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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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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지난 2월 4일,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PD가 남긴 유서의 일부 내용이다. 2004년 청주방송의 조연출로 시작한 그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도 방송사에서 먹고 자고 일한다고 하여 '라꾸라꾸(간이침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14년간 '프리랜서'였다. 2018년 자신과 동료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모든 프로그램 하차' 통보였다. 이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는 왜 '미칠듯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서 두 장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게 됐을까? 방송산업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에 그 이유가 있다. 방송산업을 구성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다른 이름은 '프리랜서'다. 카메라 앞의 방송연기자도, 이재학 PD와 같은 스태프도 대부분 프리랜서로 불린다. 이들은 자유계약에 의해 노동한다고 하지만, '고용 불안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방송연기자'는 고용시장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매번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방송사 및 제작사는 작품의 배역에 맞는 연기자를 고용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다. 연기자는 배역을 맡고 연기할 기회를 얻기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갑'과 '을'의 명확한 수직관계 속에서 방송연기자는 노동문제에 대해 신고는커녕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현장에서 불만을 품었다가는 다른 작품에서 선택의 기회마저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연기자노조')의 조합원이 겪는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출연료 미지급, 소속사 정산문제, 캐스팅디렉터의 횡포, 열악한 노동환경 등에 대한 민원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먼저, 연기자의 '출연료 미지급 문제'는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일이다. 연기자노조가 집계한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 출연료 미지급 현황'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9년까지 KBS, SBS, MBC 지상파 3사에서 연기자가 받지 못한 출연료가 총 31억 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지급 드라마로는 KBS <공주가 돌아왔다>, <국가가 부른다>, <도망자>, <국수의 신>, SBS <더뮤지컬>, <신의> 등이 있다. 미지급의 원인은 외주제작사의 재무 불건전성, 방송사의 책임회피 등 다양하다. 출연료는 연기자의 생계와 맞닿아 있다. 출연료 미지급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연기자의 삶을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

이뿐만 아니라, 방송사에 의해 좌우되는 편성의 피해는 고스란히 연기자와 스텝들의 몫이다. 지난해 MBC에서 방영한 모 드라마는 당초 계획했던 119부작에서 시청률 저조를 이유 삼아 99부로 조기종영했다. 2016년 KBS의 한 대하사극의 경우, 캐스팅과 리딩까지 해놓고서는 편성 취소를 고작 문자메시지로 통보했다. 일일극이나 사극의 경우 보통 6개월 이상 촬영이 진행되므로 이에 맞춰 스케줄을 정리하는데,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연기자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코미디언의 경우 더 열악하다. 2017년 5월 SBS <웃찾사>가 방송사의 일방적인 통보로 종영했다. 수년간 일주일에 한 번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하기위해 일주일 내내 회의하고 리허설하고 노력한 코미디언들은 이를 대체할 대안이 없는 상태로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캐스팅디렉터'는 연기자에게 또 다른 '갑'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캐스팅디렉터는 제작사와 연기자를 중개하며 그 사이에서 30%의 수수료(AP, Agency Pay)를 관행적으로 챙겼다. 출연료로 생계를 이어나가기에도 벅찬 조·단역 연기자에게 하루 밥값 8천원에까지 30%를 요구하는 수수료는 큰 부담이다. 출연료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캐스팅디렉터가 임의로 지연지급하거나 미지급해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경우도 있다. 캐스팅디렉터의 부당한 관행에 대해 연기자노조는 2019년 주요 방송사와의 단체교섭을 통해 '캐스팅 비용 사용자 지급 원칙(방송 프로그램 제작비에 캐스팅 비용을 별도로 책정해 연기자가 아닌 사용자인 방송사가 부담)'의 합의를 끌어냈지만, 여전히 AP 요구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연기자의 건강한 노동을 방해한다. '쪽대본'은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대표적인 문제로 꼽힌다. 생방송 촬영을 난무하게 하는 쪽대본 문제는 연기자를 '연기 기계'로 만들고, 드라마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살인적인 촬영 시간과 열악한 환경은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연기자와 스태프를 그대로 노출시킨다. 최근 OCN <본 대로 말하라> 촬영 도중 차량 충돌 사고로 인해 스태프 8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불안정한 노동환경에 따른 금전적 피해는 고스란히 연기자의 몫이다. 최근 한 단역 연기자 A씨는 갑작스러운 촬영취소 통보를 듣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일방적인 촬영취소는 연기자에게 스케줄 변경, 출연료 미지급 문제를 야기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앞서 살펴본 사례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프리랜서'가 가진 위치에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기자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최소한 보장받아야 하는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연기자노조는 7년 동안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한 소송을 이어나갔다. 결국 지난 2018년 10월 12일, 대법원은 연기자노조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교섭단위분리 재심 결정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방송연기자도 관계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라는 판결로 연기자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방송연기자가 '연기하는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방송산업의 주체로서 방송환경 개선에 힘을 더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법원판결 이후 연기자노조는 방송사와 상생하는 파트너로서 연기자의 처우 개선을 우선으로 한 열악한 방송제작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기자의 든든한 울타리를 자처한 연기자노조의 움직임이 방송산업현장의 변화를 조금씩 끌어내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은 또 다른 과제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에 대해 연기자노조는 "방송연기자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입장이다. 방송산업 전반에 흐르는 고용 불안정의 문제가 해결되고 연기자를 포함한 방송산업 종사자가 불합리한 일을 겪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연기자노조는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송창곤 대외협력국장입니다.


태그:#이재학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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