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사태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매일 수많은 분석과 주장과 논란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다. 오랜 역사를 가진 문제이고 법적으로도 복잡한 문제인 만큼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리즈에서는 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요 쟁점들을 정리해보기로 한다[편집자말]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30일 오후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18.10.30
▲ 대법원 전원합의체, 일제 강제징용 승소 판결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30일 오후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18.10.30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이런저런 비판이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 그나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비판 한 가지만 짚어두기로 한다.

그것은 대법원 판결이 2005년 '한일협정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이하 '공동위') 결정(이하 '「결정」')을 뒤집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측 반발의 주요 논거 중 하나인데, 오히려 국내에서 더 많이 제기되고 있는 비판이기도 하다. 이른바 '보수'언론들이 「결정」과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논의 과정을 기록한 「국무총리실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등대책기획단 활동 백서」(2007.10; 이하 '「백서」')를 인용하면서 제기하는 비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쟁점이나 용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정」과 「백서」의 전체적인 맥락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일부만을 떼어 논지를 전개하는 등 문제가 많다.

다만, 「결정」과 「백서」 자체가 충분히 명확하지 못하다는 측면도 있다. 특히, 「백서」에는 공동위의 기록뿐만 아니라, 그 하부 기구인 민간위원회, 분과위원회, 관계부처 차관회의 등의 기록도 담겨 있는데, 다양한 쟁점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검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그 기술이 매우 소략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용어 사용이나 분석에서 엄밀하지 못한 부분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꼼꼼히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래에서는 우선 공동위의 최종결과물인 「결정」의 문언과 맥락을 검토하고, 그 중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서」를 참조하는 방식으로 검토해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조약 해석의 경우와 같은 방식이다.

「결정」은 무엇인가

먼저 2005년 「결정」이 나오게 된 경위부터 확인해둔다. 2000년 5월 1일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부산지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을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다수의 대일과거청산소송이 제기되었는데, 이들 소송에서도 일본 소송에서와 마찬가지로 「청구권협정」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원고 측이 한국 정부에게 한일회담 관련 문서의 공개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 요청은 거부되었고, 그래서 피해자들은 2002년 10월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이 2004년 2월 13일에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했고, 한국 정부는 일단 항소했으나, 2004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관련 문서를 전면공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1월에 대책기획단과 공동위를 구성하여 문서 공개에 대한 대책을 세운 후, 2005년 8월 26일에 한일회담 관련 문서를 전면공개하면서, 공동위의 입장을 「결정」으로 발표했다.

요컨대, 소송을 매개로 한 피해자들의 공개 요구와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이 맞물리면서, 통상 30년이 지나면 공개됨에도 40년 가까이 창고 속에 쌓여 있던 한일회담 관련 문서가 전면공개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동위는, 21명의 구성원 중 국무총리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재경부 등 6개 부처의 장관과 국가보훈처장, 국무조정실장, 청와대 민정수석이 위원으로 참여한 총리 자문기구였으며, 차관회의를 거쳐 상정된 안건에 대해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 기구였다. 따라서 공동위의 「결정」은 한국 정부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하여 틀림이 없다.

「결정」 - 「청구권협정」의 법적 효력 범위

「결정」은 우선 "한일 청구권협정의 법적 효력 범위 등"에 관해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ㅇ 한일 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
ㅇ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군(軍)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음
-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도 한일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음

위의 내용 중, 「청구권협정」이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부분은 1965년 이래의 한국 정부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군(軍)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음"이라고 한 부분이다. 이것은 「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할 때 논리적으로 당연히 뒤따르게 되는 명제이지만, 「결정」 이전에는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은 것이었다. 즉, 이 부분은 한국 정부가 한일회담 문서 전면공개에 즈음하여 그 이전까지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았던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여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만 남았다?

그런데 비판론자들은 「결정」의 이 부분을,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세 가지,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 사할린동포 문제, 원폭피해자 문제만이다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라고 주장한다.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그 세 가지만 한정적으로 열거하려고 했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고, 세 가지를 하나의 문장 속에 병기했어야 한다.

