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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동학 교당에 게시되어 있는 최제우 공식 영정
 전국 동학 교당에 게시되어 있는 최제우 공식 영정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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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정부의 탄압과 전통유생세력의 적대를 받아가면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5백년 왕조체제에서 시달림과 소외 속에 살아온 기층민중들이 동학으로 모여들었다. 여성들도 많았다. 차별없는 평등사상과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권사상, 그리고 썩은 세상을 한바탕 뒤엎자는 개벽사상이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동학은 최제우가 창도할 때부터 일정한 조직이 갖춰져 있었다. 그것은 여타의 종교단체와 다르지 않았다. 동학에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확장되었다.

최제우가 1861년에 포교를 시작하자마자, 동학 교세는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전지역에 확대되었다. 최제우는 증가하는 교도의 효과적인 관리, 체계적인 수련ㆍ포교활동 등을 위하여 교도를 조직하였다. 그 조직이 접제(接制)였다.

그러나 최제우 처형과 영해민란으로, 접(주)제는 와해되었고 계조직 형태로 동학교단은 유지되었다. 최시형을 비롯한 일부 지도자의 재건활동으로, 접주제는 1870년대 중반에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접조직은 전도활동을 통해 많은 교도를 확보하면서 여러 개의 접으로 분화된다. 이렇게 늘어난 접들은 제각기 독립적이지만 최초의 접주와 인맥관계를 형성하면서 한 집단을 이룬다. 이 집단을 포(包)라고 부르고, 포의 책임자를 대접주라 하였다. 포(包)라는 용어가 주요 교단자료에 동시에 나타난 것은 1883년부터이고, 이 시기 이후 모든 교단기록에 빈번히 나타났다.

따라서 포조직은 1883년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91년에 이르면 전라도 지역에만 16포가 존재할 정도로 포 조직은 일반화되었다. 최시형은 1893년 3월에 포조직을 교단조직으로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동학교단에는 각 지역단위조직인 포접제 뿐만 아니라, 그 상위의 중앙본부로 법소(法所)가 있었다. 이와 같이 동학교단은 교도들의 효과적인 관리, 체계적인 수련 및 포교활동 등을 위한 조직으로써 법소 - 포 - 접 조직으로 체계화되었다. (주석 1)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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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이같은 법소 - 포 - 접주제의 끈끈한 조직으로 유지되었다. 관의 탄압과 교통이 지극히 불편했던 시기에 삼례집회를 비롯하여 도처에서 수차례 수천, 수만 명씩이 모이게 된 것은 도인들이 지역의 포 - 접제를 통해 연대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하였다.

초기 동학도인들의 소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교조의 신원이었다. 고종 정부가 외래종교인 기독교와 천주교에는 박해를 거두면서 자생종교인 동학은 심하게 탄압하면서 도인들의 분노와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관리들은 동학도인들의 재산을 갈취하거나 이유불문하고 관가로 끌어가 매 타작을 일삼았다. 이로써 많은 도인들이 족보에서 제명되거나 친척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

동학은 민간 종교단체로서 명실공히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관헌의 탄압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특히 동학에 모이는 자들이 현세를 통탄하고, 관인의 부정과 외국의 압박에 불만을 가지고 시사를 논함에 이르니, 나날이 그 탄압은 우심해졌다. 당시 유교ㆍ불교ㆍ선교의 삼종교가 함께 퇴폐해서, 민중의 정신적인 위안처로서는 동학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학도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에 다다라 조정은 동학의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1885년에 충청도 관찰사 심상훈에게 명하여 다시금 동학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동학은 천주교의 포교가 이미 허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만을 엄금함은 부당하다고 지탄하고, 제2교주 최시형에게 청해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호소하였다. 최시형도 이 동학도의 요망에 좇아서, 드디어 이 운동을 일으키는 데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1892년 12월, 제2교주 최시형은 손천민에게 명하여 격문을 초하게 해서 이를 각 도의 동학도에게 통보하였다. 따라서 각지의 접주는 동학 각 포내의 동학도에게 전하여,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하고, 그 집회를 전라도 삼례 도회소에서 열기로 하였다. (주석 2)


주석
1> 이희근, 「1894년 동학교단의 포접제」, 『사학지』, 194~195쪽, 단국사학회, 1997.
2> 신국주, 「감오동학혁명의 발생사적 배경」, 『갑오동학혁명의 쟁점』, 116~117쪽, 집문당, 199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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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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