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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4월 4일 서울 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린 '키코(KIKO) 사기사건' 검찰 재고발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 금융소비자연맹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변동하면 약정한 환율에 외화를 팔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으로,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 헤지 목적으로 대거 가입했다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상당수가 피해를 봤다.
 지난 2018년 4월 4일 서울 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린 "키코(KIKO) 사기사건" 검찰 재고발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 금융소비자연맹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변동하면 약정한 환율에 외화를 팔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으로,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 헤지 목적으로 대거 가입했다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상당수가 피해를 봤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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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달러 환율(환율) 상승이 지속될 분위기가 아닙니다." (2007년 5월 신한은행)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국제금융시장 경색이 일어나고 있으나, 한국은 수출증가 등으로 환율이 지속 하락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음." (2007년 10월 우리은행)


11년 전 시중 은행들이 수출 중견기업 '일성하이스코'(일성)에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nock-in, knock-out: KIKO)를 판매하기 위해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은행들은 키코를 구매한 기업들에 손실을 안겨줄 환율 상승 등 대외적 변화를 예상하고도 이를 숨긴 채 키코 판매를 강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 움직이면 미리 정한 환율로 달러를 팔 수 있도록 만든 금융상품이다. 은행들은 환율 변동이 컸던 지난 2007~2008년 키코를 '환 헤지'(위험회피)가 가능한 상품으로 소개하며 수출기업들에게 판매했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기업의 경우 환율이 하락하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드는데, 환율이 떨어져도 일정한 환율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상품을 홍보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환율이 1500원대로 폭등하자, 수많은 기업들이 계약한 돈의 2~5배를 은행에 물어주게 되면서 큰 손실을 입고 파산하기도 했다. 해당 상품들은 환율이 크게 상승할 경우 오히려 기업들이 큰 손해를 보는 구조였지만, 은행들이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계약을 맺은 결과였다.

피해기업 가운데 피해배상과 관련한 법원의 판결을 받지 않았거나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을 밟지 않은 곳 중 일성을 포함한 4개 기업이 2018년 분쟁조정을 신청했고, 지난달 12일 그 결과가 나왔다.

<오마이뉴스>가 최근 일성에 대한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결정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키코를 판매한 은행들은 2007년부터 수차례 이메일 등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면서 키코 계약을 강권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약에 불리한 자료는 제외한 은행들

조정결정서 내용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일성에 무려 37차례 이상 이메일을 보내 환율하락 위험을 방어하기 위한 상품 계약을 권유했다. 2007년 1월에는 '환율이 하반기로 갈수록 1000원을 향해 오를 것으로 전망한 기관 중 바클레이즈가 원화강세(환율하락)로 바꾼 것이 눈에 띈다'고 언급했다. 2월에는 환율이 990원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측한 JP모건의 자료를 제외한 채 환율하락을 예상한 기관의 자료만을 첨부해 송부했다.

또 같은 해 10월 신한은행은 이메일에서 키코와 유사한 상품을 소개하면서 '환율이 별로 오르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꽤 괜찮은 상품이다, 일성에게 딱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런가하면 2007년 10월에는 '환리스크관리와 파생금융상품' 자료를 통해 환율이 880~930원대에서 자리 잡을 것으로 전망했다. 11월에는 일성 직원을 대상으로 '원화강세 이제 시작이다'라는 제목으로 설명회를 열고 환율하락이 지속될 것으로 예측했다.

