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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은 가장 특별한 여행지였다. 하얀 빙원, 눈 폭풍 블리자드, 혹독한 환경에 살아가는 펭귄들... 제자리로 돌아온 지금 여운이 오래 남는다. '남극에서 살아보기' 수첩 한켠에 적어놓은 버킷리스트 한 줄을 지웠다. 2015년 - 2017년 남극 장보고기지 하계 안전요원으로 생활한 파르밧 김진홍 대원의 남극탐사, 극지의 일상으로 초대한다. - 기자 말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남극 내륙은 대자연의 경이로움 자체이다
▲ 남극 내륙 상공의 헬리콥터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남극 내륙은 대자연의 경이로움 자체이다
ⓒ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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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사망. 지인 분들 연락처 부탁합니다'
 
핸드폰을 물에 빠뜨렸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문제는 나다. 단기 기억상실이라도 생긴 듯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초기화 되었다. 누구나 한번 쯤 경험해 봤을 '멘붕'이다. 여행을 떠날 때 수첩 사는 걸 좋아했다. 예기치 않은 사건과 감정들,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페이지마다 채운다. 인도 바라나시 기차표, 그녀와 함께 탔던 로컬 버스, 자이푸르 영화관 티켓이 수첩에 붙어 있다. 작은 흔적은 시간이 지나서도 강렬해진다. 아날로그의 힘이다.

남극에 오면서 수첩을 샀다. 아무래도 천천히 가야겠다. 어느 날 문득 색 바랜 수첩을 넘겨볼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길 바라본다.

눈을 채취하기위해 오염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출을 최소화해서 작업한다
▲ 눈을 샘플링하고 있는 대원들 눈을 채취하기위해 오염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출을 최소화해서 작업한다
ⓒ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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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아래는 어떻게 생겼을까?
   
내륙 캠프 생활도 적응이 되어간다. GPR(Ground Penetrating Rader)계획을 세운다. 지층구조를 살펴보는 탐사다. 왕복거리 25km 되는 거리를 도화지에 색칠하듯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눈이 있는 평원이라 걸어서 다니기는 힘들다. 스키두(Ski-doo : 눈 위를 달릴 수 있는 스노우모빌)를 헬기에 싣고 왔다.

*GPR(Ground Penetrating Rader) 지하를 관통해 보는 레이더. 땅속 지하 내부의 이상 물질 상태(광맥, 암반특성)를 확인한다. 아래로 전달된 고주파는 반사되어 컴퓨터에 그래프화 된다. 도로의 싱크홀을 발견하는 방법으로도 이용된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시도해보지 계기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혹시 배터리 방전인가? 예비 배터리와 퓨즈를 바꿔도 소용이 없다. 대략 난감이다.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추위 때문에 전자장치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눈위를 달릴 수 있는 스노우모빌, 설원을 이동 할 때 유용한 발이되는 수단이다
▲ 스키두(SKI-DOO) 눈위를 달릴 수 있는 스노우모빌, 설원을 이동 할 때 유용한 발이되는 수단이다
ⓒ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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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핸드폰 하고 똑같구나!"
 
헬기로 캠프까지 옮긴 수고가 무색해진다. 탐사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걷지 뭐!" 인간 썰매가 되어 걷기로 한다.
 
썰매에 GPR장비와 컴퓨터를 올린다. 허리 안전벨트에 로프를 연결한다. 마치 북미 최고봉 맥킨리(6,194m)를 오르는 듯하다. 맥킨리는 산악인들의 꽃이다. 히말라야 등반처럼 셀파나 포터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오로지 자기의 짐을 스스로 끌어야한다.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반지다.

  
스키두가 고장이났다. 썰매를 허리에 연결하고 설원을 왕복해 걷는다
▲ 파르밧 대원 스키두가 고장이났다. 썰매를 허리에 연결하고 설원을 왕복해 걷는다
ⓒ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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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부딪혀 본다. 처음 걷는 길이기에 조심스럽다. 혹시 모를 크레바스를 위해 피켈로 눈을 찍어 확인한다. 전방에 보이는 산을 목표로 방향을 삼는다. 이상하다. 똑같은 풍경이 계속 펼쳐진다. 한참을 가도 그대로다. 단조로운 설원에서는 거리 감각이 둔해진다. 설피가 없어 발이 눈에 빠진다.

만일을 대비해 동료 대원과 안자일렌(서로 로프를 연결해 위험에 대비하는 것)으로 로프를 묵었다. 바람을 막기 위해 완전무장 한 탓에 입김이 얼굴에 느껴진다. GPS 위치를 자주 확인해야 한다. 일직선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남아 있다.
 
썰매에 탐사장비를 싣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지표 아래로 전달된 고주파의 파장이 컴퓨터에 나타난다. 지질 구조를 분석 할 수 있다
▲ GPR 탐사 썰매에 탐사장비를 싣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지표 아래로 전달된 고주파의 파장이 컴퓨터에 나타난다. 지질 구조를 분석 할 수 있다
ⓒ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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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km 왕복을 하루 목표로 한다. 걷기 4일째, 매일 같이 썰매를 끌고 걷는다. 끊임없이 걷다보면 무아의 경지 오를 것만 같다. 구름의 움직임이 크다. 여지없는 남극의 날씨다. 화이트 아웃이다.

방향을 잃었다
 
시야가 전혀 없다. 순식간에 방향감각을 잃었다. 안개 자욱한 바다와 같다. 저시정 상태로 항해시 레이더로 물체를 확인한다. 소리신호를 보내며 충돌을 예방한다. GPS 위치에 의존한다. 안전을 지켜줄 유일한 장비다.
   
