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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가 통찰력 있게 그려낸 여성 서사를 통해 여성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여성에게 의미 있는,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여성 서사가 우리 삶에 스며들길 기대합니다. - 기자말

6년 전 글쓰기 수업 때 내 글을 첨삭하던 강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전형적인 여류 작가 스타일이네요."

강사는 이 문장 뒤에 다른 말을 더 잇진 않았지만, 그가 내게 하려던 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는 여류 작가 스타일로 쓰지 말 것. 할 말이 있어도 불필요한 말일 것 같으면 굳이 하지 않는 나는 강사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뒤로도 계속 쓰던 대로 썼을 것이다. 여류 작가 스타일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모르는 스타일을 어떻게 따라 할 수 있는가.

만약 내가 글쓰기 스타일에 관해 뭔가를 알고 있다면, 그건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남류 작가 스타일'일 거였다. 내가 아는, 좋아하는 작가 대부분은 남성 작가였으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 읽은 책을 쓴 작가는 폴 오스터이거나 헤르만 헤세이거나 줄리언 반스였다. 아주 드물게 제인 오스틴이나 버지니아 울프, 프랑수아즈 사강 등 여성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그저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그 이야기가 누군가의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분류돼 사라진 이야기들, 이런 식으로 분류되기 싫어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지 어렴풋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아래의 글을 만났을 때 나는 이 글을 쓴 '여류 작가' 캐럴 실즈의 마음을 너무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소설을 쓰려는 까닭은 소설 읽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인생 혹은 내가 알 법한 여성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소설을 읽고 싶었으나 그런 소설을 찾지 못한 채 1970년대를 보냈고, 끝내 찾지 못한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자 했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 속 '그 남자들'은 마음껏 본인의 야망, 욕망, 비겁함, 지질함,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성공과 실패, 행복과 환희, 절망, 좌절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그 남자들'의 삶에 공감하며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이러한 이해를 통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설 속 '그 여자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남자들'을 기다리거나 포기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책에서 '그 여자들'의 삶은 축소되기 일쑤였고, 마치 살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평면적이었기에 독자들은 그녀들에게 깊이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녀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녀들은 우리를 위로해 주지도 못했다. 

'그 여자들'은 주로 현관문 안쪽에 자리를 잡은 채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떤 기분으로 아침을 맞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며, 어떤 생각으로 침대에 누울지 궁금했다.

내 엄마와 내 언니의 삶이자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현관문 근방에서 벌어지는 철저하고 분주하면서도 일면 무력한 삶. 그녀들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웃게도, 울게도 만들어주는 삶. 나는 이런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리고 <스톤 다이어리>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캐롤 쉴즈는 그간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를 직접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톤 다이어리>를 읽은 독자들은 머시 스톤, 클래런틴, 데이지의 삶에 깊이 공감했으며, 그녀들만큼 그녀들 남편 카일러, 매그너스, 바커를 진심으로 연민했다. 그리고 소설가가 인물들을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으로 자기 삶을 바라보게 됐으며, 그 시선에 힘입어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삶을 예전보다 더 옹호하게 됐다.  

그녀들은 전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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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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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한 여인의 일생을 자서전 형식으로 다룬다. 본인이 임신한 줄도 모르다가 유일하게 열정을 쏟던 음식 만들기에 열중하던 중 아이를 낳고 숨을 거둔 머시 스톤의 딸 데이지. 아이는 냉담한 남편과 실망스러운 세 아들에 절망한 채 옆집 새댁 머시 스톤에게 애정을 주던 클래런틴에게서 길러졌다.

공기 중에 떠도는 엄마의 마지막 숨결을 붙잡으려 허공을 향해 손을 뻗던 아이는 알코올 중독자인 첫 남편이 신혼여행 중 호텔 창 밖으로 떨어져 죽는 걸 목격했다. 인생에 남은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캐나다 여행길에 올랐고, 그 길에서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바커를 만났다. 여인은 재혼해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소설은 데이지의 삶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 인물들도 함께 스케치하는데, 그 주변 인물들은 모두 데이지와 가계도로 얽혀 있다. 나는 왜 이 소설이 가계도를 보여주면서 시작했는지 궁금했는데, 소설을 읽다가 문득 가계도만큼 한 인물을 관습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가계도 안에서 우리는 누구와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와 결혼하거나 이혼했으며, 누구누구를 낳은 사람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이렇듯 혈연으로 맺어진 관습적인 관계가 관계의 전부인 채 살아갔으며, 결혼 후에는 특히 그랬다. 머시도, 클래런틴도, 데이지도.

세 여자는 모두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며 평범하게 살았다. 이 책이 걸작인 건, 이렇듯 평범한 삶을 산 인물들이 한편으론 모두 전복적인 면을 지니고 있어서다.

겉으론 가계도 저 위쪽의 엄마나 아내들처럼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듯 살고 있지만, 결코 자아를 잃지 않았다는 데서 그녀들은 전복적이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인에서 멈추지 않고, 냉담한 남편을 이해만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에서 멈추지 않고, 그녀들은 그녀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린다.

머시와 클래런틴

머시는 여자에 숙맥이었던 남편 카일러가 새롭게 눈 뜬 정열에 밤마다 그녀에게 달려들 때, 남편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머시는 냉정한 아내는 아니다. 그녀는 "여자들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알고 있는 대로 쾌감을 느끼는 시늉"을 할 정도로는 남편을 존중하며,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하는 남편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차릴 정도로는 가정생활에 만족한다.

