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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로 고통스러운 이 봄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만큼 적절한 문구도 없다. 더욱이 이 시는 모래 바람 날리는 몽골(胡地)로 시집간 왕소군의 애절한 마음을 표시하는 절창이기 때문이다.

연일 봄 같지 않은 봄으로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려 있다. 정부도 쉽사리 답을 찾지 못한다. 일반에서는 중국을 원망하는 성토가 넘치고, 정부는 중국과 공조를 이야기하지만 중국은 들은 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세먼지의 원인을 더 과학적으로 보라고 훈수까지 둔다.

같이 고민하면서 풀어도 쉽지 않은 문제인데, 두 나라는 서로를 불신하기 바쁘다. 지금 중국발 불신의 뿌리는 박근혜가 결정하고, 황교안이 서둘러 배치한 사드다. 중국은 십수년 전부터 한국에 사드(MD의 한 단계로 생각함)가 배치되는 순간 한중간 교류의 마지노선을 넘을 것으로 말해 왔다.

그런데 한국의 한 집안이 이 사드 배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한 곳이 있다. 바로 한국에 2400명 정도가 거주하는 광동진씨(廣東陳氏)다. 이 집안의 역사는 목포MBC가 2월에 방송했고, 3월에 재방을 준비중인 <진린의 후예>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위치한 이곳은 깊은 이야기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찾는 이가 많지 않다
▲ 고금도 이순신 유적지 기념비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위치한 이곳은 깊은 이야기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찾는 이가 많지 않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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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시작하는 주말에 그들의 역사가 있는 현장을 둘러봤다. 1598년(선조 31) 11월 18일과 19일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격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500여척의 왜선을 물리쳤지만, 이순신 장군은 안타깝게 전사한다.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전사에 피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시신을 당시 조명연합군의 본진인 고금도 앞 묘당도의 월송대에 모셔 80일간 있다가 충남 아산 선영으로 이장한다.
  
멀리서 본 모습과 시신 모셨던 장소. 시신을 모신 곳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80일간 모셨던 고금도 월송대 멀리서 본 모습과 시신 모셨던 장소. 시신을 모신 곳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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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을 지나 고금도에 들어서 작은 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충무사가 나온다. 충무사의 원래 이름은 관왕묘다. 1598년 진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전쟁의 신 관우를 모시고, 승리를 기원하기 위한 사원을 세운 것이다. 이후 서쪽에는 이순신을 동쪽에는 진린을 모시는 사당의 역할을 했다. 1781년에는 정조가 이 뜻을 기려 '탄보묘'(誕報廟 구원군을 보내준 은혜에 보답하는 사원)라는 편액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가 되자 일본은 이 사당을 치욕스럽게 생각해 관우상을 부셔 바다에 버리고, 제향을 중단시킨다. 또 고금도와 묘당도 사이를 간척해 당시의 색채를 모두 지워버렸다. 이후 1953년부터 유적이 복원되지만 원래의 이름 대신에 이순신을 모시는 뜻의 '충무사'로 개칭한다.
  
지금 충무사의 원래 이름은 관왕묘다. 현재는 충무사 서제 뒤에 관왕묘비가 자리하고 있다
▲ 충무사 관왕묘 지금 충무사의 원래 이름은 관왕묘다. 현재는 충무사 서제 뒤에 관왕묘비가 자리하고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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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유적은 많이 복원되었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쓸쓸했다. 야트막한 산에 자리한 사당으로 올라가면 동제와 서제가 나온다. 현판조차 없는 서제의 뒤에 '관왕묘비'와 안내판이 서 있었다. 관왕묘비는 관왕묘의 건립시기와 정유재란을 이끈 이순신, 진린의 행적을 잘 기록한 글이다.

그간 드라마를 통해 봤던 진린은 용렬한 사람처럼 묘사되어, 사람들은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는 선조가 보낸 선물을 보고, "정벌에 나서서 한 번도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마음 속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며, 일부만 받고 되돌려주기도 했다. 선조가 진린에 대해 물었을 때 이항복이나 유성룡 모두 그가 있어야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선조 31년 6월 23일).