남극의 추위와 눈폭풍을 만난 탐험가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삶과 죽음의 사선을 넘는 걷기였을 것이다. 내륙 탐사 시 대원들의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치 신호를 기지에서 실시간 확인한다. 비상 상황 시 대원들은 조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어느 나라든지 가장 근접한 곳에서 구조대를 파견하게 된다. 남극에서는 모두가 하나이다.
 
바람 때문에 눈발까지 날리니 전진하기가 쉽지 않다. 반환 지점에서 눈 위에 누웠다. 하늘을 본다. 거친 호흡소리를 듣는다. 히말라야, 방랑여행, 극지에서...나는 왜 이렇게 걸어왔는가! 전생에 풀지 못한 업이 있었던 건지...

모험을 통해 만나는 발견의 즐거움이 컸다. 새로운 스토리로 전개되는 긴장감도 있었다. 인생 1막 2장을 알리는 신호가 '여행'이었다.

남극의 날씨는 순식간에 변한다. 화이트 아웃으로 한치앞이 보이지않는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방향감각을 잃지 말아야한다
▲ 화이트 아웃 남극의 날씨는 순식간에 변한다. 화이트 아웃으로 한치앞이 보이지않는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방향감각을 잃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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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여행
 
안개 속을 걷는다. '신념과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해' 자연이 내게 말한다. 비뚤비뚤 걷지만 안개가 걷힐 것이다. 온기가 다한 보온병의 차를 나눠 마신다. 다시 출발이다. 입김 때문에 마스크는 꽁꽁 얼어버렸다. 종일 추위에 노출되었다. 아려오는 손가락을 계속 움직인다. 지친 탓에 묵묵히 걸을 뿐이다.
 
가까운 곳에 캠프가 있다. 어디쯤일까? 눈발이 시야를 가린다. 고글을 벗었다. 텐트가 어슴프레 보인다.
 
'아, 다행이다!'
 
시추팀에서도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복귀 시간이 늦어졌다. 텐트 안의 온기는 훈훈하다. 영하 30도가 넘는 체감온도를 느끼다 텐트 안으로 들어오니 천국이 따로 없다. 체력을 소진하고 먹는 밥맛이 좋다. 기지와 위성전화 연락을 한다. 날씨정보를 받고 탐사 진행 상황을 알린다.

추위에 노출이 된 상태에서 빙하 시추 작업을 하고 있는 탐사팀
▲ 빙하 시추 추위에 노출이 된 상태에서 빙하 시추 작업을 하고 있는 탐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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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기억을 지배한다
 
블리자드가 불면 외부활동이 어렵다. 대원모두 식당 텐트에 모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트북으로 '무한도전 토토가 특집'을 보았다. 90년대 인기가수들이 나온다. 익숙한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젖어든다.
 
요리하는 즐거움이 크다.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면 추위도 잊는다. 김치찌개, 문어, 불고기, 곰치, 백김치를 꺼낸다. '부글부글' 끓는 찌개와 밑반찬을 세팅한다. 식량 정리를 하다 '포장 분유'를 발견했다. 어릴 적 겨울에 자주 먹었었다. 음식과 냄새는 기억을 소환해 내는 힘이 있다.
 
길거리 음식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호떡'이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집에 돌아왔을 때. 검은 흑설탕이 녹아 삐죽이 새어 흐르던 그것. 세상을 품은 맛이었다. 커다란 컵에 뜨거운 물을 넣고 하얀 분유를 타서 함께 주셨다. 입이 데일까 '호호' 불며 먹는다. 행복한 기억이다. 나의 호떡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다시 시작
 
스키두를 해체해 보기로 했다. 먹통이 된 전자제품들을 몇 대 쥐어박으면 작동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공구를 이용해 커버를 분리한다. 많은 전선들이 연결되어 있다. 접촉은 이상이 없는지 하나하나 살펴본다. 퓨즈 위치를 바꿔가며 체크를 한다.
 
'부웅 부웅' "어, 한번 더해봐" 시동이 걸린다
 
고장난 스노우모빌을 고치고 좋아하는 대원들. 처음부터 하나씩 시작하면 의외의 곳에서 희망이 보인다
▲ 스키두 고장난 스노우모빌을 고치고 좋아하는 대원들. 처음부터 하나씩 시작하면 의외의 곳에서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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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두를 이용한 탐사는 안전하고 빠른 작업을 할 수 있다
▲ 스키두 탐사 스키두를 이용한 탐사는 안전하고 빠른 작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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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걸어야 했던 짜증보다 감사의 마음이 먼저 생긴다. 탐사장비를 스키두에 연결해 천천히 움직였다. 며칠 걸었던 거리를 하루 만에 둘러볼 수 있었다. 빙하 시추팀도 계획했던 80M 얼음 샘플을 확보했다.

이제 캠프 철수를 계획한다. 코어 샘플부터 캠프장비까지 헬기로 옮기는 것도 큰일이다. 며칠째 날씨가 좋지 않다. 기지의 안락한 문명 속으로 가고 싶다. 기대가 생기니 더 간절해진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나 보다. 파란 하늘 위로 헬기가 다가온다. 오감으로 느끼는 캠프 생활을 마친다.
 
추위와 블리자드(눈폭풍)를 이겨내며 탐사를 마친 대원들과 함께
▲ 빙하탐사팀 추위와 블리자드(눈폭풍)를 이겨내며 탐사를 마친 대원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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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5년 - 2017년 남극 장보고기지 하계 안전요원으로 생활한 파르밧(김진홍 대원)의 탐사경험, 남극의 일상을 소개합니다.



태그:#남극, #남극여행, #남극빙하, #남극펭귄, #오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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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트레킹 / 남극 장보고기지 안전요원. 해난구조대(SSU)대위 전역 / 산. 바다. 여행을 통해 삶의 가치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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