그 세 가지는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예시라고 보아야 한다. 「결정」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부는 또한 일제 강점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외교적 대응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기로 하였음"이라고 하면서, "'해남도 학살사건' 등 일본군이 관여한 반인도적 범죄 의혹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을 한 후 정부 대응방안을 검토"라고 덧붙이고 있으니 더욱 더 그렇게 해석해야 맞다. "'해남도 학살사건' 등"도 "반인도적 범죄"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서」에는 "'해남도 학살사건', '731부대 생체실험' 등"이라는 기술도 나온다(89쪽. 이하 괄호 안의 쪽수는 「백서」의 해당 쪽을 가리킨다).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는 왜 따로 규정했나

다만, 예시라고 볼 경우에도, 왜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만 별도의 항으로 특별히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에 관해서는 「백서」 중 아래의 부분들이 주목된다. 
 
협상 당시 논의되지 않은 원폭피해자, 사할린한인의 보상 문제 등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일본도 인정하고 있음(68쪽)

사할린 한인동포, 원폭피해자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외교적 협의를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추가적 지원대책을 강구(89쪽)
 

요컨대, 공동위는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일본도 인정"했고, 일본이 이미 일정한 지원을 한 상황에서 "추가적 지원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반인도적 불법행위 중에서도 특수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만 특별히 언급한 이유이다.

「결정」 - '강제동원'!

「결정」은 위의 원칙적 입장 표명에 이어, "한일협정 협상 당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하여 요구했던 강제동원 피해보상의 성격, 무상자금의 성격, '75년 한국 정부 보상의 적정성 문제 등"을 별도의 항목으로 설정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ㅇ 한일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함
ㅇ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임...
ㅇ 그러나 '75년 우리정부의 보상 당시 강제동원 부상자를 보상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도의적 차원에서 볼 때 피해자 보상이 불충분하였다고 볼 측면이 있음
 

이와 같이, 「결정」에는 분명히 "강제동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있고, 그에 따른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이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공여한 무상 3억불에 "반영되었다고"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인정했다'라고 읽힐 수 있는 소지가 분명히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비판론자들은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동원한다.

대법원 판결의 판단

우선, 그에 대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의 판단은 아래와 같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는, 청구권협정 당시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었다고 하면서, 1975년 「청구권보상법」 등에 의한 보상이 '도의적 차원'에서 볼 때 불충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제정된 2007년 희생자지원법 및 2010년 희생자지원법 모두 강제동원 관련 피해자에 대한 위로금과 지원금의 성격이 '인도적 차원'의 것임을 명시하였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2007년과 2010년의 희생자지원법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2007년 법률 제8669호)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2010년 법률 제10143호)이다. 이 법률들은 "피해자 보상이 불충분하였다"라는 「결정」의 판단에 따라 제정된 것이며, 이들 법률에 의해 '강제동원 희생자', '강제동원 생환자', '미수금 피해자'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제1조)이 지원되었다.

대법원 판결의 위의 판단에서 주목되는 것은 「결정」과 지원법은 어디까지나 '도의적 책임', '도의적 차원', '인도적 차원'에 관한 것이라고 짚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결정」도 지원법도 강제동원 문제의 '법적 차원'에 관한 것은 아니며, '법적 차원'에 관한 판단은 대법원이 한다는 취지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법적 책임'에 관한 대법원의 판단은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을 토대로 우리의 문제에 관해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1) 「결정」에서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는 무상 3억불에 반영되었고 그래서 한국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차원"에서의 반영, "도의적 차원"에서의 책임으로서 인정한 것이며, '법적 차원'에서의 판단은 아니다.

2) 개별 사건에서 강제동원과 「청구권협정」의 '법적 관계'에 관해 최종 판단을 하는 권한은 대법원이 가진다.

3) 대법원은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는 '법적 판단'을 내렸다.

4) 따라서 대법원 판결은 「결정」을 뒤집은 것이 아니다.


왜 '강제동원'인가

위와 같이 대법원 판결의 논지만으로도 비판에 대한 반박은 가능하다. 다만 「결정」에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결정」은 왜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일까?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는 「청구권협정」과 그 부속문서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일본 측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애당초 등장할 수 없는 용어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대일청구요강」 제5항에는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이라고 되어 있다. 1970년대에 한국 정부가 청구권자금으로 보상할 당시의 관련 법률들에도 "피징용사망자"라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이 굳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용어 사용의 엄밀성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서」에는 '징용', '강제동원', '강제징용'이라는 용어가 별다른 구별 없이 호환적으로 사용되어 있다. 「결정」이 발표된 당일인 2005년 8월 26일에 개최된 제3차 공동위의 회의자료에도 "강제동원자 미수금"(41쪽)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결국 「결정」은 '징용', '강제동원', '강제징용' 사이의 법적인 차이에 대한 명확한 정리를 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써버렸다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결정」의 '강제동원'과 대법원 판결의 '강제동원'은 다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결정」의 '강제동원'과 대법원 판결의 '강제동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결정」의 관련 부분을 다시 한 번 인용한다. 
 
