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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회,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용균재단, 직장갑질119 등 55개 단체가 모여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출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지난 2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회,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용균재단, 직장갑질119 등 55개 단체가 모여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출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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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명의 방송 스태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CJB청주방송(이하 청주방송)에서 14년 동안 일했던 PD였다. 청주방송은 대학 졸업 직후 프리랜서 조연출로 시작해 14년 동안 몸담았던 곳이었다. 프리랜서 신분으로 청주방송의 주요 프로그램과 행사를 연출해왔지만 그가 받았던 월급은 160만 원. 제대로 된 계약서 없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던 그는 자신과 조연출, 작가의 임금을 올리고 최소 제작 인원을 확보해달라고 요구한 이후 해고를 당한다. 이후 청주방송을 상대로 자신을 노동자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패소 판결을 받았고, 그렇게 싸우던 그는 지난 2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죽고 싶다. 눈 뜨는 게 힘들고 괴롭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
-이재학 PD 유서 일부


SBS의 어느 이름 모를 방송작가의 투신부터 박환성-김광일PD, 이한빛PD의 죽음 이후에도 결국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재학PD의 별명이 '라꾸라꾸(간이침대)'였다는 기사를 읽고 주변의 수많은 '라꾸라꾸'가 한 명씩 떠올랐다. 그 어느 누구여도 이상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그는 꼭 진실은 밝혀질 것이며 승리할 거라고, 다시 좋은 모습으로 청주방송에서 인사드리겠다는 말을 청주방송 구성원들에게 남겼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지금까지도 그대로인 건, 그를 라꾸라꾸로 내몰 수밖에 없는 살인적인 방송제작 시스템 때문이다.

방송국의 수많은 '무늬만' 프리랜서들 

방송사 직원들이 파업을 해도, 방송국에서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돼도, 방송 제작비가 점점 줄어도, 기어코 방송은 만들어진다. 그 빈틈을 몇날 며칠 집에 가지 못하고, 어젠 누가 잤었는지 모를 라꾸라꾸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작가, 독립PD 등의 프리랜서 방송 스태프들이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 직원들과 똑같이, 때로는 더 많은 일들을 해오고 있지만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의 노동은 보호받지 못한다. 기존의 업무 외의 일을 도맡게 되고, 노동시간 규정이 없다 보니 밤낮으로 일을 한다. 하다못해 계약서가 있어도 언제든 유연하게 해고가 가능하다. 결국 방송을 사랑하는 이들의 열정을 볼모 잡아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요즘 같은 세계적 재난 상황이 닥쳐 방송이 급하게 엎어지거나 방송 송출이 연기될 경우 일은 했지만 임금은 받지 못하게 되는 방송 스태프들이 늘어난다. 당연히 생계에 타격이 가고 휴업수당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현실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방송 스태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죽음들, 그 이후 

2008년 SBS 목동 사옥에서 한 방송작가가 투신해 사망한 일이 있었다. SBS의 모 프로그램에서 보조작가로 일하고 있던 20대 초반 여성이었다. 당시 경찰은 사건을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잠정 추정한다. 그의 죽음 이후 방송계 신입 종사자들이 휴일 근무 등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현저히 낮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 이후 바뀐 것은 전혀 없다.

2017년에 사망한 박환성, 김광일PD를 기억한다. EBS는 박환성PD가 받아온 정부 제작지원금의 40%를 간접비 명목으로 내놓고, 저작권까지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빠듯한 제작비로 인한 열악한 환경에서 해외 촬영을 하다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같은 해 CJ 드라마 현장의 노동 착취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이한빛PD의 죽음 이후 청주방송의 이재학PD까지... 이런 억울한 죽음이 2020년에도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수많은 노동 이슈에 대한 방송을 만들어오던 방송사는 방송 제작 현장 안에서 일어난 이 죽음들에 또 한 번 숨죽이고 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방송 스태프도 노동자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근원적 이유는 같다. 방송 스태프들을 한 번 갖다 쓰고 버려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방송사의 노동 인식 부재 때문이다. 지금의 방송 노동 환경은 방송사에서 방송 스태프들을 방송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료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착취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죽음의 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 그동안 수많은 동료들이 맥없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봐왔던 우리는 더 이상 반복되는 죽음 앞에 자괴감만 느끼고 있을 수 없다. 이재학 PD가 죽음으로 외친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 처우에 대해서, 방송사가 답을 할 차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김한별 부지부장입니다.


태그:#이재학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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