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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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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ᄒᆞᄂᆞᆫ(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확고ᄒᆞ게(하게) ᄒᆞᆷ을(함을) 원ᄒᆞ여(원하여) 한국의 富强之實(부강지실)을 認ᄒᆞᆯ(인할) 時(시)에 至(지)하기까지 此(차) 목적으로써 左開(좌개) 조관을 약정ᄒᆞᆷ(함).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에 由ᄒᆞ여(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ᄒᆞᄂᆞᆫ(하는) 관계와 사무를 감리지휘ᄒᆞᆷ(함)이 可ᄒᆞ고(가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ᄒᆞᄂᆞᆫ(하는)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ᄒᆞᆷ(함)이 可ᄒᆞᆷ(가함).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ᄒᆞᄂᆞᆫ(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ᄒᆞᄂᆞᆫ(하는) 任(임)에 當ᄒᆞ고(당하고)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 정부의 중개에 由치(유치) 아니하고 국제적 성질의 갖는 하등 조약이나 또한 약속을 아니ᄒᆞᆷ(함)을 約ᄒᆞᆷ(약함). (아래 생략, 괄호 안은 기자 주)"


1905년 11월 17일 한일 간에 체결된 을사조약의 앞부분이다. 우리에게 '을사늑약'으로 널리 알려진 이 문서의 형태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모든 문장이 'ᄒᆞᆷ'(아래 함)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이른바 '개조식' 문장이다. '개조식'은 번호를 붙여 가며 짧게 끊어 중요한 점이나 단어를 나열하는 글쓰기 방식을 말한다.

100년도 더 지난 문장 형태를 아직도 쓴다니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이 문장의 형태는 오늘날 한국 공직사회에서도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공문서는 '~함'이나 '~음' 등으로 끝나는 개조식 문장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이런 식의 개조식 문장을 가르치진 않는다. 하지만 사회에 진입하면 개조식 문장의 사용에 노출되고 또 강제된다.

갑오경장(1894) 이후 대원군을 축출한 당일 제정·공포된 칙령 중에 가장 앞머리에 온 것은 '공문식제'(公文式制)였다. 이 공문식에 의해 칙령과 의정부령, 각부령(各部令)들 근대적 법령이 등장했다. 또한 공문식을 살펴보면 법률이나 칙령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처리되는지도 정리돼 있다.

동시에 문서사무 역시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모방했다. 갑오경장 자체가 일본의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기안문을 비롯한 공문서에는 일본 '문어(文語)체'가 적용되었다. 문장의 끝이 '~함' '~임' 등으로 맺어지는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공문서에는 이런 현상이 이미 존재했다.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 제11조는 다음과 같다.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함.(天皇ハ陸海軍ヲ統帥ス)"

조선에서 순한문 문장의 시기를 지나 한글이 공공의 영역에서 사용되던 시기의 정부 문서를 보면 대개 '~니라'(하니라)로 문장이 끝나고 있다. 하지만 갑오경장 이후 그러한 흐름은 사라지고 '~함' '~음' '~임' 등으로 문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2019년인 지금도 여전히 "개조식으로 작성하라"

하지만 우리 공직사회는 이런 '개조식' 문장 형태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오고 있다. 법률 조항에는 '~한다' 등이 사용되지만, 요강(要綱)처럼 설명이 필요한 대목에 개조식 문장이 사용되고 있는 모양새다. 1949년 4월 23일 체결된 '한일통상 요강'의 첫 문단이다.

"본 요강은 일본국과 통상을 협정함에 있어서 대한민국정부가 취할 한일통상의 기본방침과 그 방법기타절차의 요령을 정함을 목적으로 함."

이 문서를 보면 '~함'과 '~것'으로 끝나는 개조식 문장이 주로 사용됐다. 해방이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었던 개조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국회도서관 가이드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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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정부기관에서는 계속 개조식 문장 사용을 강제한다. 다음은 올해 한 정부 기관의 업무문서 작성 매뉴얼이다.

"1. 개요 : ○ ***회답서는 업무편람과 이 자료에 따라 작성하되, '스타일' 등을 준수함으로써 회답서의 형식적 통일성을 유지함 ○ ***도 이 자료를 준용하여 작성함"

뿐만 아니다. 아예 "개조식으로 작성하라"고 명시해놨다.

"문장은 개조식으로 작성함( 한다 / 하였다 / 하고 있다 → 함) : - 과거시제(하였다)의 경우 구체적인 시기(연월일 등)를 명시하여 '~함'으로 표기하여도 의미의 혼동이 없도록 함 - 간결하고 명료한 기술을 위해 가급적 1개의 문단은 1개의 문장으로 작성하고, 1개의 내용을 담을 것을 권장함(1개 문단 = 1개 문장 = 1개 내용) - 가급적 단문으로 작성함(가급적 2회 이상의 '~하고 / ~하며'의 사용을 피함) - 마침표는 사용하지 않음. 단, 한 개의 문단에 두 개 이상의 문장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앞쪽 문장 끝에 사용함"

공문서를 지배하는 개조식 글쓰기, 이제 청산되어야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지난 2017년 7월 30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나라 공문서를 지배하는 개조식 글쓰기는 주어가 불분명하여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또, 때로 심각한 책임회피의 방편처럼 보이며, 문장 간 논리적 연관성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국민에게 진정성 있게 소통해야 할 정부가 사용할 글쓰기 양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 국가의 사회, 특히 공직사회의 정신은 문서에 남겨진 기록으로 표현된다. 문서의 형식에는 정신과 의식 그리고 문화가 직접적으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왜 일제는 'ᄒᆞᆷ'의 '문어체' 혹은 '개조식' 형태를 강요했을까? 강력한 권위주의의 형식으로써 민족과 창의의 정신과 의식을 억압하고 상명하복, 관존민비의 복종을 강요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공직사회에 오랫동안 뿌리 박혀왔던 '개조식 문장 사용' 악습은 이제 청산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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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단대학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받았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대한민국민주주의처방론>,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유신과 전두환정권에 반대해 수배, 구속된 바 있으며,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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