한일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함 

즉,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요구하지 못하고,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으며, 그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라는 것이다.

이 부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2005년 8월 26일 제3차 공동위 회의자료에서 발견된다. 
 
-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강제동원이 해방 전 일본법에 의한 합법행위였으므로 한국인은 보상청구권이 없다고 주장하였고,
- 반면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 자체의 불법성을 주장하는 대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고통받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정치적 차원에서의 피해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함
- 따라서, 무상자금에 강제동원 피해보상금이 반영된 것이 정치적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
- 그러나 피해자 개인들이 "강제동원은 일제의 불법적인 한반도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물질적 총체적 피해"라는 법적 논거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42-43쪽)
 

그리고 2005년 7월 22일의 제3차 차관회의와 8월 26일의 제3차 공동위 직전에 개최된 것으로 보이는 제4차 차관회의의 기록에 아래와 같은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1) 한국은 "식민지 불법성에 근거해서 강제동원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89쪽).

2) "한국 정부가 현시점에서 식민지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법적 차원(징용 자체의 불법성)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81-82쪽).

3) 한국 국민의 "징용 자체에의 불법성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이 협정에 의해 소멸되지 않았"으며(82쪽), 따라서 "한국민이 식민지 불법성을 근거로 일본 정부에 보상을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89쪽).
 

「백서」에서 확인되는 위의 내용들로 보완하면 「결정」의 '강제동원'에 관한 부분의 의미는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한국은 식민지배 불법성에 근거하여 강제동원 자체의 불법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했다.

2) 한국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근거로 법적 차원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3) 한국 국민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근거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결정」의 '강제동원'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2007년 및 2010년의 지원법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대법원 판결의 '강제동원'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 판결은 「결정」을 뒤집은 것이 아닌 것이다.

"신의칙상 곤란"?

위에서 인용한 2005년 8월 26일 제3차 공동위 회의자료 중 강제동원에 관해 "무상자금에 강제동원 피해보상금이 반영된 것이 정치적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이라는 부분에 대해 한마디 덧붙인다. 이 부분은 「결정」에 포함된 것이 아니므로 공동위의 최종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국내의 비판론자들이 특별히 문제 삼는 부분이기에 짚어두기로 한다.

'신의칙'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상대편의 신뢰에 어긋나지 아니하도록 성의 있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어떤 요구를 했다가 관철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락 지은 후에 다시 동일한 요구를 하는 것은 분명 신의칙 위반이다. 하지만 이전에 요구한 적이 없는 사항에 대해 근거를 갖추어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 위반일 수 없다.

위의 제3차 공동위 회의자료의 문장에 따르더라도 한일회담 당시의 요구는 "정치적 요구"이고, "신의칙상 곤란"하다고 판단한 대상은 "법적 피해보상 요구"이다. 전자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피해에 대한 요구이고, 후자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피해에 대한 요구이다. 요구의 성격도 대상도 다르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이전에 했던 요구를 "다시" 하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비문이다. 이 점에서도 공동위의 논리적・법적 엄밀성 부족이라는 한계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05.11.18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05.11.18
ⓒ APEC

관련사진보기


노무현 정부의 한일회담 문서 전면공개, 공동위의 활동과 「결정」, 그리고 지원법의 제정과 피해자 지원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1965년에 한국 정부가 했어야 함에도 하지 못한 일을 뒤늦게나마 챙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해자들과 전 세계 시민들의 한일 과거청산을 위한 지난한 노력에 응답한 한국 정부의 조치로서 분명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충분했는지에 대해서는 짚어두지 않을 수 없다. 고령의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정부의 입장을 보다 엄밀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2018년의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은 그 부족했던 엄밀성을 채워줌으로써 한일 과거청산의 법적 논리를 완성한 것이다. 그것은 2005년의 「결정」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결정」의 연장선상에서 「결정」이 남겨 둔 '법적 차원'의 판단을 추가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1965년 당시의 한국 정부가 남겨 둔 '묵은 과제'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2018년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야말로 '법적 차원'에서의 대한민국의 최종입장이다. 그것을 굳건한 발판으로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이다.

태그:#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한일, #일본, #징용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