그렇다고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에 답하기 위해 억지로 내면을 꾸미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천국은 남편의 사랑이 깃든 가정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부엌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천국을 위해 매일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머시 스톤은 그녀가 만든 음식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음식을 만들 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음식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며 감격했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작은 천국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줄 알았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은 느끼지 않으며.

클래런틴은 25년 전에 남편 매그너스에게 청혼을 받았다. 그는 어쩌면 부드러운 남자일지도 몰라, 하고 기대했지만 남편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클래런틴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그녀의 가사 노동을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았다. 남편과 두 아들은 채석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분명 그들의 아내이자 엄마가 집에서 "게으름과 흥정하며 꿈속 같은 나날을 보내리라 생각할" 게 뻔했다. 그녀는 이런 "생각만으로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결혼 생활에 지쳐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삶에서 허기를 느끼고 있다는 걸, 본인이 고독하다는 걸 알았다. 일주일간의 여행으로도, 여성을 위한 클럽 활동으로도 떨쳐낼 수 없는 고독이라는 걸 알았다. 이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냉담한 남편을 버렸다. "잘 있어요"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폭력적이지 않아도 20년이 넘는 시간 내내 아내에게 냉담했다면, 아내는 남편을 버릴 수 있다. 그녀는 옆집 새댁 머시 스톤이 죽으며 낳은 갓난아기 데이지를 품에 안고 큰아들 바커 집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남편 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클래런틴은 "이제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었다. 믿음은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데이지의 삶은 어땠을까. 이 한 권의 자서전을 어떻게 몇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데이지의 아이들은 엄마가 죽자 엄마의 삶을 이렇게 평가한다.
 
"엄마는 되는대로 살아오셨어."
"그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데이지는 정말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 모르지만, 데이지는 그렇다고 해서 가계도에 올려진 이름만이 전부인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거나 다른 방식의 삶을 그리워하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부당한 헌신을 요구하지도, 타인의 무례를 허용하지도, 순간순간의 욕구와 끌림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조금씩 데이지를 좋아하게 됐는데, 알코올 중독 남편이 신혼여행 중에 죽고 나서 데이지가 보인 반응이 특히 좋았다.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이 데이지의 삶을 완전히 망쳐놨을 거라, 이제 그녀는 평생 명랑해지지도 슬픔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거라 예상했지만, 데이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그녀가 슬프지 않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슬프냐고? 무엇 때문에? 해럴드 때문에? 글쎄, 그건 아냐. 슬프다면 그건 꼴사나워진 처지 때문이지. 자기가 만든 엄청난 사건이 자신을 집어삼켰으니까."

데이지는 이 비극적인 사건이 수년째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며 그녀에게 더 슬퍼하라, 더 울어라, 더 가엾어져라, 하는 통에 억울함을 느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사건이 닥쳐왔을 때 왜 남자에겐 영예가 되는 반면, 여자에겐 무거운 짐이 되어야 하지는 의문을 품었을 뿐이었다.

왜 여자가 겪은 일들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여자의 삶을 잡아먹어야 할까, 그전에도 평범한 데이지였으면 지금도 평범한 데이지여도 되는 것 아닌가, 나의 진정한 자아는 그 사건으로 훼손되지 않은 채 여기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데이지는 사람들이 무례하게 수군거리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앞으로 남은 가능성을 헤아릴 만큼 용기 있고 독립적인 여자였다. 혼자 캐나다로 떠나며 데이지는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부디, 제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그리고 데이지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그 상황을 내 것으로 만든다. 그녀는 클래런틴의 첫째 아들 바커를 남편으로 맞는다. 본인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또는 자신이 어떤 일을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던 남자, 선량하고 건실한 바커, 죽기 전 마지막 편지를 통해서야 아내를 사랑했다고 말한 바커.

머시, 클래런틴, 데이지는 소설 주인공이 되기 위해 잘생긴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기차에 치여 죽거나, 어리석은 욕망에 들떠 바람을 피우다가 비소를 먹고 죽거나, 자신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던 남자가 권총 자살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창녀나 악처나 살해 사건 피해자가 될 필요 없었다. 그녀들은 우리 엄마들이 살았던 방식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런 그녀들의 존재가 지금 이 순간 엄마나 아내로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희망이 되는 건, 그녀들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존중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관습적이지만 그렇다고 순진하지 않은 그녀들이 우리 모습 같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뛰어난 건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이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하면서도 은은한 사랑은 그녀들의 남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내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제 사랑에만 충실했다고 하여, 아내에게 무심하고 냉정했다고 하여, 그들의 삶 전체가 오해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느 한 역할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삶 전체를 실패한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이 소설에서 가장 낭만적이면서 위대한 성취는 머시 스톤의 남편 카일러와 클래런틴의 남편 매그너스를 통해 드러난다.

그녀들이 그들 곁을 떠나고 난 뒤 그들은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다. 괴로워하며 주저앉거나 자기 합리화를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남들이 보기에 안쓰러운 남자, 실패한 남자가 됐지만 막상 그들에겐 남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랑을 지키려는 시도,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아내의 마음을 뒤늦게라도 들여다보려는 시도. 그들의 시도는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한 인간의 위대한 성취로 끝까지 독자와 함께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시도는 또다시 우리에게 희망이 된다. 우리를 더 나은 인간, 더 멋진 인간, 마지막 숨이 멎는 순간까지 바라볼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건, 시련 뒤에 우리가 취하는 태도라는 걸 말해주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스톤 다이어리

캐롤 쉴즈 (지은이), 한기찬 (옮긴이), 비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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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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