다른 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은행은 25회 이상 이메일을 보냈는데 구체적인 환율수치를 제시하면서 지속적으로 환율이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2007년 10월 17일 우리은행은 일성에 보낸 이메일에서 '첨부한 가격은 기존보다 2원 이상 좋은 가격'이라고 설명하며 상품 계약을 부추겼다. 이어 10월 29일에는 '글로벌 달러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 환율하락이 지속될 것, 상품을 통해 방어할 수 있는 환율이 더 중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급하다" 계약 부추겨... 눈덩이 손해
 
12일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조정결정서에 담긴 한국산업은행과 일성하이스코 쪽 이메일, 통화 내용.
 12일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조정결정서에 담긴 한국산업은행과 일성하이스코 쪽 이메일, 통화 내용.
ⓒ 키코공동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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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업은행의 경우 2007년 5~8월 동안 8차례 이메일을 보냈는데, 환율이 905~925원 사이에서 움직일 것으로 예측한 내용을 담은 'kdb국제금융포커스' 등 자료를 첨부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8월 31일에는 '940원대에 거래할 기회가 점점 없어지므로 급한 마음에 상품 설명을 송부한다'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이에 일성 직원이 산업은행에 전화를 걸어 '추진하겠지만 아직 (상부의) 결재를 못 받은 상황이다, 공식적으로는 거래하지 않은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다급히 계약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산업은행의 권유에 계약을 맺은 일성은 해당 계약으로만 21억원 가량 손해를 보게 됐다. 이후 같은 해 11월에도 산업은행은 '매력적인 환율 레벨이라 좋은 타이밍' 등의 내용을 담은 4차례의 이메일을 통해 상품 계약을 종용했고, 일성은 약 119억원의 손실을 떠안게 됐다.  

대구은행도 2008년 1월부터 투기적 요소가 강한 상품인 'VN WinKIKO' 등에 대한 설명을 지속적으로 이메일로 보내면서 손실·이익에 대한 내용은 포함하지 않았다.

결국 신한·우리·산업은행 등과 키코 등 상품을 계약한 일성은 모두 합쳐 921억2100만원의 손실을 보게 됐다.  

수출금액 2배나 계약? "고객보호 다하지 않아"
 
지난 12일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조정결정서에 담긴 피해기업 일성하이스코의 손실액.
 지난 12일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조정결정서에 담긴 피해기업 일성하이스코의 손실액.
ⓒ 키코공동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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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는 은행들이 환율 관련 정보를 잘못 제공한 것뿐만 아니라, 필요로 하는 수준보다 더 큰 규모로 계약을 체결한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분조위는 "2007년 결제되지 않은 통화옵션 금액이 직전년도 수출액의 절반에 육박했고 2008년 기준으로는 직전년도 수출액의 2배 이상이었다"며 "(기업들이 맺은) 통화옵션계약이 모두 과도한 규모의 헤지(오버헤지) 상태에서 체결돼 손실이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고도의 고객보호의무를 부담하는 은행이 고위험 상품을 환헤지 상품으로 권유하고자 할 경우, 공시자료 등을 통해 기존 헤지 물량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파생거래 집중시스템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은행의 과도한 통화옵션계약 권유가 정당화되거나 고객보호의무를 다한 것으로 평가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은행이 환율하락에 따른 손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상품을 팔았다면 기존 계약규모를 파악한 뒤 적절한 수준으로 계약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분조위는 은행들에 대해 일성이 입은 손실액의 15%인 약 141억 원을 배상할 것을 주문했다. 이와 함께 A기업 손실액의 41%(42억 원), B기업의 20%(7억 원), C기업에 대해선 15%(66억 원)를 배상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해당 은행과 기업 모두가 조정안을 받아들일 경우 조정 절차는 마무리된다. 키코 피해기업들을 대변하고 있는 키코공동대책위원회는 1월 말 최종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송기호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는 "키코 사건 가운데 죄질이 나쁜 부분은 충분히 사기죄가 성립될 수 있다"며 "이에 대해 별도로 수사가 이뤄져야 온전하게 피해가 배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분조위에서 나온 증거는 앞으로 은행들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공소시효가 남아 있어 검찰이 조속히 수사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한편 신한·우리·한국산업·대구은행은 분조위 조정과정에서 "일성의 수출실적과 전망을 바탕으로 환위험 헤지에 적합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했다.

태그:#키코, #금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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