실제로 진린이 이끈 수군함대는 전함 500척, 수병 5000명, 해병·보병 13,900명이었고 조선 수군은 23척 병력 500명 정도뿐이었으니, 명나라 수군이 없었다면 전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린은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봐서 전쟁이 끝나면 명나라에 같이 가자고 권할 정도였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장군은 보천욕일(補天浴日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다는 뜻)의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라고 평했다.

그런데 광동성 옹원현에 살던 진린의 손자 진영소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1644년 1월 이자성의 난 등으로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뀐다. 진영소는 수병 다섯명과 남오도 수군기지를 출발해 조선으로 건너온다. 목포 앞 보화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사연을 말하자, 이들은 진린의 유적이 있는 고금도로 이동해 관왕묘에 배례하고, 고금도 구석리에 정착한다.

이후 이 집안은 해남 해리를 거쳐서, 해남 산이면으로 이동한 후 이 마을이름을 황조(皇朝: 명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벼슬을 한 후예가 사는 마을)마을이라고 이름 짓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황조별묘'라는 사당을 만들어, 진린 장군과 중시조인 진영소 등을 배향하고 있다.

고금도에서 해남 산이면 황조별묘까지는 약 120킬로미터 정도의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은 한중간에 아름다운 교류의 역사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훌륭한 길이다.
  
동아시아 바다에 평화를 이끈 장보고의 기상이 살아있다
▲ 완도 청해진 장보고상 동아시아 바다에 평화를 이끈 장보고의 기상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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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장보고가 활동했던 청해진의 본진 장도 옛 성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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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 길의 가운데는 장보고(? ~ 846)의 청해진 유적지가 있다. 해상왕 장보고는 어릴 때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바다를 평정하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 왜구 등 불법이 난무하던 바다가 평화를 찾아, 물자와 문화가 움직이는 시대가 됐다.

고금도에서 장보고대교와 신지대교를 건너는 아름다운 바닷길을 25킬로미터 정도 가면 장보고의 고장 청해진이 나온다. 역시 완도군에 속하는 이곳은 장보고 동상, 장보고기념관, 장도 청해진 유적지 등이 잘 보존되고 있다.

청해진 유적지에서 다시 완도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달마산 미황사가 있고, 북쪽에는 두륜산 대흥사가 있다. 두 사찰 모두 당나라 시대부터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사찰이다.
  
진도와 해남을 사이로 있는 명량해전의 현장. 죽고자하면 살것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문이 보인다
▲ 명량해전의 격전지 우수영 진도와 해남을 사이로 있는 명량해전의 현장. 죽고자하면 살것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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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찰들에서 다시 50여 킬로미터를 서쪽으로 가면 명량해전이 치러진 우수영관광지가 나온다. 이곳은 중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 싸움에서 승리가 없다면 노량해전을 통한 승전이 없다는 점에서 꼭 둘러볼 곳이다.
  
광동진씨의 본향인 이곳은 진린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하단에 한중우의 진린장군이라고 쓴 비석의 의미가 실현될 필요가 있다
▲ 해남군 산이면 황조별묘 광동진씨의 본향인 이곳은 진린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하단에 한중우의 진린장군이라고 쓴 비석의 의미가 실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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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시 북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면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별묘가 있다. 황조별묘는 관광레저형 기업도시로 선정된 솔라시도 구성지구가 인접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영암호가 펼쳐진 이곳이 광동진씨들의 본향이 된 곳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아는 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큰 이들은 한중수교(1992년) 2년 후인 1994년 6월 조상의 탄생지인 광동성 옹원현을 방문하고 교류를 재개한다. 자신들이 한중 우정의 상징임을 아는 광동진씨들은 사드 배치에 대해 항의 서한을 내는 등 한중이 멀어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이런 역사를 감안하면 고금도 충무사에서 해남군 산이면 황조별묘로 이어지는 120여 킬로미터의 길은 한중 우정의 상징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전남 지역의 아름다운 음식과 달마산, 두륜산, 월출산으로 이어지는 산들의 풍경을 놓칠 수 없다.

제대로 된 봄을 찾기 위해서는 한중간 화합이 절실하다. 이 길에서 지나온 아름다운 한중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태그:#이순신, #진린, #충무사, #관왕묘, #광동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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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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