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취업은 자립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게 자립은 아니니까. 그럼 나는 언제 자립할 수 있을까? 자립이 뭔데?
 취업은 자립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게 자립은 아니니까. 그럼 나는 언제 자립할 수 있을까? 자립이 뭔데?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나는 스물네 살, 대학 마지막 학기를 마친 취준생이다. 얼마 전 기말고사가 끝나고 교수님과 잠깐 인사를 하는데, 내가 마지막 학기라는 걸 알고 있는 교수님이 물었다. "이번 졸업식 때 볼 수 있으려나?" 하지만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나는 이번 졸업식에 가지 않는다. 졸업을 유예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동기들이 그렇다. 요즘에는 졸업 유예가 졸업하기 전 필수코스처럼 자리 잡았다.

요즘 나의 최대 고민은 취업이다. 나이는 나이대로 많이 먹고, 이제는 학생이라는 명분도 내세울 수 없으니(졸업 유예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취준생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루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져갔다. 아직 일하고 싶은 분야도, 직무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디라도 취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된다. 얼마 전에는 사람들과 자립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자립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자립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수백 번도 더 했지만, 무엇으로부터 자립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취업이 곧 자립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하려는 취업은, 어떤 것으로부터 자립하려 한다기보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함은 아닐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등 떠밀리듯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취업은 자립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게 자립은 아니니까. 그럼 나는 언제 자립할 수 있을까? 자립이 뭔데?

자립하지 못하는 나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생활비를 모두 충족할 만큼 벌지 못해서, 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부모님의 용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장학금을 제외한 등록금도 부모님이 모두 내주셨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버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실 수 있는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과 체력을 아껴 취업 준비를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서, 스스로 자립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자립을 하지 않으면 편하지만, 그만큼 불편한 것들도 있다. 작게는 택배를 주문하는 것부터 눈치를 보게 되고, 휴학을 하거나 여행을 가야할 때면 부모님에게 먼저 동의를 구한다. 실제로 부모님이 휴학을 허락하지 않아서 고민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꽤 많았다. 결정을 내리기 전, 부모님의 동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 상황이 자연스러워졌다. 때문에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아직도 어렵다. 스스로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많고, 어른 아닌 어른으로 사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이십 대 중반이 되도록 부모님에게 돈을 받고 생활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항상 있다. 빨리 퇴직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부쩍 자주 하시는 부모님을 볼 때면 불효자식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더 무겁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취업 잘해서 더 크게 효도하면 된다. 부모님께 도움받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받아라."라고 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혼란스럽다. 스무 살 때는 하루빨리 자립하고 싶었지만, 요즘은 그냥 취업하고 나서도 부모님과 살면서 주거비를 아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여러 가지 자립이 눈앞에 놓여있지만, 경험상 일 순위로 해결해야 할 것은 역시 경제적 자립이다. 부모님에게 돈을 받는 상황에서는 정서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자립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취업을 하면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을까? 최소한 경제적으로 자립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취업만이 해결책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취업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퇴사나 이직을 고민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나처럼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시작한 경우가 많다. 지금 당장은 자립한 것처럼 보여도 쫓기듯 얻게 된 자립은 언제, 어떤 식으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은 취업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뻐팅기며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어렵게 취업에 성공했지만, 청년 3명 중 2명은 첫 직장을 단기간 내에 그만둔다. 신한은행 '2018 보통사람 금융 생활 보고서'에 따르면, 보통의 한국 '취준생'들은 취업 준비에 평균 384만 원을 쓰는 것으로 드러났다.1) 생활비와 주거비를 제외한 값이다. 졸업 후 첫 취업까지의 평균 기간은 약 13개월 정도이다. 그와 비교했을 때 첫 직장의 평균 근속 기간은 18.7개월로 2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짧다.2) 직장을 다니면서 혹은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취업 준비에 돌입하는 것이다.

1)김현유, '취준생'들의 취업 준비 비용과 기간은 이 정도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7년 12월 7일
2)손혜정, 청년 첫 취직까지 평균 1년, 근속기간은 18개월 남짓, 중소기업 뉴스, 2017년 7월 26일


문제는 사회가 '취업'만 권할 뿐, 청년들의 자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한창 취업특강을 들으러 다니면서 느끼는 건, '어떻게 하면 잘 취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정보는 넘치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해 들려주는 곳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취업을 권할 뿐이지, 어떻게 삶을 가꾸어야 할지에 대해서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설사 그런 것을 알려주는 곳이 있다 해도, 청년들이 관심을 둘 여유는 없다. 특히 취준생이 취업 외의 다른 걸 생각하는 건 사치에 가깝다. 나와 같이 이번에 막 학기를 다닌 친구는 입사지원서만 60군데를 넣었고, 모두 떨어졌다. 좌절을 느끼는 친구를 보면서 '친구는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는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불안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행복한 동시에 죄책감이 든다. 스펙이 되지 않는 일은 모두 의미 없게 느껴진다.

등 떠밀리듯 취업에 성공하면 그걸 보고 자립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경쟁처럼 취업을 하고, 모두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한 삶을 사는 사회는 어떠한가? 경제적 자립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렇게 급급하게 이루어질 경우, 오래가지 못하고 불안정한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그 시대 여성들이 왜 작가가 되기 어려운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모두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

자립은 단순히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스스로 경제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넘어서 삶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더는 죄책감 없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단군 이래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청년들에게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은 자립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면 그게 자립한 거 아니냐"고 누군가는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다음 단계의 자립을 위한 디딤돌로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을 청년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기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주체적이지 못한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자립하지 못한 청년이나, 자립한 청년이나 고통받고 있다.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 높은 물가 등, 청년 개인과 그 가족이 부담해야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스무 살이 돼서도,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어도 자립하지 못한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는 "취업 잘해서 더 크게 효도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취업을 잘하면 어느 정도 죄책감은 덜어낼 수 있겠지만, 그게 진짜 내 인생이 아니라면 그땐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선택을 내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적절히 요청하는 것도 모두 살아가는 데 중요한 능력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조급하게 '취업을 잘하는 것'에 앞서 사회가 우리에게 뒷받침해야하는 필수적인 것들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해당 칼럼은 서울청년정책LAB 블로그 및 페이스북을 통해 2018년 12월 29일 발행된 칼럼입니다.


태그:#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서울청년정책LAB, #자립, #취준생, #청년취업
댓글

청년오픈플랫폼 Y는 청년문제 해결을 위해 능동적인 민관협치를 통한 자발적 시민네트워크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단법인입니다. 청년정책 연구, 거버넌스 교육 및 공론장 운영등의 사업을 진행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