통일의집
댓글1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의 유택을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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